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이 강물처럼...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팝송 레코드만 1500장 정도 있었다. 팝송의 메니아였던 큰형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마련한 것들로, 당시 노래들 중에서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전축 또한 성능이 매우 좋은 것이었는데, 덕분에 우리 4형제는 음악에 심취할 수 있었다.
우리 형제들이 음악듣는 방식은 이웃집에 큰 폐를 끼치는 방식이었다. 누가 음악을 듣던, 누구와 함께 듣던 상관 없이, 바로 옆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듣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웃집에서 자주 claim이 들어 왔고,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우리에게 음악 소리 좀 줄여달라고 하소연도하고 명령도 하셨지만, 우리 형제들은 단호했다.
내가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어머님께 미안하여, 헤드폰을 끼고 듣곤 했다. 헤드폰이 상당히 좋은 것이긴 했지만, 큰 스피커로 듣는 것보다는 훨씬 음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모두들 싫어하는 장비였는데, 어머님이 마음아파 하시는 것을 보는 것이 미안해서, 내 나름대로 타협한 것이 헤드폰이었다.(그 결과... 내 청력에 손상이 생겼는지, 가는귀가 먹어서 왠만한 작은 소리는 잘 듣지 못한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로 볼륨은 최대한으로 하여 가슴이 울릴 정도로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음악의 세계에 빠져 들었으며, 온통 음의 바다에 푹 젖어드는 느낌을 즐기곤 했다.

요즘.. 집에서 가끔씩 찬송가를 듣는다. 그것도 컴퓨터에서 나오는 조그마한 소리의 음악으로...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아내와 살다보니, 내 삶에서도 큰 소리의 음악이 사라진지 오래가 되었다. 음질이 형편없는 컴퓨터에서 나오는 찬송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하지만 요즘도 큰 음악속에 잠길 때가 있다. 그것은 혼자서 차를 타고 갈 때... 볼륨은 최대한으로 높아지고, 나는 찬양의 홍수 속에 빠진다. 내 가슴을 울리는 음율도 좋지만, 그 가사 하나하나가 내 가슴을 떨리게 하고, 내 피부에 소름이 돋을 많큼 기쁨과 감사를 준다. 그런 감격스러운 고백을 그냥 들을 수가 없다. 마치 그 찬양의 가사가 내 몸속으로 완전히 침투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내 온 영혼이 그 찬양의 바다에 떠다니며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것처럼, 내 차 안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그 찬양들로 가득채우기를 바라며, 나는 내 차 안을 찬양의 소리로 가득가득 채운다.(예전에 타던 차는 너무 큰 소리 때문에 왼쪽 앞쪽 스피커가 찢어졌었다. -_-;;;;)

찬양의 바다에 빠져, 그 찬양을 온전히 만끽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음악적 즐거움이다.

Praise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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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 듣고서..."

오늘의 QT묵상 찬송(참고로 제가 사용하는 QT본문은 QT 교제인 "매일성경"을 따르며, 찬송도 "매일성경"을 따릅니다.)

**379장**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비가 오고 물나며 바람 부딪쳐도 반석위에 세운 집 넘어지지 않네
주의 말씀 듣고도 행치않는 자는 모래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같아 비가 오고 물나며 바람 부딪칠때 모래 위에 세운 집 크게 무너지네
세상 모든 사람들 집을 짓는 자니 반석 위가 아니면 모래 위에 짓네 우리 구주 오셔서 지은 상을 줄때 세운 공력 따라서 영영 상벌주리

[후렴] 잘 짓고 잘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 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며 그대로 따라가는 복을 누리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본다. 그렇지 못한 자들의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경우는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 경우는 말씀은 잘 알고 있지만, 잘 알고 있다는 교만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놓치는 것이다. 사실... 그 두 경우가 나타나는 양상만 다를 뿐 결국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본다.

남들의 실패를 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왜냐하면, 나라고 남들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말씀을 잘 알지만, 교만 가운데 정작 그 말씀을 놓치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다.
주님 앞에 겸손이 얼마나 필요한지... 주님의 말씀이 아니면 한 발짝도 못나가고,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 그래서 주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 결국 내 인생을 반석 위에 집을 짓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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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4년전 청년부를 섬기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그 전에는 없던 이상한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체들을 생각할 때, 마음에 불편한 것이나, 진노나, 말씀이나 혹은 뭔가가 내 마음속에 생기는 것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무슨 근거도 없이... 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생기는 그 마음의 현상...
그 때마다 조심스럽게 그 지체들에게 개인적으로 다가가서 내 마음에 생기는 것을 조심스럽게 말해주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지체가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나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반복되고 지속되면서,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그것을 전달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체험을 통해서, 나는 청년부를 섬기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보게 하시고, 느끼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영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게 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하며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이 능력이 결코 감사하거나 즐거워할 능력만은 아님을 나는 역시 체험했다. 내 마음에 한 지체가 떠오르며, 그 지체에 대해서 마음에 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 그 지체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 회개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책망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결코 유쾌하지 않은 말을 전해야 하는 것은 항상 고통스럽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아주 많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말대로, 전해야 할 말을 전하지 않고 내 마음에 담아두었을 때, 내 스스로가 번뇌와 아픔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된다. 얼마나 그 고통이 큰지 알 수 없다.

최근에도 같은 경우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지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히 진노하고 계신다는 것이 내 마음 속에서 분명히 느껴졌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떤 책망과 저주의 말을 전해야 할 것인지도 내 마음 속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슴이 너무 아팠고, 전하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이 내 마음에 너무 강했다. 그래서 불순종하며 그 말을 전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 마음을 불붙는 것 같은 고통이 있었고,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뼈가 녹는 것 같은 아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전했다. 원래는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라 메일로 정리해서 보내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에 결국 직접 대면하여 말을 전했다. 하지만 내가 받은 그 책망의 말씀들, 그리고 저주의 말씀들을 있는 그대로 하나하나 모두 전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뭉뚱그려 대충전해버렸다. (이 불순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신다면, 나는 그 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아무리 대충 전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가슴아픈 그 말... 그 말을 전하고 나면 내 마음이 더 아플 수 밖에 없는 그 말들... 하지만 그 말들이 내 입술을 통해서 전달되었을 때, 내 마음의 불같은 고통이 동시에 빠져 나왔다. 말을 전한 후, 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를 느꼈고, 이제 내가 할 일을 했다는 안도감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읽은 신앙서적에서 위의 예레미야 본문을 설명하는 설명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서 쏟아져 나온 그 말들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마음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마음에 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술에 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통로요 전달자다. 만약 그들이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을 때, 그들 스스로가 얼마나 큰 고통을 느꼈을지... 그들이 왜 그 엄청난 핍박과 저항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그것과 함께 전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었던 것이다.

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그 지체에게 주님의 긍휼과 자비와 인자가 넘치기를 기도한다.
오늘 아침 묵상의 찬송(217장)을 그 지체에게 선물한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맘 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때 권능의 손을 내게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아-멘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11
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카이로스...
나에게 그 카이로스가 다가오고 있다.
두렵기도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감사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카이로스...
그것이 하나님의 카이로스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카이로스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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