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나기 위해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한다."
일면 맞는 말이지만, 일면 완전히 틀린 말이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 생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도 동시에 생긴 사람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듭나기 전에는 그래도 나는 쓸만 한 사람. 의인이라고 자청하기는 쑥스럽지만, 악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고, 나쁜 짓을 했지만, 그래도 착한일을 더 많이한,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리 나쁜일을 많이 하지 않은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그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전에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반드시 그런 순서대로 되는 것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내 경우에는 거듭나기 전에 분명히 내 존재의 타락성과 부패성을 철저하게 자각했다. 내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인지를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깊은 절망도 맛 보았다. 그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정으로 구원이었고, 인간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성경은 분명히 진리였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이 모든 사람의 구원 경험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절대 아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구원 프로세스를 공식화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해야만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밑바닥은 복음을 영접한 후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 거룩하신 하나님, 흠이 없으신 그분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 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정도로 더럽고 벌레만도 못한 죄인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 그런 바닥 확인은 하나님을 만나고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가운데 깊은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경우처럼 특별하게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바닥확인은 당연히 거듭난 이후에 있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밑바닥 확인을 거듭남의 필수 요건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호도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나라는 인간이 특별히 교만하고, 자기 의에 가득차는 성향이 매우 강한 자이고, 내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교만한 자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낮추시고, 가망성 없는 내 모습을 직시하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지 않으면 안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부인이신 루스 그래함은 교회에서 태어나서 교회에서 자랐다. 그분은 자신의 죄성에 절망해서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한 극적인 경험이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언제 영접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은 물론이고 대충 어느 나이 정도에 영접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분은 분명 거듭난 자였고, 하나님의 자녀였다. 극적으로 회심을 경험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루스 그래함을 절대로 거듭나지 않은 자라고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믿음 안에 있는 자로서 평생을 같이 동역했고, 많은 열매를 맺고 크게 쓰임을 받았다. 루스 그래함이 태어나면서부터 믿음을 가졌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인생의 어느 시점에 분명히 구원 받은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구원 경험, 혹은 회심 경험은 나나 그분의 남편의 경험과는 다른 것이었다.(RC Sproul교수는 Conversion과 Conversion Experience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분에 따르면 그것을 혼동함으로써 많은 오류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가르친다. 나는 전적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가 그런 혼동가운데 있고 그래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그렇다고 그분을 믿음 없다고 정죄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맞게 구원의 역사를 배푸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죄인됨의 밑바닥을 반드시 경험해야한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
[펌]Growing into Salvation through the Living and Abiding Word of God (1 Peter 2:1-3)
지난 주 주일 우리 교회 설교 말씀이다.
지난 주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교회를 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다.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놀랐다. 지극히 성경적이고, 지극히 균형잡힌 그 말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신학적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기뻤다. 너무 감사했다. 이런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서...
http://highpointeaustin.org/archives/sermons/growing-into-salvation-through-1-peter-21-3
지난 주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교회를 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다.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놀랐다. 지극히 성경적이고, 지극히 균형잡힌 그 말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신학적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기뻤다. 너무 감사했다. 이런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서...
http://highpointeaustin.org/archives/sermons/growing-into-salvation-through-1-peter-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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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31:00
복음이란 무엇일까?
최근 한 달 사이에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청년부 지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세명을 우연히, 혹은 다른 관계로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수준이었다. 그 때까지 교회를 떠난 자로서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내가 떠나고 난 후 공동체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세명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그냥 지켜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결코 내가 그냥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오는 지체들을 결코 피하지 않기로 했고, 아주 가끔은 낙망 가운데 쓰러져 있는 지체들에게 다가갈 필요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만난 그들... 대부분 나를 만나기를 먼저 원해서 만났던 그들은 모두 절망과 깊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구원에 대해서 확신은 없었고, 절망과 온갖 어두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만나자 마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통 자신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믿음 생활을 듣기를 원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확신을 갖게한 교회가 알려준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나열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은 좌절해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었다. 이들 이후에 만난 모든 영혼들은 동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줬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는 그 무엇일 뿐이었고, 자신들은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형편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확신이 너무 강했다.
