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07에 제가 작성했던 글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집으로 가는 길... 그것은 때로는 피곤함에 지쳐 터벅거리며 가는 길이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 종일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는 마치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와 같은 허탈함으로 가슴 아파하며 가기도 하고, 때로는 뭔가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에 기쁨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 생각없이 때가 되서 그냥 내 거처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일반적으로는 저녁 늦게 집에 가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도 모두들 자고 있어서 나도 그냥 씻고 때로는 TV를 보거나 아니면 공부를 더 하다가 잠자리에 든다. 그로써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다.
가끔은 아이들이 깨어 있을 때 집에 돌아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문 앞에서 열쇠를 돌리는 순간부터 안에서 들려오는 반응들이 각각이다. 때로는 애들은 울고 있고 애엄마는 목소리를 높여 혼내고 있고, 때로는 즐거운 웃을 소리가 집안 가득히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아무런 소리가 없을 때가 있다.
그 중 가장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빠다! 아빠!"라는 두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릴 때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나를 향해 인사를 하는 아이들... 그리고 뽀뽀해주고 안아주기를 기다리는 아이들... 나를 아빠로 인정하고 반가와 하는 아이들은 나에게 너무 큰 기쁨이다.
며칠 전, 집에 들어가는데 예연이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서럽게 울어대는 예연이를 본 나는 영문도 모르고 일단 꼭 껴안아 주었다. 한참 후에 울음이 잦아들자 왜 그렇게 우는지 물어 보았다. 이유인 즉슨 잠자려고 엄마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가 내가 오는 소리에 나와서 인사하려고 침대를 내려오면서 받을 헛디뎠는지 넘어졌다는 것이다.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라고 즐겁게 인사하려는 계획이 무산되서 서럽고, 넘어져서 아파서 더욱 서러워 한참을 울어대는 예연이를 꼭 안아주면서, 나를 반기며 나를 사랑해주는 내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했다. 힘들고 지친 하루였지만 아이들을 보고 안아주는 순간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기쁨을 만끽하며 내 보물을 껴안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내 두 보물들로 인해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시 하나...
아래 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시인인 Paul Laurence Dunbar의 시이다. 그는 흑인이었고, Elevator boy로 일했던 억압받고 천대받았던 흑인이었다.
며칠 전 집으로 가는 길에 읽었던 그의 시집 중에서 나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했던 시가 있어서 소개한다.
Accountability
Folks ain't got no right to censuah othah folks about dey habits;
Him dat giv' de squir'ls de bushtails made de bobtails fu' de rabbits.
Him dat built de gread big mountains hollered out de little valleys,
Him dat made de streets an' driveways wasn't shamed to make de alleys.
We is all constructed diff'ent, d'ain't no two of us de same;
We cain't he'p ouah likes an' dislikes, ef we 'se bad we ain't to blame.
Ef we 'se good, we needn't show off, case you bet it ain't ouah doin'
We gits into su'ttain channels dat we jes' cain't he'p pu'suin'.
But we all fits into places dat no othah ones could fill,
An' we does the things we has to, big er little, good er ill.
John cain't tek de place o' Henry, Su an' Sally ain't alike;
Bass ain't nuthin' like a suckah, chub ain't nuthin' like a pike.
When you come to think about it, how it's all planned out it's splendid.
Nuthin's done er evah happens, 'dout hit's somefin' dat's intended;
Don't keer whut you does, you has to, an' hit sholy beats de dickens,--
Viney, go put on de kittle, I got one o' mastah's chickens.
며칠 전 집으로 가는 길에 읽었던 그의 시집 중에서 나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했던 시가 있어서 소개한다.
Accountability
Folks ain't got no right to censuah othah folks about dey habits;
Him dat giv' de squir'ls de bushtails made de bobtails fu' de rabbits.
Him dat built de gread big mountains hollered out de little valleys,
Him dat made de streets an' driveways wasn't shamed to make de alleys.
We is all constructed diff'ent, d'ain't no two of us de same;
We cain't he'p ouah likes an' dislikes, ef we 'se bad we ain't to blame.
Ef we 'se good, we needn't show off, case you bet it ain't ouah doin'
We gits into su'ttain channels dat we jes' cain't he'p pu'suin'.
But we all fits into places dat no othah ones could fill,
An' we does the things we has to, big er little, good er ill.
John cain't tek de place o' Henry, Su an' Sally ain't alike;
Bass ain't nuthin' like a suckah, chub ain't nuthin' like a pike.
When you come to think about it, how it's all planned out it's splendid.
Nuthin's done er evah happens, 'dout hit's somefin' dat's intended;
Don't keer whut you does, you has to, an' hit sholy beats de dickens,--
Viney, go put on de kittle, I got one o' mastah's chickens.
Posted at
오후 11:20:00
胡蝶之夢
새벽 두시 정도에 잠에서 깨었다...
