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하나 더...

지난 주 토요일 밤에 정말 오랫만에 TV를 켰는데, 볼 만한 프로가 거의 없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방송사의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씨에 대한 프로에 시선이 멈췄다.

그가 어떻게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성공요인을 분석한 것이었다. 그 프로에서 꼽은 첫번째 요인이 바로 영어. 방송은 그의 영어가 매우 "유창하다"고 설명했다. 그 영어로 인해서 세상을 알게되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로 말하는 그분을 보면서 오히려 나는 반대의 생각을 했다. 그분의 영어는 결코 유창하지 않았다. 적어도 발음으로 볼 때는... 요즘 젊은 세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중하위권도 들 수 없을 만한 영어였다. 그분의 영어를 보면서 '저렇게 영어를 못하는데도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이 결코 영어를 못하는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유창했다."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발음의 차원이 아니라 영어를 구사하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어 발음은 영어의 작은 한 요소에 불과하다. 발음이 영어의 전부는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부분도 아니다. 특별히 몇 개의 발음만 주의한다면 발음문제는 외국인으로서 충분히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단어와 문장의 구사력이다. 물론 반총장님의 영어에서 콩글리시의 흔적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발음에 비해서 문장 구사력이 더 뛰어남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유창함"은 발음도, 문장 구사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문장 구사력이 발음보다 뛰어나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중간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그분의 영어실력이 특출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계의 이목이 그의 입에 집중되며 공감하며 감탄하는가? 그것은 영어라는 포장지에 실려 나오는 그분의 사상과 철학과 삶과 리더십이다. 결국 반총장님은 그분이 가진 그 무엇, 그 콘텐츠로 세상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한 그의 열정, 자신감, 그리고 그분의 인격에서 품어져 나오는 인간적인 매력과 리더십이라는 뛰어난 콘텐츠가 바로 그분의 영어를 차원이 다른 연설로 만드는 것이다.

영어 열풍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반총장님과 같은 그런 콘텐츠를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가 매우 드물다. 영어라는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갖출 뿐, 그것으로 담아낼 그 뭔가를 부단히 배우고 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없다. 영어라는 포장지에 담아낼 그 무엇이 없다면, 그 포장지는 휴지조각일 뿐이라는 것... 그것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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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출퇴근 길 이용하는 마을버스 안에 있는 화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아이돌 그룹들의 뮤직비디오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잘 훈련되고 잘 만들어진, 하지만 혼이 없는, 엔터테인먼트 기계(혹은 자동인형) 같다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낭만과 사랑과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를 받아왔던 나에게는,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자본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상품화된 그들의 소위 "음악"이 진열대의 하나의 상품처럼 친근감이 없다. 오히려 재벌의 행태를 본받아 그 전철을 밟아가는 연예기획사의 그 막강한 힘이 느껴져 거부감이 더해갈 뿐... 영혼 깊숙히 울리는 울림이 아니라, 말초신경의 감각에 호소하는 그들의 춤과 노래는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천편 일률적인 춤과 노래. 혹독한 훈련과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에 갖혀 사는 그들이 오히려 불쌍하다. 지금은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만,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용도폐기가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참 암울할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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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살롱

안철수 교수가 룸살롱에 간 것을 본 적이 있다는 미확인 소문에 오늘 급기야 여당의 대선후보까지 나서서 진실을 밝히라고 안교수에게 요구했다.
확인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룸살롱에 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강하게 여론몰이를 하며 안교수의 신선한 이미지에 상처를 내겠다는 의도이리라. 그리고 많은 국민들은 그 소위 '의혹'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안철수가 그런 사람이었어?'라고 의문표를 붙이기를 고대하는 마음이리라. 물론 많은 국민들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그런 이미지 놀이, 언론 플레이에 넘어가겠지... 그 전략은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그 효과가 검증된 것이니까...

사실 갔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조차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치고, "안교수가 룸살롱에 갔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리고 일반화된 이미지로 그 의미를 거기서 추출하는 것이고, 그것은 진실, 혹은 사실과 동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당에서는 바로 이런 것을 가지고 play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간 적이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무슨 평가를 내릴까?
'세상에...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집사가...'
'겉보기는 멀쩡해 보이는데, 뒤로는 할 짓 다 했군...'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위선자.'
등등  나는 악한 세상에 속한 자로서, 그 중심에서 할짓 다한 못된, 그리고 위선적인 크리스천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정작 "룸살롱에 갔었다"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호하다. 사실 이야기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룸살롱에 갔었던 것은 단 한 번. 군대에 있을 때(그때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졸병시절, 광주의 한 시내에서 동기 기수 중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이 만났다. 그 중 한 명이 대낮인 2시에 술을 먹자고 제안했고, 자기 형님이 룸살롱을 하고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제안했다. 동생이 동기들과 왔으니 술 값을 많이 안 받을 것이라면서... 그 때도 술을 안 마시던 나는 좀 꺼려지긴 했지만, 동기들이 가자고 해서 같이 따라갔다.
지하로 내려간 룸살롱에는 진짜 "룸"이 있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술을 먹을 수 있도록 구조가 된 방.. 거게에 네 명의 군바리들이 앉았다. 대낮에... 룸살롱 주인이었던 동기 형님이 들어와 우리들과 인사하고, 먹고싶은 것 뭐든지 먹으라며 푸짐한 과일안주와 여러 안주를 들여 보냈다. 젊은 여자 한 명과 함께...
동기들은 술을 먹기를 원했지만, 대낮부터 술을 먹기가 좀 그랬는지,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고, 술에 입도 대지 않는 나는 안주만 냅다 집어 먹었다. 같이 들어오 여자는 내 동기와 잘 아는 사이인지 룸살롱 영업이나 손님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동기들은 힘든 군대생활에 대해 푸념하다가 네 시 정도에 룸살롱을 나왔다.
그것이 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룸살롱 체험이었다.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가본 적이 있는가?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경험이 룸살롱에 갔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이미지와 어떤 면에서 일치하는가 혹은 일치하지 않는가?

