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준비

경영학의 리더십 이론 중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주제는 Charismatic Leadership이었다. Charismatic Leadership이란 한 조직 내에서 리더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가 기반이 된 리더십으로서 그 리더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으며, 그 리더가 제시하는 비전과 각 구성원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그 조직의 원동력이 되는 리더십을 말한다. 이런 리더십이 있는 조직의 구성원들은 비록 자신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고, 때로는 자기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좇아 조직에 헌신하게 되고, 그런 리더와 구성원이 있는 조직은 막강한 단결력과 조직력으로 매우 어려운 일도 이루어 내는 강력한 조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 리더가 사라지거나, 리더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경우에는 쉽게 무너지게되는 약점이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Charismatic Leadership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이론에 비추어 봤을 때, 신앙공동체에서 리더는 Charismatic Leader가 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 리더십은 오로지 예수님만이 가지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공동체는 건강해지며,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세우신 모든 리더들은 Servant Leader이어야 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의 종으로, 공동체의 종으로 낮은 자세로 섬기며,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부각되도록 하고,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그런 종이어야 한다.

내가 속한 교회 청년부를 3년 정도 섬겨 오면서 나는 어떤 리더였는지를 되돌아 본다. 지난 기간 동안 나는 섬기는 리더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먼저 무릎꿇는 Servant Leader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다. 내 생각을 내려 놓고, 내 주인께서 보여주시는 길이라면 어떤 희생을 감내하고라도 순종함으로 그 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내 개인적인 욕심과 나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을 최대한 거부하며, 겸손한 자세로 나를 낮추려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다. 말씀에 민감한 자가 되기를 원했고, 내 입술을 통해서 내 생각과 의견이 표출되는 것을 막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달되도록 기도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 섬기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런 사랑을 허락하셨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지난 3년을 되돌아 볼 때 성공 여부를 떠나 적어도 그 진지성과 치열함에 있어서는 후회가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섬기는 공동체에서 내가 어떤 리더가 되어 있는가? 나는 내가 종이 되기를 바랬고, 청년부의 진정한 리더가 예수님임을 고백했고, 그렇게 살았는데... 그분이 청년부 공동체 모든 지체들이 그분만이 진정한 리더이고, 그분께만 의지하며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었을까?
만약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청년부에서 사라진다면, 청년부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저 종으로 섬겼던 한 사람에 불과한 나였다면, 그 종 하나 사라진다고 공동체에 큰 타격이 있을 수 있을까? 청년부에 왔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그들 중에는 목자도 있고, 여러 모양으로 귀중하게 섬겼던 지체도 있고, 그렇지 않고 잠깐 왔다 떠난 지체들도 있다. 그 어떤 지체든지 간에 그들이 왔다 떠나갔다고 해서 공동체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진정으로 주님이 리더이고, 그분이 우리 공동체의 존재 기반이라면, 내가 사라진다고 해서 특별히 타격을 받을 것이 없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그리고 나만의 생각이기를 바라지만--현재로서는 내가 사라진 청년부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 내 청년부 안팎의 많은 분들이 그 점을 염려하는 것이 그것을 반증해 준다. 그것은 내가 어느새 청년부에서 Charismatic Leadership을 가진 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내가 청년부 내에서 Charismatic Leader가 되어버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많이 있지만 그중에 두드러진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최근 교회 내에서 나에 대한 신앙적 평가들이다. 그 평가들의 대부분은 마치 내가 신앙적으로 뭔가 역량이 있거나 뭔가 하나님 앞에서 대단하게 쓰임을 받는, 다시 말해 신앙적으로 매우 성숙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향하기보다는 내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내 잘못이다. 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의 시선을 나에게로 이끌어 왔던 것을 본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했지만, 내 자신을 드러낼 기회가 있을 때 서슴없이 나섰던 것을 본다. 진심으로 말하건데 그럴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아내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지적하면서 자중할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섬김"과 "순종"이라는 명목으로 내 스스로를 높아지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내가 결국 Charismatic Leader의 자리로 나아가 버렸다. 그것은 죄악이다.