갑자기 엄습해 오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 그리고 온갖 죄악된 생각들이 나를 깨운 것이었다.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나이기에 특별한 체험이었다. 한 동안 그 상태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새 잠이 들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났을 때, 아직도 그 때의 두려움과 불신과 죄악된 생각들의 잔영이 남아 있어서 무거운 마음으로 묵상을 시작했다. 매일성경에 나온 대로 묵상 전에 찬송을 불렀다. 오늘 찬송은 444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주야에 자고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때때로 괴롬당하면 때때로 기쁨 누리네 풍파중에 거느리고 평안할 때에 거느리네
내 주의 손을 붙잡고 천국에 올라가겠네 괴로우나 즐거우나 예수가 거느리시네
이세상 이별할때에 지옥의 권세 이기네 천국에 있을 때에도 예수가 거느리시네
[후렴]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아-멘
찬송을 부르면서 간밤에 폭풍처럼 나를 휩쓸었던 모든 죄악에 단숨에 쓸려 나가고 정결함과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찬송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그리고 찬송가가 참으로 영적인 노래라는 것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악몽에서 깨어나 너무 평안한 세상을 다시 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胡蝶之夢(호접지몽, 나비의 꿈)은 중국 고전인 "장자"에 나온 구절이다. 장자가 어느날 잠들었는데,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너무나 자유롭게 그 인생을 즐기고 있을 때 잠에서 깨었다. 그 순간 장자는 꿈속의 나비가 꿈을 꿔서 장자 자신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그가 말하는 것은 중국 도교의 사상적 바탕이되는 노장사상 중 특히 장자에 의해 강조되었던 物我一體(물아일체, 사물과 내가 하나), 즉 자연과 내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됨을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경험을 통해 胡蝶之夢을 떠올리는 것은, 신앙생활이란 어찌보면 꿈꾸는 것과 비슷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으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문득 '내가 뭘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닌가?'라는 자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은 세상의 원리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며 다른 삶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 때면 마치 장자 본인과 나비 중 어느 것이 현실인지가 혼동되는 것처럼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진리인지 아니면 정신차리고 열심히 자기 앞길을 찾아 세상사람처럼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내가 뭘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마치 꿈에서 깨어서 현실로 돌아 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느 것이 꿈인지 혼동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부른 찬송은 나로 하여금 어느 것이 꿈이며 어느 것이 현실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고, 나로 하여금 현실에 발을 딛도록 도와 주었다.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은 꿈일 뿐이며, 언젠가는 깨지게 될 삶의 방식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품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실상 나로 하여금 현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내가 도대체 뭘하고 있나?'라는 질문은 사탄이 던지는 유혹이며, 나로 하여금 멸망의 길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예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그런 것일 뿐이다.
이 새벽 나를 아시고 나를 위해 찬송을 예비하심으로 다시 주님을 붙잡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갑자기 엄습해 오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 그리고 온갖 죄악된 생각들이 나를 깨운 것이었다.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나이기에 특별한 체험이었다. 한 동안 그 상태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새 잠이 들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났을 때, 아직도 그 때의 두려움과 불신과 죄악된 생각들의 잔영이 남아 있어서 무거운 마음으로 묵상을 시작했다. 매일성경에 나온 대로 묵상 전에 찬송을 불렀다. 오늘 찬송은 444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주야에 자고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때때로 괴롬당하면 때때로 기쁨 누리네 풍파중에 거느리고 평안할 때에 거느리네
내 주의 손을 붙잡고 천국에 올라가겠네 괴로우나 즐거우나 예수가 거느리시네
이세상 이별할때에 지옥의 권세 이기네 천국에 있을 때에도 예수가 거느리시네
[후렴]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아-멘
찬송을 부르면서 간밤에 폭풍처럼 나를 휩쓸었던 모든 죄악에 단숨에 쓸려 나가고 정결함과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찬송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그리고 찬송가가 참으로 영적인 노래라는 것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악몽에서 깨어나 너무 평안한 세상을 다시 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胡蝶之夢(호접지몽, 나비의 꿈)은 중국 고전인 "장자"에 나온 구절이다. 장자가 어느날 잠들었는데,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너무나 자유롭게 그 인생을 즐기고 있을 때 잠에서 깨었다. 그 순간 장자는 꿈속의 나비가 꿈을 꿔서 장자 자신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그가 말하는 것은 중국 도교의 사상적 바탕이되는 노장사상 중 특히 장자에 의해 강조되었던 物我一體(물아일체, 사물과 내가 하나), 즉 자연과 내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됨을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경험을 통해 胡蝶之夢을 떠올리는 것은, 신앙생활이란 어찌보면 꿈꾸는 것과 비슷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으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문득 '내가 뭘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닌가?'라는 자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은 세상의 원리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며 다른 삶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 때면 마치 장자 본인과 나비 중 어느 것이 현실인지가 혼동되는 것처럼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진리인지 아니면 정신차리고 열심히 자기 앞길을 찾아 세상사람처럼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내가 뭘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마치 꿈에서 깨어서 현실로 돌아 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느 것이 꿈인지 혼동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부른 찬송은 나로 하여금 어느 것이 꿈이며 어느 것이 현실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고, 나로 하여금 현실에 발을 딛도록 도와 주었다.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은 꿈일 뿐이며, 언젠가는 깨지게 될 삶의 방식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품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실상 나로 하여금 현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내가 도대체 뭘하고 있나?'라는 질문은 사탄이 던지는 유혹이며, 나로 하여금 멸망의 길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예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그런 것일 뿐이다.
이 새벽 나를 아시고 나를 위해 찬송을 예비하심으로 다시 주님을 붙잡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Posted at
오후 7: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