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벼랑 끝에서 절박함과 처절함을 온 몸에 느끼는 자의 고통을...
그 고통 가운데서도 믿음의 끈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그 팔을...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인정하려는 그 입술을...
그리고 모으는 두 손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은... 숭고하기도 하고 장엄하기까지 하지만, 참으로 마음을 슬프게 한다.
왜 이리... 인생은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 헤어나오지 못할까?
왜...
그 지체들을 위해... 그 가족을 위해... 나도 또한 두손 모으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음을...
그것이 내 무기력함을 더 깊이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기도의 위대함을 믿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이 고난의 끝에서 하나님을 진하게 경험하는 자들이 되기를....
Bridge Over Troubled Water (Simon and Garfunkel)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 w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When you're down and out
When you're on the street
When evening falls so hard
I will comfort you
I'll take your part
When darkness comes
And pain is all ar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Sail on Silver Girl,
Sail on by
Your time has come to shine
All your dreams are on their way
See how they shine
If you need a friend
I'm sailing right behi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ease your mi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ease your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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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39:00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접붙은 가지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십니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에게 인자하게 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롬 11:21-22-표준새번역)
하나님의 준엄하심(severity).
그것이 두렵다...
하나님의 준엄하심(severity).
그것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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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51:00
[펌] Laughing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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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53:00
[CCM] 삼종(三鐘)
예수원 가는 길 1집에 수록된 삼종(三鐘).
삼종은 예수원에서 하루 세 차례 울리는 종소리를 말한다.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
종이 울리면, 모든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침묵기도에 들어 간다.
모든 삶의 리듬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에 맞춰지는 일상의 훈련이다.
이 곡을 들으면서, 예전... 언젠가 겨울에 혼자 찾아갔던 예수원이 생각난다.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던 하얗게 눈덮인 태백. 그리고 그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 가서 산 속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던 예수원.
그곳에서 낯선 믿음의 형제들과 같이 자며 기도하며 나누며 예배하며 식사하며 일하며 보냈던 2박 3일의 시간들...
음악처럼 조용하고 서정적이며, 주님께 집중할 수 있었던 그곳에서 만난 이제는 돌아가신 대천덕 신부님과 사모님...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기억...
지금은... 많이 변했겠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이지만, 그 때의 편안함과 아름다운 자연의 추억은 아스라히 내 마음에서 다시 살아난다.
삼종은 예수원에서 하루 세 차례 울리는 종소리를 말한다.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
종이 울리면, 모든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침묵기도에 들어 간다.
모든 삶의 리듬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에 맞춰지는 일상의 훈련이다.
이 곡을 들으면서, 예전... 언젠가 겨울에 혼자 찾아갔던 예수원이 생각난다.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던 하얗게 눈덮인 태백. 그리고 그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 가서 산 속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던 예수원.
그곳에서 낯선 믿음의 형제들과 같이 자며 기도하며 나누며 예배하며 식사하며 일하며 보냈던 2박 3일의 시간들...
음악처럼 조용하고 서정적이며, 주님께 집중할 수 있었던 그곳에서 만난 이제는 돌아가신 대천덕 신부님과 사모님...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기억...
지금은... 많이 변했겠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이지만, 그 때의 편안함과 아름다운 자연의 추억은 아스라히 내 마음에서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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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57:00
보물26
(2006.05.09에 작성한 글)
"잠이 안 와요? 안 잘래요~~"
어젯밤... 엄마와 자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예연이가 방에서 나오면서 쫑알거린다. 목욕하고, 엄마가 읽어주는 책을 열심히 듣고, 잠자리에 들었던 예연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잠들기가 어려웠는지 모르지만 이미 잠들어 있는 언니를 뒤로하고 아빠에게 달려온다.
잠옷을 입고 있는 예연이의 귀여운 모습...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예연이에게 제안한다.
"아빠가 업어줄까?"
"잠 안 잘래요.. 잠 안 와요.."