내가 청년부에서 Charismatic Leader가 되어버렸다고 판단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청년부 지체들의 부장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상담, 지혜, 지식, 가르침--를 최대한 활용하여 청년부 지체들 한 명 한 명을 만나서 돕는 일을 열심히 했었다. 물론 모든 지체들을 다 섬길 수는 없었지만, 리더들과 또 도움이 필요한 지체들에게는 전심을 다해 그들을 돕고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일을 감당했었다. 그것을 통해 지체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늘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지체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기도함으로 나아가고, 그분으로부터 진정한 지혜와 힘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나의 평가이다. 그들을 돕는다는 좋은 의도가 그들의 영적 자립심을 충분하게 길러 주지 못하고, 나에게 의존하게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모든 지체들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부장으로 섬기는 동안 나에게 의존 정도가 심화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내가 속한 교회의 목사님의 사역방식을 다시 평가하게 된다. 우리 목사님은 성도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그들의 깊은 사정을 듣고 문제를 듣고 그것을 상담해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어떻게 보면 방치하는 것처럼 보일만큼 그냥 두시는 스타일이다. 나는 그것이 그분의 무관심과 사랑없음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분의 목회 철학이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성도들이 어떤 문제로 힘들어 할 때, 진정한 해결자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직접 들고 나아가 그분과 해결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분 의존적인 신앙(영적인 리더 의존적인 신앙이 아니라)으로 자라가라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 또한 그분의 그런 철학 덕분에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나고 그분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자라왔다.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내 섬김의 오류를 보게 된다. 사실 한 영혼을 붙들고 깊이 이야기를 나누며 아픔을 들어주고, 분석해주고, 말씀을 적용시켜주고, 거기서 다시 일어서서 나아가도록 돕는 그 섬김을 하는 것이, 그렇지 않고 그냥 지켜 보며 기도해주는 것보다 나에게는 훨씬 쉽다. 내 본성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잘하는 대로 섬기는 과정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Charismatic Leader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지금 분명히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이 영혼들을 위한 진정한 섬김이 아닐 수 있다는 자각이 이제야 들기 시작한다.

청년부의 미래를 생각할 때, 물론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믿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지만, 마치 가룟유다의 죄악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쓰임받았던 것과 같이, 내가 하나님께 누를 끼침으로써 쓰임받는 존재는 되고 싶지 않다. 내가 떠난 그 자리에 큰 구멍을 내는 그런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다.
내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오기 전에 있던 컨설팅 회사에서 나는 한 컨설팅 파트 책임자였다. 그 회사에서는 최첨단의 컨설팅 기법을 미국, 호주, 영국으로부터 도입했고, 그 지식과 기술을 나로 하여금 모두 흡수하도록 많은 투자를 했었다. 나는 그 사업분야를 맡았었고, 그 사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유학을 결정했다. 그리고 내가 그 회사를 떠나 미국으로 올 때까지 내 자리를 감당할 후임자를 찾지 못했다. 몇 명의 컨설턴트들이 팀을 이루어 나로부터 지식을 전수 받고 그 일을 감당하기로 했었으나, 실패했다. 결국 그 사업은 유명무실해졌고, 내가 있던 자리는 너무나 큰 구멍이 나버렸다. 물론 유학을 결정하기 전에 회사 사장님과 미리 논의를 했고, 허락을 받고 진행한 것지만, 그 일로 인해 나는 회사에 큰 누를 끼친 셈이 되어버렸다.

내가 청년부와 이별할 날이 언제인지는 잘 모른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섬기게 될지, 아니면 단 몇 일을 더 섬길 수 있을지...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고, 작게 본다면 나의 영적인 리더이신 담임목사님의 소관이다. 하지만 그 때가 언제이든 나는 이별을 준비해야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 준비란 청년부 공동체가 내가 없이도 (아니, 내가 없어야)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가는 공동체가 되도록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공동체이고, 사랑하는 지체들이다. 내가 그들과 작별하는 그 순간... 그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선 공동체로서, 나 한 사람 빠지더라도 끄떡 없는, 아니 오히려 더 잘되는 공동체가 되어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실 이 작업은 얼마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 청년부장과 인간 이광진이 하나로 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 둘을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분리시켜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청년부장만 남고 인간 이광진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는 (그래서 어떤 분이 와서 그 자리를 채우든 상관 없는) 그런 준비를 해 가는 것이 바로 내가 그들과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진정한 Charismatic Leader로 인정받아야 할 분인 예수님, 그 분께 우리 공동체의 리더십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내가 나도 모르게 저질렀던 죄를 회개하는 일이다. 돌이키는 일이고,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더 내려놓는 것, 더 겸손해지는 것, 내 자신을 더 철저하게 부인하는 작업이다. 진정한 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작업이다.

