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Money Can't Buy: The Moral Limits of Markets by Michael Sandel
방금 Michael Sandel의 What Money Can't Buy: The Moral Limits of Markets를 다 읽었다. 올해 출판된 책으로 우리 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하버드대 철학과 교수의 책이다. 전공책들을 읽느라 너무 바빠서 도저히 틈이 안 났지만, 그래도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를 다루는 책이라 전철을 오가며 틈틈이 읽어 오늘에야 읽기를 마친 것이다.
Sandel이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상당히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시장 메커니즘이 언제나, 그리고 어느 분야에나 최선의 시스템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특별히 후반에 갈수록 시장의 논리는 삶의 여러 분야에 파고 들었다. 심지어 "결혼시장"이라는 말이 전혀 거부감이 없이 사용될 정도로 거의 모든 분야에 시장 메커니즘은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Sandel은 이 책에서 그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묻고 그 현상을 살펴보고 있다.
학자인 나로서는 Sandel이 보다 더 깊이 있고 치열하게 글을 쓰지 않고, 가볍고 쉽지만 깊이가 없는 책을 저작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스스로는 public philosopher로 규정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학자인 것을 고려하면, 그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글을 쉽고 재미있게 씀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들로 하여금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Sandel이 던지는 질문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경쟁상대가 있었고, 어느 시스템이 더 우월한가에 대해서 스스로를 입증해야했고, 자본주의는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라는 비교대상을 통해서 평가되었다. 하지만 구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로 인정되었고, 그 이후 자본주의는 유일한 "진리"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항상 옳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가운데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인 시장 메커니즘 역시 "진리"로서 인류가 가진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최고의 시스템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승리와 그 시스템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그 전에는 적용되지 않던 많은 영역으로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으로 이어졌다. Sandel은 공항이나 놀이공원 등에서 돈을 더내면 티켓을 사러 줄을 설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게하는 제도, 시민권 판매, 몸무게를 줄이면 돈을 주는 인센티브 제도, 부자 자녀의 대학입학 허가, 돈으로 사는 친구관계, 선물의 현금화, 죽음의 상품화, 학교와 감옥까지 침투한 광고 등등 많은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70, 80년대 급증한 공공영역 혹은 개인영역에의 시장 메커니즘의 침투를 보여준다.
시장 메커니즘의 도입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 즉 효율성의 극대화를 그 논리로 내세우지만, Sandel이 보여주는 것은 시장 메커니즘이 오히려 효율성을 떨어 뜨릴 뿐만 아니라, Civic virtue(혹은 civic spirit)을 퇴보하게 만들고, 도덕성을 떨어뜨림으로써 소기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영국과 미국의 헌혈제도를 비교하면서 헌혈을 100% 자원으로 받는 영국의 현혈 비율이나 헌혈된 혈액의 질이 돈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미국에 비해 훨씬 높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되는 곳보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 더 많은 헌혈이 되고 있으며, 더 건강한 사람들이 헌혈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예들을 통해서 시장 메커니즘이 모든 경우에 만능이라는 생각은 허구에 불과함을 일깨운다.
더 나아가 시장 메커니즘에 맞지 않는 공공의 영역에 그 시스템을 적용시켰을 때,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잘못을 깨닫고 다시 시장 메커니즘을 제거하려고 할 때, 원상태로 복구가 매우 힘든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시장 만능주의가 얼마나 큰 폐해를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적용을 얼마나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가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참여와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Such deliberations touch, unavoidably, on competing conceptions of the good life. This is terrain on which we sometimes fear to tread. For fear of disagreement, we hesitate to bring our moral and spiritual convictions into the public square. But shrinking from these questions does not leave then undecided. It simply means that markets will decide them for us. This is the lesson of the last three decades. The era of market triumphalism has coincided with a time when public discourse has been largely empty of moral and spiritual substance. Our only hope of keeping markets in their place is to deliberate openly and publicly about the meaning of the goods and social practices we prize.
Sandel의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는 가치, 도덕을 다루면서 왜 그것이 도덕적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글 전체적으로 그의 입장은 utilitarian의 입장이다. 최고의 효용성이 가장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그런 입장을 취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그도 결국은 moral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논조가 효용성으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morality가 civic virtue의 중요한 기틀이 된다면, 그 부분을 더 깊이 다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공격하고 있는 시장 메커니즘과 postmodernism의 논리가 어떻게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데 서로 promotion하는지, 그리고 postmodernism이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moraliity를 상대화 할뿐만 아니라 그 상대화 작업을 통해서 무력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틈을 시장 메커니즘이 파고 들게 되었는지를 살폈어야 더 설득력있고,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이 되었을 것이다.