"자기 싫으면 자지마.. 그냥 아빠 등에 업혀만 있어."
"예!"
아빠의 넓은 등으로 올라 타는 조그마한 예연이를 업고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불러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하연이 예연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불러준 "주만 바라볼짜라"와 "하연이에게" 두 곡의 노래를 부른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가사 하나 하나가 우리 딸들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른다.
찬양을 시작한지 2분만에 예연이의 고개는 점점 무게를 더하고, 마침내 5분 후에는 깊은 잠에 빠진다. 잠든 예연이를 침대에 눕혀 놓고 귀여운 입술과 볼에 뽀뽀를 해 주고 나서 거실로 나와 다시 책을 집어 든다.
아빠... 귀여운 내 딸들에게 아빠인 것이 참 행복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아빠의 자장가 찬양을 듣고 금새 잠이드는 내 딸들을 보면서 행복하다. 요즘은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 침대에 같이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참으로 미안하고 아쉽기만 하다. 이 아이들이 나의 자장가를 필요로 할 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는데...
"잠이 안 와요? 안 잘래요~~"
어젯밤... 엄마와 자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예연이가 방에서 나오면서 쫑알거린다. 목욕하고, 엄마가 읽어주는 책을 열심히 듣고, 잠자리에 들었던 예연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잠들기가 어려웠는지 모르지만 이미 잠들어 있는 언니를 뒤로하고 아빠에게 달려온다.
잠옷을 입고 있는 예연이의 귀여운 모습...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예연이에게 제안한다.
"아빠가 업어줄까?"
"잠 안 잘래요.. 잠 안 와요.."
"자기 싫으면 자지마.. 그냥 아빠 등에 업혀만 있어."
"예!"
아빠의 넓은 등으로 올라 타는 조그마한 예연이를 업고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불러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하연이 예연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불러준 "주만 바라볼짜라"와 "하연이에게" 두 곡의 노래를 부른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가사 하나 하나가 우리 딸들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른다.
찬양을 시작한지 2분만에 예연이의 고개는 점점 무게를 더하고, 마침내 5분 후에는 깊은 잠에 빠진다. 잠든 예연이를 침대에 눕혀 놓고 귀여운 입술과 볼에 뽀뽀를 해 주고 나서 거실로 나와 다시 책을 집어 든다.
아빠... 귀여운 내 딸들에게 아빠인 것이 참 행복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아빠의 자장가 찬양을 듣고 금새 잠이드는 내 딸들을 보면서 행복하다. 요즘은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 침대에 같이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참으로 미안하고 아쉽기만 하다. 이 아이들이 나의 자장가를 필요로 할 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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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16:00
[펌] Never Satisfied
Grandma Deanie took her little grandson Billy to the beach. They were having a good time until a huge wave came in and swept Billy out to sea. Grandma Deanie fell down on her knees and pleaded to the heavens, "Please return my grandson, -- that's all I ask! PLEASE!!!"
A moment later, lo and behold, a wave swelled from the ocean and deposited the wet, yet unhurt child, at her feet. She checked him over to make sure that he was okay. He was fine. But still she looked up at the sky with an annoyed expression and said, "When we came he had a hat!"
A moment later, lo and behold, a wave swelled from the ocean and deposited the wet, yet unhurt child, at her feet. She checked him over to make sure that he was okay. He was fine. But still she looked up at the sky with an annoyed expression and said, "When we came he had a 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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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24:00
내려 놓음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17-22)
그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중요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신다.
그리고나서 그에게 물으신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고 계셨다. 사역을 시작하신지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예수님의 명성이 널리 퍼졌던 것 같다. 말로만 듣던 예수님이 자신의 집앞을 지나가자, 한 청년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는다. 이 청년은 부자였다. 그리고 그의 말로 판단하건데,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는 자로서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는 자였다. 당시는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이는 그가 그 사회에서 매우 존경받는 자로서 인정 받을 만한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그가 영생에 대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것을 열망하는 마음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겸손했다. 그 영생의 길을 발견하고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보잘 것 없은 예수 앞에서 무릎꿇는 것 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였다.