절망 가운데서 눈물을 보이는 그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가 그 지체들을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신의 죄와 부족한 부분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
절망스러운 자신의 모습... 죄가 끊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 자기 의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 믿음이 없이 연약해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
그렇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칼빈이 Total Depravity라고 인간의 상태를 정의했을 때, 그가 그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선한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그 존재 자체가 죄이고 악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절대 희망이 없다. 인간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를 죄로 유혹한 뒤, 그런 죄된 우리의 모습에 집중하게 하고, 거기에 눌려 있게하고,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마귀의 종으로 계속 살게 한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형편없는 존재, 벌레만도 못한 나같은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오셨고, 이 땅에서 "나를 위해서" 완벽하게 의로운 삶을 사셨고, "나를 위해서" 아니 "내 그런 더러운 죄, 아니 죄된 본성"을 짊어지시고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나님은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 죄를 지시고 달리신 그분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셨고, 그 결과 죄의 궁극적인 결과인 죽음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맛 보셔야 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시고, 나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지배를 받으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 이제는 죄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그런 영광스런 자리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그 복음은 분명 죄된 나의 모습을 보게 하지만, 그것이 절대 중심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 죄와 내가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저주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망밖에 없다. 그런 나를 보는 시선에서, 내가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나에게 철저히 절망하는 대신, 그분께 완전한 희망을 두는 것이 그것이 바로 복음이 아닌가?
정말 놀라운 것은... 정말 가슴아픈 것은...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그 소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한 채, 자신의 죄됨에만 너무 obssessed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도대체... 도대체... 뭘 배웠길래?
모든 지체들에게 내가 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뿐이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들은 그들이 보인 반응... 너무나 놀라는 그 반응... 눈을 번쩍 뜨는 그 반응...
솔직히 그 반응을 보고 내가 놀랐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 놀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그분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그 소식을 듣고, 그분께 모든 것을 집중하고 그분만 바라보라는 그 설명을 듣고, 그들이 놀랐다....
한 지체가 나를 만나고 나서 이메일을 보내 왔다. 사실 다음과 같은 메일은 그 지체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모든 지체들이 보이는 동일한 반응이었다.
"어제 들은 내용을 오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그 은혜... 내가 어떻게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그 십자가가 내것이라는 것을 정말 오랫만에 다시 깨닫게 되었고, 또 오랫만에 "예수님"의 이름이 나에게 저주가 아닌 구원의 이름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전 저에게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것 같아 너무나 기쁘고 정말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듯 하였습니다.
오늘 정말 오랫만에 말씀을 보며 너무 두렵더군요... 정말 그 말씀을 제가 제대로 받고는 있는지.. 라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가 필요한 말씀을 찾고 끼워 맞추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에 눈을 뜨게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해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주권은 하나님께 계시다는것을 잊고 있었고 초점은 그분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복음과 더불어 만난 모든 지체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공부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 그 자체라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판단 기준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나도, 어떤 인간도 교회도 아닌 성경이라는 것. 성경만이 진리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을 성경에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믿는 자의 바른 자세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나를 만난 이후 그들의 변화는 분명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고, 거룩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향한 열정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최근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나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지체들을 만나서 교회를 떠나라고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부터 오는 모든 연락에 반응하지 말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진 모양이다.
사실 내가 만났던 많은 지체 중에서 내가 교회를 떠나라고 권면한 지체는 한 명 뿐이다. 그 지체는 그것을 거부했고, 지금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나머지 지체 중 절반에게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그 교회에서 중요한 것들을 더 배울 것을 권면했고, 그 나머지 절반에게는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권면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교회를 떠나라고 한 것은 한 경우 빼놓고는 없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대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고, 그리스도였고, 말씀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는 내가 위험인물이고 기피해야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면, 참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는, 사랑하는 교회이다. 나는 그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복음 안에서 바르게 자라가는 것을 참으로 소망한다. 교회가 잘못되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복음이 바르게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소망이되고 중심이되고 생명이되고 기쁨이 되는 가운데, 모두가 십자가로 인해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만약 그런 내가 그들의 경계 대상이고 기피 대상이라면, 나로서는 할 말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Let it be! I don't care!"