그것은 단기간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조금씩 진행되어 가야 할 과제이다.
그것은 나에게 아픔과 고통과 인내의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내가 져야할 십자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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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script:
내 신앙에 대한 교회의 평가에 대한 솔직한 내 의견을 잠깐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너무나 과도한 평가이다. 그 평가는 진정한 나의 모습과 상관 없는 거품이 대부분이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그 이유 하나는 단순히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그 안의 실재는 항상 차이가 난다. 문제는 그 차이가 너무 과도할 때는 그것이 본인에게도, 그리고 공동체에게도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떠난 자리에 후임자를 찾을 때, 교회 내에 다른 집사들(대부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섬기는 일꾼들인데)이 과대평가된 나로 인해서 청년부를 섬기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그 자리--너무나 은혜로운 자리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기 때문에 그냥 자리만 지키면 되는 그 자리임에도--에 섬기는 자로 나서는 것을 거부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거품으로 과대포장된 내 자신의 평가에 대해서 내 자신도 부담스러운데, 다른 분들은 얼마나 더 부담스럽겠는가? 만약 아무도 섬기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다면, 청년부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아침 묵상

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 (렘 10:21)

하나님께서는 나를 목자로 부르셨다. 나를 목자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다의 심판과 파멸의 가장 큰 원인은 목자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찾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았다는 말이 아니다. 유다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제사를 분명히 드렸다.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만 의지한 것이 아니었고, 또한 그 모든 섬김에 있어서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것이었다. 정작 그들의 마음은 우상을 향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여호와를 찾지 않은 자들이었다.
영적인 리더로 세우심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작게는 가정과 청년부, 크게는 교회와 이 사회와 민족의 영적인 리더로 세우심을 받은 자로서,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내 모든 양떼는 흩어질 수밖에 없다. 형통할 수가 없다. 내가 이것을 잊는다면, 그 저주는 바로 나와 내 공동체의 저주가 된다. 하나님께서 오늘 준엄하게 경고하신다.
반면 내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는 형통할 것이며, 양떼가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상황적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공동체는 얼마나 복된 공동체인가?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마음의 중심으로 무릎을 꿇는다면, 그리고 그분만 의지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마음에 합한 섬김을 한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

오늘 말씀은 무서운 말씀이지만, 위로의 말씀이기도 하다. 매일 새벽에 하나님 앞에 꿇는 무릎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지켜보고 계시고, 그 꿇는 무릎으로 인해 내 공동체를 형통케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의 주님... 오로지 감사와 찬양 외에는 드릴 것이 없다.

보물 11



아빠, 거기가...
(2005.06.25에 쓴 글)

아침에 둘째 예연이를 깨웠다.

침대에 누워서 세상모르게 곤히 자고 있는 어린 것을 깨우는 것이 항상 미안하고 안쓰럽긴 하지만, 이번달 한 달 동안 한글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아침 일찍 깨워야 한다.

"공주님~~~ 일어나세요~~~"

"... ..."

한 참을 깨우자 눈을 부시시 뜬다.

귀여운 모습...

"일어나야지?"

예연이가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조금 있다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빠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빠!"

"왜?"

(작은 손가락으로 내 볼을 가리키며) "아빠 거기가 뚱뚱해요..."

"......."

살을 뺄 때가 되었나보다...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Fathers, do not exasperate your children, so that they will not lose heart.(NASB)


