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5편
고백이 참... 아름답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성호를 영영히 송축할찌로다!"(시 145)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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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20:00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시편 기자의 이 탄식이 곁들여진 감탄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올 수 있는 고백이다. 그것은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잘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지식에 더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자이고, 흉악한 자이다. 내가 어떤 자인지를 더 분명하게 아는 것은 믿음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가 0를 향해 한 없이 수렴해 가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시편 기자의 진정한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 경험에서 나온다. 그분의 가치, 그분의 크기가 무한대로 수렴해 가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경험하게 될 때, 그 분이 나를 "생각하시고" "알아주시는" 것이 얼마나 있을 수 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없어지고 모든 지식이 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어도 결코 그치지 않는 것은, 아니 천국에서도 영원히 지속될 우리의 "일"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일이다. 그일은 영원을 지속한다 하더라도 결코 끝이 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시편 144편은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 시편은 "여호와는 나의 인자(lovingkindness)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삶 가운데서 경험한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고백인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난 모든 인간은, 그 앞에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본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런 성스러운 조우(holy encountering)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 조우가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 수가 없다. 그분 앞에 늘 엎드리며, 그분의 은혜와 긍휼만을 구할 뿐이다. 그분께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대적을 흩으시며 파하시는 장수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환란 가운데서 나를 구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인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목소리 높여 외친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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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08:00
주님...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손을 위로 들고서 드리는 기도는 저녁 제물로 받아 주십시오. 주님, 내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 앞에는 문지기를 세워 주십시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게 해주십시오.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주시고 악인들에게 대접을 받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나는 언제나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시 141:2-5, 표준새번역)
내 삶이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분향과 제물로 열납하실 수 있는 그런 삶이 된다면...
주님께서 악한 입술을 제어하시고, 친히 문지기가 되어 주시는 그런 복을 누린다면...
악을 향해 끊임없이 반응하고 이끌리는 내 마음을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면...
악한 세상 가운데서 악인들 가운데 살더라도 그들과 함께 악을 도모하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부정의 축재에 참여하여 그들과 진수성찬을 먹기보다 깨끗함으로 가난함 굶주림을 오히려 즐거워 할 수 있다면...
동역자가 있어 나를 의의 매로 영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며, 부지불식간이나 의식적으로 짓는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내 마음을 찢는 꾸짖음을 듣는 크나큰 복을 누린다면...
죄악과 부정을 일삼는 자들에게 대접할 가치가 없는 자, 대접이 통하지 않는 자로 여겨진다면...
세상의 악을 보면서 그들의 악에 분노하면서 정작 그 악을 내 안에 내면화함으로써 그들과 동류가 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작 내 삶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너무나 더럽고 역겨우며, (마음의) 입술에는 언제나 독이 가득하고, (마음으로는) 세상의 악인과 함께 악을 도모하며, 가난을 두려워하고 잘먹과 잘 살고자 하는 욕구가 마음 가운데서 치솟고, 동역자들의 사랑의 매와 꾸짖음에 분노하며, 죄인들과 악인들에게 인정받는 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남의 악을 꾸짖고 분노하면서 정작 내가 그들과 똑같은 악을 범하는.... 천하에 흉악한 죄인 중의 괴수가 아닌가?
다윗의 기도... 감히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기도이지만, 이런 흉악한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그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신 내 주인이고 내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 때문에 (덕분에) 용기를 내어 이 벌레만도 못한 나를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감히 기도한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고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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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분향과 제물로 열납하실 수 있는 그런 삶이 된다면...
주님께서 악한 입술을 제어하시고, 친히 문지기가 되어 주시는 그런 복을 누린다면...
악을 향해 끊임없이 반응하고 이끌리는 내 마음을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면...
악한 세상 가운데서 악인들 가운데 살더라도 그들과 함께 악을 도모하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부정의 축재에 참여하여 그들과 진수성찬을 먹기보다 깨끗함으로 가난함 굶주림을 오히려 즐거워 할 수 있다면...
동역자가 있어 나를 의의 매로 영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며, 부지불식간이나 의식적으로 짓는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내 마음을 찢는 꾸짖음을 듣는 크나큰 복을 누린다면...
죄악과 부정을 일삼는 자들에게 대접할 가치가 없는 자, 대접이 통하지 않는 자로 여겨진다면...
세상의 악을 보면서 그들의 악에 분노하면서 정작 그 악을 내 안에 내면화함으로써 그들과 동류가 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작 내 삶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너무나 더럽고 역겨우며, (마음의) 입술에는 언제나 독이 가득하고, (마음으로는) 세상의 악인과 함께 악을 도모하며, 가난을 두려워하고 잘먹과 잘 살고자 하는 욕구가 마음 가운데서 치솟고, 동역자들의 사랑의 매와 꾸짖음에 분노하며, 죄인들과 악인들에게 인정받는 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남의 악을 꾸짖고 분노하면서 정작 내가 그들과 똑같은 악을 범하는.... 천하에 흉악한 죄인 중의 괴수가 아닌가?
다윗의 기도... 감히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기도이지만, 이런 흉악한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그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신 내 주인이고 내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 때문에 (덕분에) 용기를 내어 이 벌레만도 못한 나를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감히 기도한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고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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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58:00
건축학개론
지난 주에 구청에서 공짜로 영화 한 편을 봤다. 약 14-5년만에 영화관 같은 곳에서 본 첫 영화...
<<건축학개론>>
비록 남성의 시각에서 그려진, 남성의 첫사랑의 판타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였지만, 첫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스토리와 상징과 절제가 절묘하게 이루어진 참 좋은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나도 절제하련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사람들은 첫사랑을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함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나는 왜 가슴이 먹먹했을까? 첫사랑과 결혼해서 함께 살면서 매일 보고 있는데...
내 생각에 그 먹먹함이란, 단순히 첫사랑의 기억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90년대 초반을 대학생으로 살았던 사람으로서 느끼는 노스텔지어... 영화의 세세한 소품에 배여있는 90년대 초반의 분위기에 지극히 공감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 시절에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철없고, 순수하고, 서툴렀던 자신의 지나간 과거의 모습에 대한 향수. 그것이 바로 그 "먹먹함"의 원인이리라.
영화의 주제곡인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돈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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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