'안철수 교수가 룸살롱에 갔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그것으로 안교수를 평가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이 이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안 교수의 이미지가 그런 것이 문제가 될 정도로 대중들에게 깨끗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문제를 이슈화시켜야만 했을 정도로 여당에서 안교수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거리를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룸살롱에 상습적으로 들락거리며 접대받고 접대하며, 여성에 대해서 수많은 추태와 비행을 일삼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당에서,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룸살롱"을 이슈화하는 것이다.

정말... 치졸한 작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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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Dickinson의 시 한 편

Success is counted sweetest

By those who ne'er succeed.

To comprehend a nectar

Requires sorest need.

Not one of all the purple host

Who took the flag to-day

Can tell the definition,

So clear, of victory!

As he, defeated, dying,

On whose forbidden ear

The distant strains of triumph

Burst agonized and clear!

이사야 12장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You will say in that day:
“I will give thanks to you, O LORD,
for though you were angry with me,
your anger turned away,
that you might comfort me.
“Behold, God is my salvation;
I will trust, and will not be afraid;
for the LORD GOD is my strength and my song,
and he has become my salvation.”
With joy you will draw water from the wells of salvation. And you will say in that day:
“Give thanks to the LORD,
call upon his name,
make known his deeds among the peoples,
proclaim that his name is exalted.
“Sing praises to the LORD, for he has done gloriously;
let this be made known in all the earth.
Shout, and sing for joy, O inhabitant of Zion,
for great in your midst is the Holy One of Israel.”
(Isaiah 12 ESV)



National Geographic photo of the month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정말 아름답다.

요나를 생각하며...

소위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받고도 그 메시지를 전달해야할 곳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한 자.
자신의 불순종으로 배가 침몰하고 모두가 죽게되었지만,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차라리 바다에 던져져 죽음을 택할 만큼 반역적인 자.
바다에서 죽었어야 했지만, 고래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께 감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동일한 인자와 자비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했을 때, 이를 갈며 하나님께 대들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함부로 하나님께 망언을 했던 자.
땡볕에서 자신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던 박넝쿨을 벌레로 하여금 죽게하시고, 뜨거운 바람으로 고통을 더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하며 대들던 자.

요나는 악한 인간의 표상이다. 그런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설득하시고 훈계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 요나서를 보면 마치 하나님의 세계에는 요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집중하신다. 요나가 말을 안듣는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 그 메시지를 전하면 되는 것인데, 마치 이스라엘, 아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듯이 집요하게 그에게 그 일을 일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이런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해될 듯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바로 그 요나같은 자, 아니 요나보다 더 흉악한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반역적인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를 품으시고 설득하시고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마치 이 세상에 귀한 존재는 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듯이, 내게 집중하시고, 나를 관용하시고,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나 한 사람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 그 이해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더 극명히 보여준다. 결국, 다른 모든 성경의 책들처럼, 요나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중점적으로 보여주며 잘 보여주는 책이다.

요나의 하나님... 그분은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분이며, 그 크신 자비와 인자로 죄인을 가슴에 품으시는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감사.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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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과 세 친구가 부러운 이유

다니엘서를 공부하면서 다니엘과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혹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 하나는 다음 구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As for these four youths, God gave them learning and skill in all literature and wisdom, and Daniel had understanding in all visions and dreams.)"(1:17, 영문은 ESV)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지식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다. 학문을 하는 나로서는 가장 부러운 능력이 바로 지식과 학문에 명철하게 하시는 것 아닌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뭔가를 알아간다는 생각보다는 부족함을 느끼며 내 능력없음을 한탄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학문에 대한 능력을 부여받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한 부럽기만 하다.

그들이 부러운 또 다른 이유,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동역이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단 2:17-18)
느부갓네살왕이 범상치 않은 꿈을 꾼 후에 그 꿈이 무엇인지와 그 해석을 동시에 알려라는 추상같은 명령, 어찌보면 불가능한 명령을 내린 후 그 당시 지식인들이 모두 처형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을 굳게 믿은 다니엘이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만약 그가 말한 대로 왕이 무슨 꿈을 꿨는지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는 왕을 농락한 댓가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면, 자신의 민족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위험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그런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친구들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마치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서 다니엘에게 그 꿈과 해석을 보여 주셨다.
이후로도, 바벨론과 페르시아라는 당시 초강국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데 많은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풀무불과 사자굴이라는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 그들은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고, 그 동역자와 같이 함께하는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믿음의 길, 자신들의 목숨과 기득권을 내려 놓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고, 종국에 이방의 한 중심, 우상숭배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복된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결단. 그것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결단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거기에 절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거기에 절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경배를 드리고 그분께만 무릎을 꿇겠다는 믿음의 결단은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조롱과 핍박의 대상이다. 때로는 밥줄을 포기해야만 하고, 작게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내 개인이 하나님 앞에 보다 더 바르게 서고, 거룩한 삶 가운데 그분을 더욱 의지하는 것과 함께, 동시에 같은 뜻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기도해주고, 함께 삶을 나누는 동역자들인 것이다.

나는 동역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경험했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완전히 바뀐 지금, 거의 1년 동안 광야에 홀로 남아 있는 외톨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동역자가 그립다. 믿음으로 나를 깨어있게 하고, 같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일을 도모할 동역자들...

그것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척 부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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