그가 예수님께 자신의 가장 심각한 고민에 대해 여쭈어 본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중요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신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그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하다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청년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나오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점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에게 물으신다.
네가 십계명을 지켰느냐?
거기에 대해 부자청년은 정말 자신있게 대답한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의 대답에 대해 예수님은 부정하지도 않으시지만 긍정하지도 않으신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을 "사랑하셨다"고 마가가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의 열심과 진심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신 것 같다. 그리고 그 진심을 받으시고, 그가 진정으로 영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십계명을 모두 준수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그 부자청년에게 자신의 재물을 모두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청년이 십계명을 준수했지만, 제 11계명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자신하는 그 청년에게 그가 십계명을 전혀 지키지 않고 있음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었다. 그 청년에게 있어서 재물은 우상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라도 그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면, 차라리 영생을 포기하는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재물은 그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십계명의 제 1계명과 2계명을 동시에 범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나머지 계명도 모두 형식적으로 준수될 뿐, 진정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시며, 그 우상을 내려 놓을 때에만,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만을 "소유"할 때에만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에, 그 부자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으로부터 떠난다. 그 후 그가 다시 돌아 왔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끝까지 재물을 놓지 못한 가운데 영생을 얻지 못하고 지옥의 심판으로 갔을 것 같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결코 대항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불순종이 바로 그 인생의 파멸로 인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놓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 그것은 인간의 죄악만큼이나 뿌리깊다. 영생을 그토록 원했지만, 그 우상을 내려 놓지 못해, 눈 앞에서 그 영생을 놓친 이 부자청년의 어리석음은 동시에 나의 어리석음이기도 하다.
내려 놓음... 순종...
절대 내려 놓을 수 없을 것 같은 내가 쥐고 있는 그것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의지하며, 그분께서 나에게 그것을 이루어 주시도록 간구하며, 의지적으로 순종의 길을 가련다.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분명히 그 길을 갈 것 이다. 그리고, 결국... 내려 놓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가졌던 또 한 명의 부자청년이었던 바울처럼 결국... 승리할 것이다.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주님 때문에.... 그분이 함께하시고, 그분이 나로 하여금 힘을 주실 것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고백을 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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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2:00:00
잡담...
하루.. 길었다.
논문 쓰고, 수업 준비를 위해 글을 읽기도 했지만, 주로 말씀, 기도, 찬양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께 집중하고, 중간중간 기도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본다.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피곤...
왠지 피곤했다. 어제 몇 시간 못 자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저녁 8시가 넘으니 피곤이 몰려왔다. 9시 반 경에 집으로 와서, 밀린 빨래를 했다. 세탁소에 빨래를 넣어 두고,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피곤할 때는 잠을 자거나 드라이브가 최고다. Mo-Pac 북쪽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중간에 공사 중이라 차가 막히는 바람에 차를 돌려 남쪽으로 달렸다. 밤의 드라이브는 그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다. 한산한 거리. 야경. 조용함. 피곤함 가운데 위안이 됨을 느낀다.
빨래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빨래를 개서 집으로 왔다. 11시 30분... 눈과 몸에 피로가 가득하다... 내일을 위해 쉬게 해달라는 몸의 싸인인듯...
자야지...
논문 쓰고, 수업 준비를 위해 글을 읽기도 했지만, 주로 말씀, 기도, 찬양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께 집중하고, 중간중간 기도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본다.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피곤...
왠지 피곤했다. 어제 몇 시간 못 자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저녁 8시가 넘으니 피곤이 몰려왔다. 9시 반 경에 집으로 와서, 밀린 빨래를 했다. 세탁소에 빨래를 넣어 두고,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피곤할 때는 잠을 자거나 드라이브가 최고다. Mo-Pac 북쪽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중간에 공사 중이라 차가 막히는 바람에 차를 돌려 남쪽으로 달렸다. 밤의 드라이브는 그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다. 한산한 거리. 야경. 조용함. 피곤함 가운데 위안이 됨을 느낀다.
