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질문

"Do you know Jesus?"
"Do you have the Holy Spirit within you?"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교회 안에서, 혹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나 연약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자주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비록 전략적인 측면에서나 대화를 시작하는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그 질문들에 모두 "Yes!"라고 대답한다고 해서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잘못 알게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Does Jesus know you?"
"Are you ruled by the Holy Spirit in your everyday life?"
"Are you possessed by Him? Does your life prove it?"
"Is your life holy?"

이것이 바른 질문이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 진정으로 "Yes!"라고 답을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의 삶은 바로 이런 삶이다.

오늘 하루도 내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며, 내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정말, 나는...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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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당함

예전... 선교단체에 있던 간사님이 결혼하셨다. 결혼 얼마 후 간사님의 신혼집에 놀러 갔었다. 결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그 때... 결혼생활이 궁금해서 이것 저것 여쭤봤다. 그 질문들 중에 하나가 부부생활 하면서 언제 가장 분노하는가였다. 그분은 성격이 워낙 조용하시고 온유한 분이라서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실 것 같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분노를 품을 분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은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설마 그럴 일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그냥 던져본 질문이었다.
그분은 의외로 심각해 지시더니, "아내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때..."라고 대답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이 분노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놀라기도 했지만, 무시를 당한다는 것이 그토록 심각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놀랐었다.

최근 어떤 일로 내 의견이 무시당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 때 느낀 내 안에서의 좌절감과 분노는 참으로 의외라고 생각할 만큼 컸다. 내 말이 상대에게 무게있게 다가가지 않고,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많이 상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 간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생각났다.

그렇다.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상대에게 심각한 상처를 준다. 그것은 온유한 성격의 사람에게 분노를 품게할 만큼, 파괴력이 큰 것이다. 그 아픔을 치유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만큼, 그것은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 그분이 인간에게서 철저하게 무시를 당했다. 모든 인간군상들은 그에 대해 증오를 품어 댔고, 그를 외면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무시를 당해도 그 안에 큰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 하는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에게서 외면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을까? 하나님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종교열심자들, 적어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종교 사제들, 고통과 압제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다윗과 같은 "메시야"를 기다리던 일반 군중들, 그리고 당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팔레스타인 땅을 거닐었던 제자들... 그 모두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를 외면했고 무시했다. 그는 철저하게 고도한, 볼품없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분의 십자가... 그 위대한 능력으로 거듭난 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오늘의 나... 나는 그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짓고 있지는 않는지... 일상의 삶 가운데서, 그분을 무시하지 않고, 모든 순간에 진정으로 나의 왕으로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신뢰하며 무게를 두고 내 삶 가운데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분의 눈길이 머무는 곳, 그분의 마음이 향하는 것으로 내가 달려가고 있는지... 그분의 말씀이 진정으로 내 삶에서 육신이 되어서 구체화되고 있는지...
관념에 머물며, 구호에 불과한 하나의 종교로서 그분을 믿고 있지는 않은지... 내 눈은 세상을 바라보고, 내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가득차 있으면서, 그분을 이용하려는 사악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그러는 과정에서 그분을 지속적으로 무시하면서, 내 뜻, 내 생각, 내 욕망을 관철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믿음이란 그분을 신뢰함으로 내 인생을 그분께 온전히 의탁드리는 것이고, 그분이 원하신 대로 사용하시도록 완전히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갖는 자는 절대로, 한 순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분이 절대화 되며, 그 외의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성화과정이다.

하나님을 무시함으로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다. 내가 아플지언정, 그분을 아프시게 하는 것은 이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나 때문에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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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 이야기1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미국을 The Gilded Age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풍요로와 보일 때였고, 또 내부로는 부패와 부정이 만연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당시의 최고 미인으로 뽑혔던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File:Lillian Russell 4.png

