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1

(2007년 1월 9일)

오늘 오전... 애들 겨울 방학의 마지막 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 때 하연이가 짧은 리본 줄을 가지고 와서 요청했다.

"아빠, 이걸로 리본 묶어 주세요."

리본의 길이가 좀 짧기도 했지만 예쁘게 리본을 묶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아빠는 리본 묶을 줄 모르는데..."

그 때 옆에 있던 예연이가 말했다.

"아빠는 집사님인데 리본도 못 묶어요?"

"???"

내 삶의 소중한 보물들...

내 삶의 소중한 보물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자랑할 만한 업적이나, 돈이나, 명예나, 능력이 아니다. 그것들은 한 순간 있다 사라질 것들이다.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들은 남들이 보기에 하찮은 것들이다. 내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과의 추억. 내가 싸이에 올린 아이들과의 소중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을 다시 읽으면서, 그 순간들이 내 마음 속에 너무나 소중한 보물들임을 다시 깨닫는다. 시간은 갔지만, 그 기억과 기록은 남아 있고, 그것은 내 평생 동안 간직될 것이다.

나만의 비밀스러운 보물들을 보면서, 오늘을 사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 보물들은 항상 내 삶 가운데 있어 왔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지 깨닫지 못했었다. 그냥 재미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로 여겼었다. 그 소중한 보물을 하나님으로부터 그 때 받았고, 그것을 누리는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당시에는 그것에 감사하지 못했고, 오히려 내가 이루지 못한 것,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만스러워하고,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 때문에 짜증을 내고,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해 하는 삶을 살았다.

오늘을 사는 내 모습도 동일하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내 삶에 너무나 감사할 만한 보물들을 심어 주시고, 또 그것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 보물을 가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께 충분히 감사하며 기뻐하기보다는 불만과 짜증과 불안에 나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의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신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야 할 만큼 나라는 인간은 오늘 바로 이 시간에 결코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을 하시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 내 아이들과 나누었던 가슴의 보물들을 하나씩 되새기며 나누고자 한다. 그것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지만, 결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서,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그 결과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바로 "오늘" 살게 되기를 바란다.

믿음이란...

(믿음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썼던 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을 미치도록 사랑한 나머지 다른 어느 누구도 전혀 눈에 들어 오지 않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내 안을 가득 채워서, 세상의 것들이 내 마음 한 곳으로 비집고 들어 올 수 없을 만큼, 그리스도에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이 사랑스러워질 여지가 없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그 분께 너무나 매료되어서, 다른 어떤 것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그 분께 "홀라당" 넘어 갔기 때문에 세상 아무리 좋고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거기로 끌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영광을 모두 준다고 하더라도, 돌들이 떡덩이로 보일 만큼 배고픈 상태에서도 사탄의 유혹에 결코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 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위대한 왕,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분, 그리고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오실 그분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으로 인해서 다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상이 그 아무리 두렵고, 나를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 분과 하루하루 동행하는 가운데, 설사 그 분이 천길 낭떠러지 끝으로 나를 인도해 가신다 하더라도,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고, 그 길을 가는 것이다. 내 눈과 내 생각과 내 판단과 세상의 평가보다 그분의 말씀을 더 신뢰하고, 그 말씀이 인도하시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기쁨인 삶이다.
기 쁨의 유일한 필요충분조건이 바로 그분이 나와 함께하심인 상태이다. 시편기자의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달고,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라도 단 하루를 사는 것을 이 세상 가운데 황제가 되어 영원히 거하는 것보다 더 사모하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로 나아오는 것이 하루 일상 중 그 어느 것보다 귀하고 가슴설레는 것이다. 상황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당신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세상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물학적 반응도 결여된 죽음의 상태를 말하며, 그분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어서 십자가의 길을 기쁨과 감사로 가는 것이다.
그 길 끝에 천국이 있다.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지 꼭 18년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가장 어려운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현실과 상황은 어떤 관계일까? 내가 믿음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있고, 믿음의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내 안에서 절대 떠나지 않는 두려운 질문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믿음의 예들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하나님께서 거대한 방주를 산 꼭대기에 만들라고 명령하셨을 때, 노아는 믿음으로 순종했다.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이 생명의 보호막, 안전막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 때에, 아브람은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애를 낳을 수 없는 불가능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어야 했고, 귀하게 얻은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는 그대로 순종했다.
이삭은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생존과 직결되는 우물을 세 번이나 양보하면서(빼앗기면서)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를 생존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기드온은 300명으로 수십만명의 군사들을 대적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나아갔고,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를 믿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는 사울을 제거할 만한 결정적인 상황이 두 번이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를 살려 두었다. 그에게는 그 상황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를 살해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마음에 그 믿음을 두었다.
믿음 가운데 호세아는 한 개인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놓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창녀와 결혼을 하고 음란한 자식들을 낳고 가정파탄을 경험한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결코 그런 명령을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성적인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의 믿음에 의한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두신 그 마음을 dramatic하게 온 세상에 알리는 데 쓰임을 받았다.
왕앞에 나아가는 것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에스더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죽음을 무릎쓰고 왕 앞으로 나아가기를 감행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동포들에게 침략자인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그곳으로 포로로 잡혀가라고 눈물을 흘리며 선포하였던 예레미야에게는 조국이 닥친 "상황"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었고, 그 상황 가운데 순리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믿음"으로 끝까지 항거하였던 유다의 애국주의자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었고, 그 믿음은 결국 믿음이 아니었다.
믿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적으로 볼 때 저주의 길, 멸망의 길을 갔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고, 바울은 로마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야고보는 첫번 째 순교자가 되었으며, 요한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제자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의 결과이며, 그들의 삶이 믿음의 삶이었다.

