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막 9:9-10)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당신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변화산에서부터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경험한 이 세 명의 제자들의 머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부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죽음은 이 땅 가운데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부활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도, 감을 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죽었다가 스스로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 개념 자체가 매우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제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서로에게 질문하며 궁금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단호하면서도 매우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는다? 그게 뭐지?'
타락 이전의 에덴에는 죽음은 전례없는 것이었다. 매우 기이한 것이었고, 도대체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받아 들일 수도 없는 개념이었다. 본적이 없으니 이해가 불가능할 수 밖에...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시기 위해 진땀을 흘리셨을 것 같다.
그런 인간이 타락 이후 죽음과 늘 동행하고, 늘 친숙하게 살아가는 죽음의 친구가 되어 버렸다. 에덴에서 그렇게 부자연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그 현상이 이제는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성인이 된 인간 중,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친구가 되어버린 불쌍한 존재인 인간에게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셨다. 부활... 마치 아담이 죽음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 그리고 인간들은 부활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인간에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몸소 보여 주셨다. 그것이 없다면 부활이 무엇인지 이해도 하지 못하고, 따라서 소망도 갖지 못하고 살아갈 불쌍한 우리들을 위해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시고, 소망하게 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부활에 대해서 희미한 감각 외에는 가진 것이 없다. 그것이 나에게 실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기는 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온전히 뿌리가 내려서, 확신 가운데 부활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 이 땅에서의 삶을 드리는 그런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 부분을 성령께서 채우신다. 나로서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안에 분명히 인격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일하셔서 부활을 소망하게 하시고, 결국은 부활 가운데 참여하도록 인도하신다.
주님의 날... 그 심판의 날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 그곳에서는 부활이 더 이상 낯선 개념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부활을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영원한 삶도 역시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의 양식이 되지 않을까?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죽음이 이제는 그 어느 것 보다도 낯설어 지는 세상... 그 세상이 바로 내가 가야할 주님이 계신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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