내가 평생동안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 가졌던 가장 서운한 것이 있다면, 어렸을 때의 한 사건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어느날 오후에 학교에서 집에 돌아 왔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집에 들어서는데, 바닥에 아버지의 수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봤다. 평소에 아버지께서 수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내 책상 서랍에 잘 보관해 두었다. 저녁에 아버지께서 오시면 가져다 드리고 자초지종을 설명드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친구분들과 한 잔을 하셨는지 그날 따라서 아버지는 늦게 오셨다.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몸이 아파왔다. 깨어보니 아버지께서 나를 무작정 때리고 계시는 것이었다. 자다가 얼떨결에 얻어 맞았는데, 나중에 왜 때리시는지를 여쭤보자, 내가 아버지의 수첩을 내 서랍에 숨겼다고 오해하시고, 화가 나서 때리시는 것이었다. 내 평생 동안 부모님께 거의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일생을 다해 얻어 맞았던 것 보다 더 많이 맞았다. 어머니께서는 옆에서 아버지를 말리고 계셨지만, 아버지는 단단히 화가 나셨던 모양이다. 그 수첩에는 그날 아버지의 사업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었는데, 수첩이 없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 것 같았다.
일단 늘씬 얻어 맏고, 아버지의 화가 좀 풀리셨을 즈음에,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화를 그치지 않으셨다. 하지만 더 이상 때리지는 않으셨다. 내 기억으로는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볼을 비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의 까칠한 수염의 감촉이 아직 내 볼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하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사과하지 않으셨다. 미안해 하신 것은 이해하지만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것으로 인해 분노했고,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부당하게 당했다는 그 마음 때문에... 그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미안하다는 말씀 한 마디만 하셨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아버지에 대해서 다른 서운한 것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의 그 분노는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다. 이제는 그것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아버지가 된 지금... 나는 아이들을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대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 '뭘 안다고...'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버리기가 참 쉽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아이들도 지각이 있고 생각이 있다. 부모가 부당한 행동을 하고도 자신에게 충분히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들은 내면에 분노를 쌓게 된다. 성경에서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은 아이들을 충분한 인격체로서 인정하고, 그 아이들을 부당하게 대우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항상 이 말씀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비록 완전히 자란 성인은 아니지만, 인격체이며,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아무리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나 있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의 인격을 손상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들을 훈육하는 과정에서 그들 인격의 핵심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철칙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이유로든지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을 때는 반드시 형식을 갖추어 진지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도 내가 지키고자 하는 원칙 중이 하나이다.


언젠가 하연이를 심하게 야단친 적이 있었다(무슨 일인지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소에는 내가 야단을 칠 때 하연이가 잘 순종하며 순순히 받아 들이는데, 그 때는 유난히도 반발이 심했다. 그로 인해서 내 언성이 높아져 갔고, 나는 매우 권위주의적인 자세로 복종을 요구했다. 하연이는 매우 억울해 하면서 내 힘에 못이겨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잠시 후에 내가 잘못 알았음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연이가 매우 억울해 할 수 있고, 또 그 안에 분노가 자리잡았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연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빠가 뭘 잘못했는지, 왜 그렇게 잘못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고 진지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빠의 그 행동을 결코 좋게 보지 않으시고 책망하신다는 것을 하연이에게 알렸다. 착한 하연이는 아빠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을 보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러면서 아빠를 용서해 주었다. 우리를 포옹을 했고,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했다.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때로는 체면이 구겨지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하연이에게 내 잘못을 고백하고, 진지하게 사과를 할 때, 아빠로서의 권위는 더 굳건해진다고 믿는다. 아빠로서의 내 권위는 내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 위에 서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내가 진리 위에 서 있지 못할 때는 그 잘못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권위를 더 세우는 일이다.


또한 아이들이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 받았다는 느낌 가운데 그 상처를 가지고 오랫동안 고통하는 것은 부모인 나로서도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내 자존심을 꺾고 내 아이에게 내 잘못을 충분히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그 아이들 영혼이 건강해 질 수 있다면, 내 자존심 따위는 내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못할 것이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내가 아버지이지만, 그래서 가장의 권위가 내게 있지만, 아빠인 내가 순종하고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어른인 내가 어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도, 나로 하여금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도, 그리고 아빠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도 모두 아빠의 권위보다 훨씬 높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 아빠도 순종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 자신의 부당한 대우를 바로 잡아주는 그 공의로운 말씀이라는 인상이 아이들에게 깊게 심어질 때, 나중에 아이들이 그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다를 것이라는 것. 그것이 내가 가진 생각이다.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이다. 그 말씀에 내가 순종할 때, 나와 내 가족이 살게 된다.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8