나는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상황"이라는 것이 참으로 그 믿음의 삶을 견지하기 힘들게 만든다.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에게 공유되는 maxim이 "Context is king."인데, 이 세상을 살다보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Situation is king."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하는 나에게 가장 거세게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진리임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볼 때, 내 답은 분명해진다. No! 상황은 하나의 factor일 뿐 결코 절대적인 것도, 그리고 중요한 요소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을 볼 때, 상황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조차 고지식하고 교만한 믿음을 가진 자, 상황을 무시하는, 비현실적이고, 비뚤어진 개인의 신념에 불과한 믿음으로 매도 당하는 경우가 너무 자주 있다. 끊임없는 비판과 내 주위의 현실을 보면서 나는 심각하게 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진정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바른 믿음을 가진 자인가? 내가 유대 애국주의자들처럼 상황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 상황 가운데 굴복하며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가 세운 믿음의 원칙을 고수하며 고집부리고 있는, 사실 불순종하는 자가 아닌가?"

그 답은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다. 한없이 연약한 나.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가운데서 긿을 잃고 표류하는 작은 뗏목과 같이...

그런 상황에서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그 답을 찾을 능력이 없다. 그저 표류하는 가운데 주님께 구할 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세상에 대해 담대하고 맞서는 것일 뿐... 혹시 내가 지금 무지하고 연약하여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내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내 손을 붙잡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겠지... 만약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지만,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면, 내 가는 길에 더 힘을 주시고, 나를 그 길로 더욱 인도해 주시겠지...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것조차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분을 향한 순도 100%의 사랑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머지는 그분께 맡겨도 된다. 폭풍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고, 평안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 119:92)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

신명기 28장

신명기 28장은 참으로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다.
1절부터 14절까지의 짧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가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경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15절부터 68절까지의 긴 구절들을 통해서는 그 반대의 경우,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 가서, 그 풍요함과 선진문명 가운데서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방의 신을 섬길 경우에 그들이 받게 될 저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너무나 큰 유혹을 받을 것이고, 정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꼭 붙어있지 않으면 그들이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그 경고의 강도가 예언된 저주의 강도와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하나님의 저주의 예언을 하나하나 생각할 때 몸서리치지 않을 만큼 두려운 말씀을 받았다. "만약 나라면" 절대로 하나님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만큼 그렇게 두려운 말씀을 받았다.