또 아쉬운 것은 이 책의 주요 논점의 대상은 아니지만,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될 만한 곳이라고 하는 그런 영역에서 진정으로 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공공영역에서 보는 그런 폐해가 그곳에서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 블로그의 어딘가에서 자세하게 썼던 것처럼, 과도한 임금과 소득격차가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고, 앞으로 그 차이가 더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이 때에, 과연 시장 메커니즘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해 큰 회의가 들 때가 많이 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그가 한 가지 중요한 factor를 애써 무시함으로써 논의를 복잡하게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가 왜 하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애써 외면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 요인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글의 설득력이 많이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상대주의의 입장에서의 공격에 대항할 수 없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이마에 회사 광고를 문신으로 새겨넣는 행위를 비판하는 근거는 그 몸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근거로 비판할 때 가장 강력한 논리가 설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근거를 회피한 채, 다른 논리를 대려 하지만, 논리성이 매우 떨어지는, 그래서 저자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천동설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복잡한 이론들을 개발해야 했던 것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단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처럼, 분명하고 명백한 근거를 애써 외면한 결과 이 글은 쓸데없이 여러 말로 설명해야하는, 그것도 설득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논리를 개발해야 했던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 분명히 많이 있는 글이지만, Sandel의 주장은 우리 모두가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는 중요한 점이라 생각하며 모든 사람들이 꼭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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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58:00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
"But I discipline my body and keep it under control, les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should be disqualified." (고전 9:27)
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던 자로서 가장 두려운 말씀은 바로 이 말씀이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이 자신의 삶이요 신앙의 현주소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자신의 평가에 대해 심한 거품이 있음에도 남도 속이고 스스로도 속는 매우 어리석은 짓을 범하기가 쉬운 것이다. 나 또한 거기에서 절대 예외가 아니다. 내 삶이 얼마나 내 생각, 사상,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른다. 내 위치가 만든 포장에 내가 속는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벌거벗겨진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창피할 것인가?
바울은 그점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그 자신의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은 구원으로,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그로 하여금 그 스스로를 끊임 없이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삶을 추스리게 한 것이다. 바로 그런 점이 그를 진정으로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지만, 내 개인을 평가하실 때는, 내 말보다, 내 가르침보다, 내 삶과 행동을 보신다. 그것이 바로 내 믿음의 현주소인 것이다. 내 행동이, 내 삶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라면, 나는 언제든지 내쳐질 것이라는 두려움 가운데서, 은총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내 스스로를 control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내 삶이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내게 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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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던 자로서 가장 두려운 말씀은 바로 이 말씀이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이 자신의 삶이요 신앙의 현주소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자신의 평가에 대해 심한 거품이 있음에도 남도 속이고 스스로도 속는 매우 어리석은 짓을 범하기가 쉬운 것이다. 나 또한 거기에서 절대 예외가 아니다. 내 삶이 얼마나 내 생각, 사상,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른다. 내 위치가 만든 포장에 내가 속는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벌거벗겨진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창피할 것인가?
바울은 그점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그 자신의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은 구원으로,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그로 하여금 그 스스로를 끊임 없이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삶을 추스리게 한 것이다. 바로 그런 점이 그를 진정으로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지만, 내 개인을 평가하실 때는, 내 말보다, 내 가르침보다, 내 삶과 행동을 보신다. 그것이 바로 내 믿음의 현주소인 것이다. 내 행동이, 내 삶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라면, 나는 언제든지 내쳐질 것이라는 두려움 가운데서, 은총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내 스스로를 control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내 삶이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내게 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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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57:00
주일 말씀
지난 얼마의 기간 동안 나에게 개인 묵상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나를 준비시키신 뒤 주일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인증하셨다.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diligently seek me will find me. (잠 8:18)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주일설교 말씀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 속속들이 너무 잘 알고 계시는 것이 피부에 느껴지며, 참 두려워질 때가 있다. 지난 주일,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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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diligently seek me will find me. (잠 8:18)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주일설교 말씀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 속속들이 너무 잘 알고 계시는 것이 피부에 느껴지며, 참 두려워질 때가 있다. 지난 주일,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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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4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