빨래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빨래를 개서 집으로 왔다. 11시 30분... 눈과 몸에 피로가 가득하다... 내일을 위해 쉬게 해달라는 몸의 싸인인듯...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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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38:00
[시]별
별
문 혜 숙
내 영혼을
당신의 크낙한 손에 맡기면
푸르른 산 위에 뜨는 별 하나
나의 존재의 생명
소망의 닻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오직 하나의 빛입니다
내 영혼을
당신의 내밀한 방에 두면
두 날개가 등에 돋아납니다
석양의 어둠도 무섭지 않고
비바람 치는 날에도
가는 길을 잃지 않게 비추이며
페르샤에서 베들레헴까지 인도했던 별
나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기는
오직 하나의 인도자입니다
내 영혼에 뜨는
불변의 빛
우주가 종이처럼 사라져도
영원히 남는 진리입니다
문 혜 숙
내 영혼을
당신의 크낙한 손에 맡기면
푸르른 산 위에 뜨는 별 하나
나의 존재의 생명
소망의 닻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오직 하나의 빛입니다
내 영혼을
당신의 내밀한 방에 두면
두 날개가 등에 돋아납니다
석양의 어둠도 무섭지 않고
비바람 치는 날에도
가는 길을 잃지 않게 비추이며
페르샤에서 베들레헴까지 인도했던 별
나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기는
오직 하나의 인도자입니다
내 영혼에 뜨는
불변의 빛
우주가 종이처럼 사라져도
영원히 남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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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34:00
[CCM]주 사모합니다
주 사모합니다
고형원
주 사모합니다
내영혼의 구주여
주의 눈길 내게 임하니
내영혼이 기뻐 경배합니다
주의 손길 내게 임하니
내영혼이 기뻐 경배합니다
고형원
주 사모합니다
내영혼의 구주여
주의 눈길 내게 임하니
내영혼이 기뻐 경배합니다
주의 손길 내게 임하니
내영혼이 기뻐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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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52:00
부활의 신비...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막 9:9-10)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당신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변화산에서부터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경험한 이 세 명의 제자들의 머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부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죽음은 이 땅 가운데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부활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도, 감을 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죽었다가 스스로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 개념 자체가 매우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제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서로에게 질문하며 궁금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단호하면서도 매우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는다? 그게 뭐지?'
타락 이전의 에덴에는 죽음은 전례없는 것이었다. 매우 기이한 것이었고, 도대체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받아 들일 수도 없는 개념이었다. 본적이 없으니 이해가 불가능할 수 밖에...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시기 위해 진땀을 흘리셨을 것 같다.
그런 인간이 타락 이후 죽음과 늘 동행하고, 늘 친숙하게 살아가는 죽음의 친구가 되어 버렸다. 에덴에서 그렇게 부자연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그 현상이 이제는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성인이 된 인간 중,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친구가 되어버린 불쌍한 존재인 인간에게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셨다. 부활... 마치 아담이 죽음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 그리고 인간들은 부활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인간에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몸소 보여 주셨다. 그것이 없다면 부활이 무엇인지 이해도 하지 못하고, 따라서 소망도 갖지 못하고 살아갈 불쌍한 우리들을 위해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시고, 소망하게 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부활에 대해서 희미한 감각 외에는 가진 것이 없다. 그것이 나에게 실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기는 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온전히 뿌리가 내려서, 확신 가운데 부활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 이 땅에서의 삶을 드리는 그런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 부분을 성령께서 채우신다. 나로서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안에 분명히 인격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일하셔서 부활을 소망하게 하시고, 결국은 부활 가운데 참여하도록 인도하신다.