그런데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오래참으시고 돌이키시려고 하시는 그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모든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저주가 두렵지 않았나?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7-10)

사사기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의 타락의 원인은 "망각/무지"였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경험한 자들은 비록 불순종을 하고 불평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결코 전적으로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 그분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버린 이 세대는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경험하지 못한 세대였다. 그들은 무지와 망각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살았으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모든 것을 행하는 불쌍한 민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세대적 경험은 바로 내 개인의 경험을 대리하는 경험이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이 그랬다면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것.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현재 속한 어스틴한인침례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며, 그 앞에 겸손히 서 있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아래 겸손하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있는 교회의 공동체, 특히 청년부 공동체 안에 있으면, 그분은 내 눈 앞에서 실재로 살아계시는 분이며 나의 왕이시라는 것이 그 어느 다른 곳에 있을 때 못지 않게 쉽게 경험이 된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떠나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가 이 공동체에서처럼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나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은, 그분의 임재와 역사가 관념화되고, 신앙이 화석화되어가는 것이다. 말씀을 보지만, 그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가 많고, 다른 많은 교회 내의 지체들의 신앙의 모습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 스스로를 "그런대로 쓸만한" 믿음을 가진 자로 평가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이다. 그 때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향해 달려갔던 그 때인 것이다.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한다.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는 dynamic함을 잃어버릴 때, 다시말해 "살아계신" 하나님, 현재 내 삶의 자리에 역사하신 하나님과의 지속되는 인격적인 관계의 역동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고, 그 앞에 무릎꿇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생활을 지속해 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과거 선조들에게 준, 그래서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나에게 주시는 엄위하신 주권자의 경고가 되지 않는다면, 내 삶에 우상숭배는 언재든지 가능하며, 사실, 이미 시작되었을 수 있다.

나는 오늘 진정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 앞에 무릎꿇고 있는가? 그분께 매달리며, 나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청하며, 나와 동행해 달라고 모세처럼 간구하는가? 그리고 그분이 함께하시는 구체적인 증거가 내 삶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가?
내가, 그리고 내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의 삶 가운데, 그런 역사가 있기를 간절기 기도한다.

출애굽기의 지루한 반복...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들을 만나신 후, 그들에게 법을 주시고 종주계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40일간 같이 있으시면서 성막의 원형을 아주 자세하게 보여 주신다. 성경은 그 하나 하나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40일이 지난 후... 시내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다 지쳐, 우상을 만드는 죄악을 범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셨고, 징계하셨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성막을 만드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긴 스토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대로 모두 그대로 이루어졌더라."
그런데 모세는 성경을 기록하면서 왜 그렇게 간단히 한 줄로 처리하지 않고, 그 전에 기록했던 그 모든 것을 다시 반복하면서 지루하리 만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우리 인간의 바른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것이 하나도 수정되거나 첨삭이 없이 그대로 실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 우주의 통치자의 말씀이다. 그분의 말씀은 무게가 있다. 피조물인 우리가 거부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그분의 명령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준행해야 한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주권자가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께서 뜻하시는 대로 반드시 이루실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셨다면, 그 자체로서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하며 보증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말씀하신 그대로 한 획도 땅에 떨어짐이 없이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막은 죄악된 인간의 무리인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있어야 한다. 출애굽기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완성된 성막 가운데로 임하시는 두렵고도 장엄한 광경에 대해서 묘사한다. 그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순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출 40:16-35
40:16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40:17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
40:18 모세가 성막을 세우되 그 받침들을 놓고 그 널판들을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그 기둥들을 세우고
40:19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를 덮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40:20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40:21 또 그 궤를 성막에 들여놓고 가리개 휘장을 늘어뜨려 그 증거궤를 가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40:22 그는 또 회막 안 곧 성막 북쪽으로 휘장 밖에 상을 놓고
40:23 또 여호와 앞 그 상 위에 떡을 진설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40:24 그는 또 회막 안 곧 성막 남쪽에 등잔대를 놓아 상과 마주하게 하고
40:25 또 여호와 앞에 등잔대에 불을 켜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40:26 그가 또 금 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앞에 두고
40:27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40:28 그는 또 성막 문에 휘장을 달고
40:29 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40:30 그는 또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거기 씻을 물을 담으니라
40:31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수족을 씻되
40:32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40:33 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40:36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거룩한 삶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거룩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죄악된 나와 함께 하실 때만 내 삶에 나타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 거룩이 내 삶에 드러나기 위해서, 내 삶에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마치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성막건축에 대해서 명하신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준행이 되었던 것처럼, 내 삶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이 그대로 내 삶가운데 이루어질 때, 내 삶의 한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이 그토록 지루하게 반복되는 성막건축의 묘사가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교훈이다.

아빠를 좋아하는 이유...

