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신을 보는 것... 제발 그만....

어제... 오랫만에 한 지체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믿음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고, 분노와 체념이 섞인 가운데 내 앞에 나타난 그 지체...
자신의 믿음없음, 자신이 주님 안에 있지 않음을 확신하고 내 앞에 나타는 그 지체를 보면서 참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리고 도와주고 싶었다.

믿음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십자가의 형벌, 그 대속의 죽으심을 인정하시 않으려고 하고, 그것에 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이 있는 그를 보면서, 복음이 그에게 온전히 영접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고, 그와 함께 그것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그는 비록 영접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포기한 가운데 어두움 속에 있던 그 상태를 벗어나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 역시 다른 지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데, 그리고 자신의 구원의 여부를 확인하는데 obssess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역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주님을 놓치고 있었다.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듯 했다. 오로지 나... 오로지 자신이 믿음없음과 자신의 죄와 자신의 불신앙의 증거들만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도대체 그것들을 그렇게 들여다보는 이유, 들여다보게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은 바로 그것이 신앙의 최고 목적인 것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부족함과 믿음없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절망하고 있었고, 불안해 하고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다.

길이 되신 예수님... 진리가 되신 예수님...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자신만을 돌아보는 가운데, 영혼은 시들어가고 파괴되어간다. 그렇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내 안에는 소망이 없다. 내 안을 들여다 볼 때 나오는 것은 구정물처럼 더러운 것들, 약한 것들, 추악한 것들 뿐이다.
성경은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모든 사역과 모든 가르침은 그분께 집중되어야 한다. 그분만이 소망이고, 그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집나간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만을 바라본다면, 비관자살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신앙 생활, 교회생활을 해봐야 의미가 없는 것이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생각한 것은 자신의 처지뿐만 아니라 선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분의 풍요와 그분의 인자하심을 생각할 때, 집을 향한 발걸음을 내 디딜 수 있는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그들의 시선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그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진정으로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 때만 가능하다. 내가 내 안을 들여다 볼 때, 내 부족함을 보긴 하지만, 결코 제대로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거기에서 내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하심이 내 추함을 드러낸다. 그분의 선하심이 내 악함을 드러낸다.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이 내 사랑없음을 드러낸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비춘 내 모습이 매우 정확하게 드러난다. 거기에서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절망하는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갖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가능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라는 질문이 어떤 면에서보면 매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실재적으로 사람들을 저주의 길로 이끄는 위험한 질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질문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모든 관심과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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