주님의 날... 그 심판의 날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 그곳에서는 부활이 더 이상 낯선 개념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부활을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영원한 삶도 역시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의 양식이 되지 않을까?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죽음이 이제는 그 어느 것 보다도 낯설어 지는 세상... 그 세상이 바로 내가 가야할 주님이 계신 바로 그곳이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당신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변화산에서부터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경험한 이 세 명의 제자들의 머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부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죽음은 이 땅 가운데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부활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도, 감을 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죽었다가 스스로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 개념 자체가 매우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제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서로에게 질문하며 궁금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단호하면서도 매우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는다? 그게 뭐지?'
타락 이전의 에덴에는 죽음은 전례없는 것이었다. 매우 기이한 것이었고, 도대체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받아 들일 수도 없는 개념이었다. 본적이 없으니 이해가 불가능할 수 밖에...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시기 위해 진땀을 흘리셨을 것 같다.
그런 인간이 타락 이후 죽음과 늘 동행하고, 늘 친숙하게 살아가는 죽음의 친구가 되어 버렸다. 에덴에서 그렇게 부자연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그 현상이 이제는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성인이 된 인간 중,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친구가 되어버린 불쌍한 존재인 인간에게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셨다. 부활... 마치 아담이 죽음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 그리고 인간들은 부활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인간에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몸소 보여 주셨다. 그것이 없다면 부활이 무엇인지 이해도 하지 못하고, 따라서 소망도 갖지 못하고 살아갈 불쌍한 우리들을 위해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시고, 소망하게 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부활에 대해서 희미한 감각 외에는 가진 것이 없다. 그것이 나에게 실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기는 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온전히 뿌리가 내려서, 확신 가운데 부활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 이 땅에서의 삶을 드리는 그런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 부분을 성령께서 채우신다. 나로서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안에 분명히 인격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일하셔서 부활을 소망하게 하시고, 결국은 부활 가운데 참여하도록 인도하신다.
주님의 날... 그 심판의 날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 그곳에서는 부활이 더 이상 낯선 개념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부활을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영원한 삶도 역시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의 양식이 되지 않을까?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죽음이 이제는 그 어느 것 보다도 낯설어 지는 세상... 그 세상이 바로 내가 가야할 주님이 계신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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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41:00
Last Concert
The Last Concert... (미국 타이틀은 Take All of Me)
1976년에 제작된 영화..
어렸을 때 참 좋아했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영화...
다섯 번 정도를 봤던 영화다.
사랑하는 아빠의 이혼과 재혼으로 버림받은 상처 가운데 살아가는 젊은 Stella.
그녀가 백혈병으로 진단받은 그 병원에서 Stella의 아빠로 오해받는 가운데서, 의사로부터 Stella에 대해서 들은 중년의 Richard. 그리고 그 둘이 서로 알아가는 과정, 그 둘이 결혼해서 사랑하는 삶, 그리고 수 많은 관중 앞에서 Richard의 곡이 연주되고, Richard도 그 중에서 연주하고 있는 그 그 공연장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Stella를 바라보는 Richard의 아픈 가슴...
어린 가슴이 참으로 아련히 남아 있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 아직도 가슴에 많이 울리는 그 영화...
어디서 구할 수 있다면... 다시 보고 싶다.
Dedicated to Stella (마지막 장면)
1976년에 제작된 영화..
어렸을 때 참 좋아했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영화...
다섯 번 정도를 봤던 영화다.
사랑하는 아빠의 이혼과 재혼으로 버림받은 상처 가운데 살아가는 젊은 Stella.
그녀가 백혈병으로 진단받은 그 병원에서 Stella의 아빠로 오해받는 가운데서, 의사로부터 Stella에 대해서 들은 중년의 Richard. 그리고 그 둘이 서로 알아가는 과정, 그 둘이 결혼해서 사랑하는 삶, 그리고 수 많은 관중 앞에서 Richard의 곡이 연주되고, Richard도 그 중에서 연주하고 있는 그 그 공연장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Stella를 바라보는 Richard의 아픈 가슴...