오늘은 Father's Day... 하연이와 예연이에게 아빠가 좋은 이유 10가지를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예연이의 리스트
1. I can jump on you. (집에서 내가 무슨 일로건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언제 예연이가 내 등에 올라 탈지 모르기 때문에...)
2. You make 라면. (애들인 내가 끓인 라면을 참 좋아한다. 특히 짜파게티... 내가 우리집 짜파게티 요리사~~~)
3. Your tumy is wide enouf to work on. (예연이는 아빠 배 위에 올라오서 누워 있거나 노는 것을 좋아한다. 넓고 푹신해서 좋겠지..)
4. I can climb on you. (내가 서 있을 때면, 예연이는 마치 나무를 타듯이 나를 타고 올라 간다..)
5. You let us do computer. (엄마보다는 아빠가 더 허용적이지.. 예연이가 나에게 전화 할 때는 대부분 엄마가 컴퓨터 못하게 한다고 하소연할 때..)
6. You love me.
7. 제워. (내가 하연이와 예연이를 재워 줄 때는 그게 참 고마운가보다. 아이들이랑 같이 돌아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는 것 뿐인데...)
8. Sometimes you take my food. (예연이가 음식을 남겨야 할 때, 내가 먹어 주니까... 아빠 살찌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9. You play with me. (시간이 없어서 자주 놀아주지는 못하는데.. 어쨋든 우리는 정말 유치하게 논다.)
10. I can play with your hand. (무슨 말인지.. 억지로 10개를 채우느라 만들어 낸 듯..)

하연이의 리스트
1. I love you. (아빠가 좋은 이유를 쓰라고 했더니 아빠가 좋다네... 쩝..)
2. 재워. (예연이와 같다.)
3. Play (예연이거 배낀듯...)
4. 라면. (라면이 그렇게 좋나? 사실 집에서 라면을 거의 못먹게 하는데... 몸에 좋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더 끓여 줘야하나?)
5. Egg (하연이는 내가 만든 scrambled egg가 맛있단다.)
6. Let us do computer.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좋은 거겠지...)
7. Fix. (집안에서 뭔가 고장나면 내가 다 고치니...)
8. Help us 공부. (흠.. 뭔가 찔림.. 사실 공부는 많이 못 도와 주는데...)
9. Go to the library. (하연이는 나랑 도서관에 가는 것은 참으로 좋아한다.)
10. Your school. (UT를 버스타고 가는 것을 좋아한다. 내 차보다 버스가 더 좋단다.)

아이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사실 아이들은 나를 그냥 아빠로서 좋아할 뿐.. 그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그것은 그냥 관계이고, 그 친밀하고 깊은 관계 속에서 오는 사랑을 주고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나의 아빠로서, 그 깊은 관계 속에서 그냥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것저것 해 주시는 것 때문에 그분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사실 내가 거의 해 주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아이들은 나를 사랑한다. 우리는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 하니님께서 나에게 아무 것도 안 해 주신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보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돌아본다.

신뢰? 도대체 어디까지..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가?"라는 단순한 질문 앞에 나의 답은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고 자신있게 간단히 말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 내 안에는 그렇게 답을 하기 위해 수 많은 단서들이 붙어야 하고, 상황들이 추가 설명이 되어야 한다.
왜 나는 단순하게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까? 어제 오늘 사이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내 모습을 봤다. 두렵고 불안한 가운데 어쩔줄 몰라 떨고 있는 내 자신을 보았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소유한 자의 모습이 아닌데... 그것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그것에 대해서... 그것이 내가 기대했던 대로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상황 속에서 그 약속과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하는 가운데, 나는 너무나 쉽게 두려움과 불안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나에게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관념속에 머물러 있는 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내 삶 가운데 실재화 되어 있는 분이고, 내가 온전히 믿고 따르는 나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내 안에 그 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그분이 약속하셨고, 그분이 말씀하셨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 나는 왜 그 가운데서도 불안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알고, 믿고, 그분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지만, 내 안에 있는 죄성은 ㄱ분께 올인하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나로 하여금 그래도 내가 뭔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을 붙잡도록부추긴다. 그 가운데 내 판단과 내 생각이 고개를 쳐들게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에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된다. 바로 그 때,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되고, 나는 그 상황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동안 내가 진정으로 신뢰하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게 된다. 절반은 하나님편에 나머지 절반은 그래도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을 붙잡고 그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는 그 상태가 바로 내 상태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내가 붙잡고 있던 그것이 흔들리는 데서 비롯되는 불안인 것이다.
내 자신을 다시 돌아본다. 나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거기에 내 불안한 마음을 던져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