그것은 당시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였던  Lillian Russell이다.(Russell은 1890년 Alexander Graham Bell이 새로 발명한 장거리 전화기를 최초로 테스트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뉴욕에 있었던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워싱턴에 있던 Cleveland 대통령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당시 Russell이 최고의 미인으로 뽑혔던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당시 기준으로 보면 특별히 빼어나지는 않은)이 아니라 그녀의 풍만한 몸매였다.
당시는 large woman이 미인으로 인정되던 때였다. Russell의 경우 5피트 5인치(당시로서는 매우 큰 키)로 140-160파운드의 몸무게를 자랑했다. 그 때 당시의 미국 여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찌기" 위해서 몸부림을 다했다. 커네티컷의 어떤 젊은 여인은 몇 달 만에 18파운드가 쪘다면서 매우 자랑스럽게 주위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던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실, 남북전쟁 전후의 미국 여인들에게 이상적인 몸매는 20인치의 허리였다. 사실 내 개인적인 견해로 볼 때, 아무리 젊은 여성이라 하더라도 20인치는 거의 병적으로 말라야 가능하지 않나 싶고, 보기에도 매우 흉할 것 같은데, 어쨋든 당시에는 그것이 모든 여인들의 목표치수였다. 맨 몸으로는 불가능한 그 수치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 낸 도구가 Corset였다.



당시 남자들이 Corset을 입은 여인들을 얼마나 아름답게 여기고 즐겼는지는 모르겠지만, Corset은 여성들에게 고문기구 이상의 고통을 안겼다.
우선, 여성이 외출할 때,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준비 장면은, 그 여성의 어머니 (간혹, 하인들)이 여성을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발로 밟아 등에 올라 서서 corset에 있는 줄을 있는 힘껏 당겨 허리를 최대한으로 줄이려고 끙끙대는 장면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그리고 Corset은 여성들의 행동을 매우 제한했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일부 매우 도발적인(?) 여성들은 너무나 불편한 여성복장에 반기를 들고 편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Bloomer(아래 그림)를 입기도 했지만 그 조차도 Corset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The Gilded Age가 지나고 1920년대가 되면 Corset을 집어 던지고 편한 복장을 하고 테니스를 치는 등 운동을 하며, 심지어(?) 자전거를 타기까지 하는 New Woman(아래 그림)이 등장하게 된다.



The Gilded Age의 풍만한 여성상에 대한 동경은 아마도 Corset 시대에서  New Woman시대로 옮겨가는 과도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직 Corset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병약하고, 가늘고, 힘없어 보이는 여성을 이상으로 삼았던 그 전시대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튼튼하고 건강하고 풍만한 여인을 동경함으로써, 이제는 보다 더 자유스럽고 건강한 이미지의 여성을 맞이할 준비를 한 것이리라...

어쨋든, 모든(!!!) 여성들이 살빼는 것에 obsessed된 오늘의 싯점에서, Lillian Russell과 같은 여인이 최고의 미인으로 인정되는 날이 온다면, 모두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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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想...

토요일...
일반적으로 가장 한가한 날... 하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가장 바쁜 날이다.
나는 아침 7시 30분에 있는 교회 목자모임 참석을 위해 일찍 준비해 나가야 하고, 목자모임 이후에는 교회에서 예배 말씀 준비에 전념하며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는 토요예배에 참석하여 온 에너지를 다 쏟아 말씀을 전하고, 집에 오면 보통 9시 30분 정도 된다.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 있고, 긴장된 생활을 하다가 집에 오면, 피곤함을 느낀다.
아내는 아이들을 아침식사를 먹이고, 도시락을 싸서 아침에 있는 한글학교 교사모임에 참석, 그 후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이, 집에 올 때 즈음이면 목이 많이 쉬어 있는 것을 본다. 오후에 잠깐 집에 들렀다 5시부터 있는 청년부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모임을 인도하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나와 같이 집에 돌아간다.