어린 가슴이 참으로 아련히 남아 있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 아직도 가슴에 많이 울리는 그 영화...
어디서 구할 수 있다면... 다시 보고 싶다.
Dedicated to Stella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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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45:00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욥 4:19)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참으로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 하찮은 하루살이도 감당하지 못해서 거기에 눌려 죽을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존재의 무게가 그토록 가볍다는 것이고, 하루살이의 목숨보다 더 못한 것이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살이는 적어도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반역하며, 순종하지 않으며,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려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고, 니체가 초인을 외치고,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외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만큼 연약한 자인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껫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하루살이를 힘들이지 않고 눌러 죽이는 것처럼, 인간 하나 쯤, 아니 인간 전체라 하더라도 하루살이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 더 힘들이지 않고 죽이실 수 있는 진정으로 강하고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 아닌가? 하루살이보다 못한 내 존재... 교만한 하루살이를 기다리는 것은 그저 무참하게 죽는 죽음 뿐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참으로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 하찮은 하루살이도 감당하지 못해서 거기에 눌려 죽을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존재의 무게가 그토록 가볍다는 것이고, 하루살이의 목숨보다 더 못한 것이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살이는 적어도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반역하며, 순종하지 않으며,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려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고, 니체가 초인을 외치고,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외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만큼 연약한 자인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껫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하루살이를 힘들이지 않고 눌러 죽이는 것처럼, 인간 하나 쯤, 아니 인간 전체라 하더라도 하루살이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 더 힘들이지 않고 죽이실 수 있는 진정으로 강하고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 아닌가? 하루살이보다 못한 내 존재... 교만한 하루살이를 기다리는 것은 그저 무참하게 죽는 죽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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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23:00
guide...
오늘 한 학생이 찾아 왔다.
오늘 저녁에 Walt Whitman의 Songs of Myself의 일부를 발표해야 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같이 생각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해 줬다. 간단한 설명이었는데, 그것을 들은 그 학생은 모든 궁금증과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고마와 하며 떠났다.
길에서 다른 학생을 우연히 만났다. 그 학생도 그 시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약간의 가이드를 줬다. 그 후에 학생의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방금 지도교수님을 만나고 왔다. 논문의 진행과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guide를 구했다. 선생님의 말씀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혹은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다. 한국에 계신 내 지도교수님이 이곳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분의 논문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선생님 사정도 나에게 잘려 주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들을 그분은 알고 있었고, 그분의 guide로 뭔가 더 분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Guide...
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가이드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침 묵상을 통해서 그것을 깊이 느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내 안의 성령을 통해서 가이드를 하고 계시는 것을... 교만하지 않고 그 가이드에 순종함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내게 유익이다.
오늘 저녁에 Walt Whitman의 Songs of Myself의 일부를 발표해야 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같이 생각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해 줬다. 간단한 설명이었는데, 그것을 들은 그 학생은 모든 궁금증과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고마와 하며 떠났다.
길에서 다른 학생을 우연히 만났다. 그 학생도 그 시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약간의 가이드를 줬다. 그 후에 학생의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방금 지도교수님을 만나고 왔다. 논문의 진행과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guide를 구했다. 선생님의 말씀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혹은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다. 한국에 계신 내 지도교수님이 이곳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분의 논문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선생님 사정도 나에게 잘려 주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들을 그분은 알고 있었고, 그분의 guide로 뭔가 더 분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Guide...
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가이드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침 묵상을 통해서 그것을 깊이 느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내 안의 성령을 통해서 가이드를 하고 계시는 것을... 교만하지 않고 그 가이드에 순종함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내게 유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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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57:00
토요일의 적막함...
