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 사이에서는 당시 "선생"의 연설 테이프가 돌아 다녔다. 그 연설은 민주화에 대한 정치연설이었는데, 지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다. 나는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가끔씩 그 연설테이프를 아버지와 함께 들었다. 내 아버지와 광주에 있는 대부분의 아줌마 아저씨들은 그 연설에 매료되었고, 그분을 항상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존경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머니는 매우 슬퍼하고 계셨고 눈물을 흘리셨지만, 나는 그 소식에 매우 기뻐했다. 없어져야할 독재자가 사라졌다는 것과 이제 민주화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4학년 짜리가 뭘 알았길래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정말 사실이었다.
1980년 초 TV에서는 머리가 벗겨진 군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했다. 그 이름은 전두환. 그에 대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적개심이 내 안에 가득했고, 그 사람이 더 이상 TV에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때로는 그 사람에 대해서 대놓고 욕을 하기도 했다. 그 해 4월과 5월의 광주는 매우 어수선했다. 광주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모이며 "전두환이 물러가라. 김대중선생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그것이 데모라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하지만 리듬을 만들어 노래로 부르는 구호를 나도 따라 외치며, 김대중 "선생"에 대한 희망과 마음이 점점 더 강해져 갔다.
1980년 5월 18일... 학교에 군인 아저씨들이 들이 닥치고, 학교를 장악했다. 아저씨들은 무서운 눈초리로 초등학교 학생들을 노려봤고, 우리는 그들을 무서워 했다. 늘 연말이면 위문편지를 쓰던 그 "국군 아저씨"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었다. 며칠 후 학교는 폐쇄되었다.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던 작은형은 수학여행이 취소되었다고 투덜댔다. TV는 나오지 않고, 많은 경우 전기도 끊겼다. 밤이면 총알이 날라와 박히는 소리에 두려워 떨었다. 전남 도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던 우리 가족은 그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었다. 어느 날 무서운 군인들이 물러가고, 시민 데모부대가 광주를 장악했다. 내 인생에 그 때처럼 평화와 나눔과 섬김이 충만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동네의 가게들은 무료로 물품들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필요한 만큼 외에 더 가져가는 자들이 없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조직하여 주먹밥을 만들어서 데모군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 중에 우리 어머니도 계셨다. 경찰이 필요 없을 정도로 치안 유지가 잘 되었고, 곳곳에서는 북한 간첩으로 보이는 자들을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는 소문도 들렸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공수부대는 다시 들이닥쳤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너무나 많은 피가 희생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게 군인들에 의해 처리되었다. 그렇게 5.18은 끝이 났다.
개학하고 학교를 갔다. 거기에는 다시 무서운 얼굴로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는 군인 아저씨들이 있었고, 온 광주는 패배의 아픔, 그리고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실패했다는 패배감에 팽배해 있었다. 도청 근처를 다녀온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셨다. 수 없이 늘어 있는 관들... 그리고 그 중 한 젊은 처녀의 죽음에 어머님은 몸서리를 치셨다. 양 가슴이 잘려나가 죽은 그 젊은 여인. 그래서 그 잘려나간 그 가슴이 부어 올라서 관을 닫을 수가 없었던 그 시신을 직접 보고 오신 어머니는 그 비극에 오열하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그 어머니의 오열과, 그 비극적 여인의 시신과,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 대통령의 이미지가 늘 오버랩이 되었다.
그 때, 조국의 희망은 세 명의 김씨들, 특별히 김대중, 김영삼 두 명의 민주화의 화신들에게 있었다. 1987년 고 3때,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친구이자 5.18 책임자 중의 한 명인 노태우와 야권 통합에 실패한 김영삼, 김대중 세 명의 싸움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김대중씨로 야권이 통합되어야 했지만, 당시 야권은 김영삼씨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 했고, 김대중씨가 거기에 불복하면서 삼파전이 되었다. 내가 김대중씨에 대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그 때 김대중씨가 야권 통합에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김영삼씨를 밀었다면 정권은 그 때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쨋든 결과는 양김의 패배와 노태우씨의 당선이었다. 그 결과가 발표된 그날 새벽 첫 차를 타고 학교로 공부하러 가던 버스 속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버스 안은 매우 조용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라디오조차 꺼져 있었다. 광주의 모든 사람들이 비통함과 패배감과 자괴감 속에 괴로와 했다.
5년 뒤... 1992년(혹은 1993년?) 또 한 번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제는 호랑이를 잡으로 여권으로 들어간다는 김영삼은 반민주화 세력인 민자당과 야합을 하고, 거기에 맞서 김대중선생은 야권의 후보로 나왔다. 당시 포철 회장을 역임한 박태준씨와 김종필씨도 후보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김대중씨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당시 영접한 지 얼마 안 되었던 나는 조국을 위해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를 바랬다.(그 때는 영접만 했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때라서 내 맘대로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기대했었다.) 광주에서 99%의 지지가 있었고, 전남에서 95%의 몰표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결과는 김영삼의 당선... 그 해 그 겨울에 나는 교회와 선교단체 예배를 나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지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정치에 대한 환멸로 몇 주간 하숙집 방에 처박혀 아무데도 나가지 못했다. 그 패배감과 사회정의와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의심, 반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4년 정도 지난 뒤... 나라는 IMF의 대환란을 맞아 무너졌다. 김영삼 정부의 정책들을 보면서 너무나 위태위태하다는 마음 가운데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무너진 것이었다. IMF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었고, 그로 인해 당시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에 대한 심판으로 이번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선택했다. 그 때의 그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지금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확정 신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광주와 전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적임자가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아니 가장 어려움 가운데 처해있는 바로 그 때에 당선이 되어 나라를 이끌 것이라는 것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대 했던 대로, 그 분은 IMF위기를 극복해 냈다. 비록 신용카드 정책이라는 오점을 남기긴 했지만, 큰 틀에 있어서는 경제를 회복시키는 전기를 마련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치에 있어서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부분은 아직되 아쉽긴 하지만,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섬기는 자리라는 것, 그리고 상식이 통하는 정책을 추구했다는 면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던 분이었다. 외교, 특히 대북정책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가치로 인해서 남북화해를 이루었고,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이루어 낸 업적을 이루었다.
그가 이루지 못했던 권위주의 청산은 그 다음 정권인 노무현 정권을 통해서 달성이 되었다. 민주화의 화룡정점을 이룬 것이다.
김대중!
그는 나에게 있어서 정치였고, 민주화였고, 내 인생의 바른 가치관이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스승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 "선생님"이시다. 김대중 선생님.
천주교 신자인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그 부분이 가장 안타깝다. 하지만, 내 인생을 설명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큰 영향력을 끼친 한 인물이 서거하셨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오늘 그분에 관한 기사와 사진을 보면서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 내 "선생"이신 김대중 대통령...
너무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