8. 아침에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게 됨에 따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복주실 것을 기도로 간구하는 일에 관심이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도록 자비를 구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시도록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은 때가 언제인가? 그러니 기도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아침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매일 같이 번제를 드려야 하는 것에 대해 읽어 볼 수 있다(스 3:4).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님께서 자비롭게 섭리해 주실 것과 성령님께서 은혜롭게 역사해 주실 것을 기도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돌보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으며 그들이 잘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매일 아침 기도로서 그들을 하나님께 부탁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와 지휘 아래 두어 효과적으로 주님의 보호하심과 관심 속에 이끌 수 있도록 하자. 경건한 욥은 그의 아이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우리도 그들의 명 수 대로 기도와 간구를 드림으로 그와 같이 해야 한다(욥 1:5). 그리하여 주님의 축복이 우리 가정 위에 머물도록 해야 하겠다.
우리의 생업을 위하여 나가려 할 때,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일들을 잘 관리해 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 일들을 행하고, 믿음으로 우리가 그 일에 번영하고 성공할 것과 주님께서 그 일에 필요한 힘을 공급하시며 피곤할 때 붙들어 주시고 그 일들을 계획할 때에 인도해 주시며 위로가 되는 결과를 허락하시도록 기도하자. 여행을 하려 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바라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가 주실 것을 기도드릴 수 없는 곳이라면 가지 말자.
일이 잘되어 갈 좋은 기회가 보이면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 손에 달려 있는 모든 것들 즉 기술과 의지와 용기에 열심을 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하자. 또한 매일같이 유혹이 뒤따른다. 어떤 것들은 우리가 미리 예견했던 것이 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유혹에도 끌려가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어떤 일터에 들어가더라도 선을 행하고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지혜를 얻고, 좋은 일을 당하고 해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기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을 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에게 어떤 하루가 다가올지 무슨 소식을 듣게 될지, 밤이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전혀 생각해 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미리 볼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미리 볼 수 없는 우리의 의무와 어려움도 은혜 속에서 지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서기 위하여 날이면 날마다 주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그 날의 걱정은 그 날로 충분하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오늘로서 충분한 오늘의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란 모든 선한 말과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우리에게 채워 주시며, 모든 악한 말과 악한 일에 대항하여 우리를 온전히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공급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밤에 또 다시는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루종일 생각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8. In the morning we are addressing ourselves to the work of the day, and therefore are concerned by prayer to seek unto God for his presence and blessing. We come, and are encouraged to come boldly to the throne of grace, not only for mercy to pardon what has been amiss, but for grace to help in every time of need: and what time is it that is not a time of need with us? And therefore, what morning should pass without morning-prayer? We read of that which the duty of every day requires, (Ezr.iii. 4.) and in reference to that we must go to God every morning to pray for the gracious disposal of his providence concerning us, and the gracious operations of his Spirit upon us.
We have families to look after, it may be, and to provide for, and are in care to do well for them; let us then every morning by prayer commit them to God, put them under the conduct and government of his grace, and then we effectually put them under the care and protection of his providence. Holy Job rose up early in the morning to offer burnt-offerings for his children, and we should do so to offer up prayers and supplications for them, according to the number of them all (Job i. 5). Thus we cause the blessing to rest on our houses.
We are going about the business of our callings perhaps, let us look up to God in the first place for wisdom and grace to manage them well, in the fear of God, and to abide with him in them; and then we may in faith beg of him to prosper and succeed us in them, to strengthen us for the services of them, to support us under the fatigues of them, to direct the designs of them, and to give us comfort in the gains of them. We have journies to go, it may be, let us look up to God for his presence with us, and go no whither, where we cannot in faith beg of God to go with us.
We have a prospect perhaps of opportunities of doing or getting good, let us look up to God for a heart to every price in our hands, for skill, and will, and courage to improve it, that it may not be a price in the hand of a fool. Every day has its temptations too, some perhaps we foresee, but there may be many more that we think not of, and are therefore concerned to be earnest with God, that we may not be led into any temptation, but guarded against every one; that whatever company we come into, we may have wisdom to do good, and no hurt to them; and to get good, and no hurt by them.
We know not what a day may bring forth; little think in the morning what tidings we may hear, and what events may befall us before night, and should therefore beg of God, grace to carry us through the duties and difficulties which we do not foresee, as well as those which we do; that in order to our standing complete in all the will of God, as the day is, so the strength may be. We shall find that sufficient unto the day is the evil thereof, and that, therefore, as it is folly to take thought for to-morrow's event, so it is wisdom to take thought for to-day's duty, that sufficient unto this day, and the duty of it, may be the supplies of the divine grace, thoroughly to furnish us for every good word and work, and thoroughly to fortify us against every evil word and work; that we may not think, or speak, or do any thing in all the day, which we may have cause upon any account to wish unthought, unspoken, and undone at night.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7