미국 학생들에게 휴일은 주일이 아니라 토요일인가보다. 토요일인 오늘 하루 종일 적막하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도서관은 커다란 건물 전체를 내가 혼자 쓰고 있다는 착각이 들도록 만든다. 다른 방도 거의 비어 있는 듯하다. 바로 근처에 있는 가신현 집사네 방도, 그 옆방의 하연이 예연이 친구네 아빠의 방도 오늘 하루 종일 비어 있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이 곳에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여러 가지 일을 바쁘게 했다. 월요일에 있을 Discussion Section 준비, Paper grading하느라 미뤄 두었던 Quiz grading을 완료하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 사실 월요일 Discussion Section 준비는 막막하다. 원래 그 전 주에 있었던 두 번의 강의 내용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인데, 화요일에는 수업이 취소되었고, 목요일에는 내 강의가 주를 이루었다. 내 강의에 대해서 토론하면 좋지만, 그 내용이 수업의 theme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이 토론하기는 매우 힘들 것 같다. 교수는 TA들에게 그냥 알아서 시간을 보내라고만 한다.
그래도 지난 주에 학생들이 읽었던 것이 Emily Dickinson의 시들이었다. 내가 학부 학생일 때, 수업시간에 발표했던 그 시인. 그 때 이후로 시를 공부하는 것은 포기 했었다.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그녀의 시... 너무나 압축적이고, 너무나 간결하기 때문에,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그녀의 시는 나를 절망하게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인의 시로 월요일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늘 많은 시간을 들여서 우리가 수업 중에 다룬 시들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지만, 아직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난감하지만, 그래도 걱정하지는 않는다. 산넘어 산... 어려움은 가중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내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라고 부르시는 것이라 믿는다. 주님만이 지혜의 원천이 되신다. 그분께 의지하고,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준비해 갈 때, 주님의 역사 가운데, 학생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난관, 어려움은 그것을 극복해 가는 내 능력을 즐기는 기회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역사를 경험할 너무나 좋은 기회이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그분으로 인해 살게 된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이 곳에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여러 가지 일을 바쁘게 했다. 월요일에 있을 Discussion Section 준비, Paper grading하느라 미뤄 두었던 Quiz grading을 완료하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 사실 월요일 Discussion Section 준비는 막막하다. 원래 그 전 주에 있었던 두 번의 강의 내용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인데, 화요일에는 수업이 취소되었고, 목요일에는 내 강의가 주를 이루었다. 내 강의에 대해서 토론하면 좋지만, 그 내용이 수업의 theme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이 토론하기는 매우 힘들 것 같다. 교수는 TA들에게 그냥 알아서 시간을 보내라고만 한다.
그래도 지난 주에 학생들이 읽었던 것이 Emily Dickinson의 시들이었다. 내가 학부 학생일 때, 수업시간에 발표했던 그 시인. 그 때 이후로 시를 공부하는 것은 포기 했었다.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그녀의 시... 너무나 압축적이고, 너무나 간결하기 때문에,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그녀의 시는 나를 절망하게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인의 시로 월요일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늘 많은 시간을 들여서 우리가 수업 중에 다룬 시들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지만, 아직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난감하지만, 그래도 걱정하지는 않는다. 산넘어 산... 어려움은 가중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내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라고 부르시는 것이라 믿는다. 주님만이 지혜의 원천이 되신다. 그분께 의지하고,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준비해 갈 때, 주님의 역사 가운데, 학생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난관, 어려움은 그것을 극복해 가는 내 능력을 즐기는 기회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역사를 경험할 너무나 좋은 기회이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그분으로 인해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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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22:00
내가 좋아하는 차..
거의 모든 남자들은 차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꿈은 스포츠카이다. 대부분 스포츠카를 볼 때면, 탄성이 절로 나오고 가까이 가고 싶어하고, 능력만 된다면 가지고 싶어한다. 스포츠카는 남자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여성이다.
모든 스포츠카 중 남자들의 꿈은 Dodge Viper, Lamborgini, Ferrari 등이 있다. 모두들 억대가 넘는 비싼 차들...
남자들에게 있어 이런 차들은 그 차를 직접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친구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차들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차는 약간 다르다. 나에게 있어 스포츠카는 그저 장난감 정도로 밖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아무리 멋지게 보인다 하더라도, 나는 작은 차를 싫어한다. 스포츠카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전혀 매력이 없는 예쁜 여자와 같은 존재이다.