토요일이 이렇게 바쁘다보니 집에 올 때 즈음이면 서로가 지쳐 있을 때가 많다. 집에 돌아 오면, 바로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침에 치우지 못한 것들을 치우고 정리하는 일이 남아 있다. 돌아보건데, 거의 항상 이 일은 아내의 일이었다. 나도 피곤하고 지친 것은 사실이지만, 아내도 나 못지 않게 힘들텐데, 왜 이 일이 꼭 아내가 해야하는 일로만 여겨졌었는지... 똘똘뭉친 내 이기적인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토요일 저녁. 아내가 유난히 힘들어하며, 집에 돌아오자 마자 아이들을 재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나도 대충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을텐데, 우연히 그날 아침에 못다한 설거지가 눈에 들왔다. 순간적으로 마음 가운데 갈등이 생겼다. 피곤한 육신에 빨리 가서 자고 싶은 마음과, 내가 지금 이것을 그냥 지나가면 아내가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서로 충돌한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날 나는 설거지를 해 놓고 잤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있었던 마음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극복하고 설거지를 "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부끄러운 과정이었다. 그 갈등 가운데서 내 마음은 그냥 모른 채 하고 빨리 잠자리에 들고자하는 욕망이 점점 더 강해졌다. 사랑하는 아내, 그것도 많이 피곤해 하는 아내가 그 일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앞에 두고 아내에 대한 긍휼한 마음에 그 피곤을 이겨내고 내가 설거지를 해야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 외의 다른 생각을 할 것도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 마음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내가" 피곤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 것이다.
인간의 죄성,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죄성이 내 안에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죄성의 크기와 뿌리깊음의 정도는, 내가 결국 설거지를 하는 것으로 결정하는데,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했고, 하나님의 말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절대자 되신 크신 하나님이 능력 가운데 개입하셔야 가능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 같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너무나 당연한 일조차도 순종하지 못하고, 선을 이루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았다. 죄는 나를 언제든지 그렇게 악한 방향으로 끌고가서 기어이 죄를 짓고야 말도록 나를 주장한다. 죄악의 무서운 힘이다.

마귀가 내 이기심을 부추기는 가운데, 나를 이끌고 가고 있을 때, 그 힘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결코 그런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남편으로서 아내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것. 연약한 그릇인 아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 그를 돕는 것이 내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남편인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내 이기심에 이끌려 무정함과 무관심의 죄악의 직전에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순종해야겠다는 결단으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마칠 수 있었다.

설거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 하나에서조차 선을 이루지 못하고 악을 도모하는 것이 나의 본성인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섬기라고 보내 주신 내 아내에게조차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죄악된 나를 본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는 악한 인간인 것을 다시 깨닫는다. 반면, 나같은 악한 인간을 자녀삼아 주시고, 끊임없는 반역과 반항 가운데서도, 나를 인내하시고, 신실하게 나를 인도하셔서, 당신 자신의 열심과 성실로 내 안에 선을 창조하시고 이루시고 마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 삶을 통해 맺히는 모든 선한 열매는 바로 그분의 열심과 성실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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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need a homepage..."

금요일...
목장모임에 가기 전에 아이들 방에서 아이들과 오랫만에 놀았다.
각자의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는 하연이...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예연이...

갑자기 예연이가 말했다.
(텍사스 사투리가 약간 섞인 어투로) "Daddy! I need a homepage. Can you make it for me?"
"왜?"
"I just need it..."
"홈페이지 만들려면... 서버를 구해야 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홈페이지를 꾸며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인데..."
"I wish I had it."
"뭐하려고?"
"I want to make a game, and put it on the homepage..."
"무슨 게임?"
"A toilette game..."
"Toilette?"
"Yes. I want to make a toilette game. A player flushes Hayun into the toilette... It'll be fun!"
그러면서 물에 빨려서 내려가는 몸짓을 하며 몹시 즐거워했다.

'언니가 그렇게 밉나?' 혼자 생각하며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하연이의 눈치를 살폈다. 의외로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 아니 오히려 웃고 있었다.

하연이가 태어난 후, 둘째를 난다면 딸이 태어나기를 바랬었다. 아무래도 동성의 형제들이 더 친하게 잘 지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램대로 예연이를 보내 주셨고,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이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자주 싸우고, 울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예연이가 언니를 얼마나 생각하고 위하는지 잘 알고 있다. 곧 있으면 언니 생일인데, 자신의 돈을 많이 써 가면서 언니 선물을 준비하는 예연이를 보면서 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이제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갈 두 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물론 지금은 언니를 flush하고 싶을 정도로 밉기도 하겠지만, 그리고 십대를 지내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은 더 복잡해지고, 더 많이 싸울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철이 들고 나와 아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는 유일한 혈육으로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며 살게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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