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해야할 마귀의 공격

마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엄청난 능력을 가진 영적인 존재.
우는 사자와 같이 늘 내 옆에서 있어 나를 노리는 자.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마귀는 그리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내 주인이 되시고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를 두렵게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그의 이름으로 맞서 싸우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마귀의 가장 큰 능력인 속이는 것, 그리고 그 속이는 것에서 비롯된 영적감수성의 마비인 것이다.

다윗에 이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아도니야. 그는 솔로몬의 자비로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그 스스로가 마땅히 왕이 되었어야 했다는 생각과 그로 인해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급기야, 음흉한 마음을 품고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에게 접근한다.다윗의 말년에 그를 시중들기 위해 취했던 매우 아름다운 여인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는 것. 그가 밧세바에게 요구한 것은 어찌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스라엘에 소문난 미인이었고, 젊은 여자를 탐내는 것은 모든 남자들의 공통적인 욕망인 것이다. 밧세바는 그것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급기야 솔로몬에게 아도니야를 위해 청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하지만 아도니야의 요구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왕위를 이어받은 왕이 선대의 왕의 첩을 자신의 첩으로 취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였다. 압살롭이 다윗에게 반역한 후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궁에 남았던 다윗의 첩들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맺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확실하게 하였다. 아도니야는 바로 그것을 노리고 아비삭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음흉한 계략이었지만,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 일에 동참하여 협력하는 조력자가 되어버린다. 그의 몇 마디 말로 아도니야에 대한 밧세바의 경계심을 풀게하고, 그 일의 중대함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킴으로 그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다. 그의 속임에 넘어가는 것이다.

아도니야의 계략은 마귀가 늘 사용하는 계략이다. 그는 몇 마디의 말을 통해서 인간의 죄에 대한 감수성과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마비시킨다. 하와에게 나타났던 뱀이 그랬고,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며, 충실한 부하를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다윗에게도 그랬다. 죄에 대한 감수성을 마비시키면, 엄청난 죄조차도 그리 대수롭지 않은, 해 볼만한 일이 되어버리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 역시 잘 느껴지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죄를 감행하게 된다.

마귀의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이겨내는 길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내 모든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것이다. 아무리 뱀이 하와의 영적 감수성을 마비시켰다 하더라도, 하와가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행동하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말씀을 기준으로 행동했다면, 그가 죄를 짓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선악과가 그 아무리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하더라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었다면, 혹은 그것을 따먹게 되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했다면, 선악과를 따 먹을 수가 없다. 밧세바와 간음을 계획하던 다윗이 간음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전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했더라면, 혹은 살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끔찍한 형벌을 기억했더라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인 십계명을 기억했더라면, 그 끔찍한 죄를 저지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진리는 단 하나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으며,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보기에 별 문제없어 보이는 것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면, 마귀는 결코 나를 쓰러뜨릴 수가 없다. 마귀는 내 영적 감수성,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마비시킬 수는 있지만, 말씀을 통해서 보여지는 분명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도 말씀을 사랑해야하는 이유... 말씀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 말씀으로 나를 단련시켜야 하는 이유... 말씀 앞에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무릎꿇는 훈련을 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래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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