대신 내 눈을 끄는 차, 내 마음을 끄는 차들은 따로 있다.
Jeep Wrangler, Hummer2, Land Cruiser, Land rover discovery...
모두들 사륜구동의 off road 전용차들이다. 차 공간이 넓고, tough하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 이 차들을 몰고 산으로 들로,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며 달리는 것이 내 꿈이다. 안락하고 편안함, 혹은 스피드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말할 수 없는 tough함을 즐기며, 차와 내가 하나가 되어 세상을 누비는 것... 그것이 내 기쁨이다....
이 차들 중 특별히 Hummer2와 Discovery는 내 꿈이다. 영국의 명차 반열에 올라 있는 Discovery는 사륜구동의 교과서와 같은 모범적인 solution을 제공한다. Hummer는 전투지역을 누비던 군용 모델인 Humby의 강인함을 가지고 있고, 실내가 넓으며, 가지 못할 곳이 없는 차이다.
물론 이 차들은 Gas Guzzler들이다. 고유가 시대에 타고 다니기에는 부담이 많은 차이다. 그리고 더구나 GM이 Hummer의 생산을 중단하기로 한 것을 고려하면, 누군가 Buyer가 회사를 사지 않는 한, 이제는 단종될 가능성이 높다.
평생을 가난함 가운데 살기로 한 나에게, 이런 차들은 사치이다. 하지만, 비록 끝까지 상상에 머물지 모르지만, 이 차들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몰고 달리는 상상, 아니 그 차들의 주인이 되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즐겁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꿈은 스포츠카이다. 대부분 스포츠카를 볼 때면, 탄성이 절로 나오고 가까이 가고 싶어하고, 능력만 된다면 가지고 싶어한다. 스포츠카는 남자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여성이다.
모든 스포츠카 중 남자들의 꿈은 Dodge Viper, Lamborgini, Ferrari 등이 있다. 모두들 억대가 넘는 비싼 차들...
남자들에게 있어 이런 차들은 그 차를 직접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친구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차들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차는 약간 다르다. 나에게 있어 스포츠카는 그저 장난감 정도로 밖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아무리 멋지게 보인다 하더라도, 나는 작은 차를 싫어한다. 스포츠카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전혀 매력이 없는 예쁜 여자와 같은 존재이다.
대신 내 눈을 끄는 차, 내 마음을 끄는 차들은 따로 있다.
Jeep Wrangler, Hummer2, Land Cruiser, Land rover discovery...
모두들 사륜구동의 off road 전용차들이다. 차 공간이 넓고, tough하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 이 차들을 몰고 산으로 들로,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며 달리는 것이 내 꿈이다. 안락하고 편안함, 혹은 스피드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말할 수 없는 tough함을 즐기며, 차와 내가 하나가 되어 세상을 누비는 것... 그것이 내 기쁨이다....
이 차들 중 특별히 Hummer2와 Discovery는 내 꿈이다. 영국의 명차 반열에 올라 있는 Discovery는 사륜구동의 교과서와 같은 모범적인 solution을 제공한다. Hummer는 전투지역을 누비던 군용 모델인 Humby의 강인함을 가지고 있고, 실내가 넓으며, 가지 못할 곳이 없는 차이다.
물론 이 차들은 Gas Guzzler들이다. 고유가 시대에 타고 다니기에는 부담이 많은 차이다. 그리고 더구나 GM이 Hummer의 생산을 중단하기로 한 것을 고려하면, 누군가 Buyer가 회사를 사지 않는 한, 이제는 단종될 가능성이 높다.
평생을 가난함 가운데 살기로 한 나에게, 이런 차들은 사치이다. 하지만, 비록 끝까지 상상에 머물지 모르지만, 이 차들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몰고 달리는 상상, 아니 그 차들의 주인이 되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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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5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