7. 아침에는 밤사이에 우리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헛되고 죄된 많은 생각들을 반성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두려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용서받기 위하여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드릴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기도드리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선적으로 아침에 드리도록 고안된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분주하게 하루를 지내면서 일관성이 없는 말과 행실로서 죄를 짓게 되며, 부패된 생각과 절제되지 못한 환상 속을 방황하며, 밤의 적막 속에서 죄를 짓게 된다. 미련한 자의 생각이 죄가 된다는 것(잠 24:9)은 분명하다. 미련한 생각은 곧 죄된 생각이며 모든 죄의 시작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너무나 많은 헛된 생각들이 숨어 있다. 그 수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군대라 한다. 누가 이러한 잘못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우리 머리의 머리카락 수보다도 더 많다.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그 날이 밝으면 ...... 그것을 행하는 자”(미 2:1)에 대하여 읽어 보았다. 밤이 되면 수없이 의심하고 염려하는 생각들로 마음이 불안해지고 미혹케 되며, 부정하고 음란한 생각들로 오염되고, 솟구치는 교만한 생각들로 인해 도취되며, 경건한 생각들은 수없이 많은 무례한 것들에 의해 침해당한다. 우리와 함께 눕고 함께 일어나는 악한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에 서부터 나오며,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따라 다니는 이 부패된 샘에서부터 이런 샘물이 자연적으로 흘러나온다(전 5:2). 많은 말에 뿐만 아니라 많은 꿈속에도 허다한 허영이 담겨 있다.
매일 밤낮으로 회개할 일을 저지르는 우리가 그것을 새롭게 하기 전에 감히 나갈 수가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방황하며, 반항과 고집으로 불평하며 타락하기 쉽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께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며, 우리 마음의 생각들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에 힘쓰지 않겠는가? 자백하여 용서받지 않은 죄를 않고서는 하루의 일과를 안전하게 시작할 수가 없다.
 
7. In the morning it is to be feared, we find cause to reflect upon many vain and sinful thoughts that have been in our minds in the night season; and upon that account it is necessary that we address ourselves to God by prayer in the morning, for the pardon of them. The Lord's prayer seems to be calculated primarily in the letter of it for the morning: for we are taught to pray for our daily bread this day: and yet we are then to pray, Father, forgive us our trespasses: for as in the hurry of the day we contract guilt by our irregular words and actions, so we do in the solitude of the night by our corrupt imaginations, and the wanderings of an unsanctified ungoverned fancy. It is certain, The thought of foolishness is sin (Pro. xxiv. 9). Foolish thoughts are sinful thoughts; the first-born of the old man, the first beginning of all sin; and how many of these vain thoughts lodge within us wherever we lodge? their name is Legion, for they are many: who can understand their errors? They are more than the hairs of our head. We read of those who work evil upon their beds, because there they devise it; and when the morning is light they practise it (Mic. ii. 1). How often in the night-season is the mind disquieted and distracted with distrustful careful thoughts; polluted with unchaste and wanton thoughts; intoxicated with proud aspiring thoughts; soured and leavened with malicious revengeful thoughts; or, at the best, diverted from devout and pious thoughts by a thousand impertinences: out of the heart proceed evil thoughts which lie down with us, and rise up with us, for out of that corrupt fountain, which, wherever we go, we carry about with us, the streams naturally flow. Yes, and in the multitude of dreams, as well as in many words, there are also divers vanities (Ecc. v. 2).
And dare we go abroad till we have renewed our repentance, which we are every night as well as every day thus making work for? Are we not concerned to confess to him who knows our hearts, their wanderings from him, to complain of them to him as revolting and rebellious hearts, and bent to backslide; to make our peace with the blood of Christ, and to pray, that the thought of our heart may be forgiven us? we cannot with safety go into the business of the day under the guilt of any sin unrepented of or unpardo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