나는 나를 찾아 오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그 일... 바로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두 세명을 우연히, 혹은 다른 관계로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수준이었다. 그 때까지 교회를 떠난 자로서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내가 떠나고 난 후 공동체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세명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그냥 지켜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결코 내가 그냥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오는 지체들을 결코 피하지 않기로 했고, 아주 가끔은 낙망 가운데 쓰러져 있는 지체들에게 다가갈 필요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만난 그들... 대부분 나를 만나기를 먼저 원해서 만났던 그들은 모두 절망과 깊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구원에 대해서 확신은 없었고, 절망과 온갖 어두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만나자 마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통 자신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믿음 생활을 듣기를 원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확신을 갖게한 교회가 알려준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나열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은 좌절해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었다. 이들 이후에 만난 모든 영혼들은 동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줬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는 그 무엇일 뿐이었고, 자신들은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형편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확신이 너무 강했다.
절망 가운데서 눈물을 보이는 그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가 그 지체들을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신의 죄와 부족한 부분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
절망스러운 자신의 모습... 죄가 끊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 자기 의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 믿음이 없이 연약해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
그렇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칼빈이 Total Depravity라고 인간의 상태를 정의했을 때, 그가 그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선한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그 존재 자체가 죄이고 악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절대 희망이 없다. 인간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를 죄로 유혹한 뒤, 그런 죄된 우리의 모습에 집중하게 하고, 거기에 눌려 있게하고,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마귀의 종으로 계속 살게 한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형편없는 존재, 벌레만도 못한 나같은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오셨고, 이 땅에서 "나를 위해서" 완벽하게 의로운 삶을 사셨고, "나를 위해서" 아니 "내 그런 더러운 죄, 아니 죄된 본성"을 짊어지시고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나님은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 죄를 지시고 달리신 그분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셨고, 그 결과 죄의 궁극적인 결과인 죽음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맛 보셔야 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시고, 나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지배를 받으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 이제는 죄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그런 영광스런 자리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그 복음은 분명 죄된 나의 모습을 보게 하지만, 그것이 절대 중심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 죄와 내가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저주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망밖에 없다. 그런 나를 보는 시선에서, 내가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나에게 철저히 절망하는 대신, 그분께 완전한 희망을 두는 것이 그것이 바로 복음이 아닌가?
정말 놀라운 것은... 정말 가슴아픈 것은...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그 소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한 채, 자신의 죄됨에만 너무 obssessed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도대체... 도대체... 뭘 배웠길래?
모든 지체들에게 내가 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뿐이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들은 그들이 보인 반응... 너무나 놀라는 그 반응... 눈을 번쩍 뜨는 그 반응...
솔직히 그 반응을 보고 내가 놀랐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 놀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그분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그 소식을 듣고, 그분께 모든 것을 집중하고 그분만 바라보라는 그 설명을 듣고, 그들이 놀랐다....
한 지체가 나를 만나고 나서 이메일을 보내 왔다. 사실 다음과 같은 메일은 그 지체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모든 지체들이 보이는 동일한 반응이었다.
"어제 들은 내용을 오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그 은혜... 내가 어떻게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그 십자가가 내것이라는 것을 정말 오랫만에 다시 깨닫게 되었고, 또 오랫만에 "예수님"의 이름이 나에게 저주가 아닌 구원의 이름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전 저에게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것 같아 너무나 기쁘고 정말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듯 하였습니다.
복음과 더불어 만난 모든 지체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공부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 그 자체라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판단 기준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나도, 어떤 인간도 교회도 아닌 성경이라는 것. 성경만이 진리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을 성경에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믿는 자의 바른 자세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나를 만난 이후 그들의 변화는 분명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고, 거룩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향한 열정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최근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나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지체들을 만나서 교회를 떠나라고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부터 오는 모든 연락에 반응하지 말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진 모양이다.
사실 내가 만났던 많은 지체 중에서 내가 교회를 떠나라고 권면한 지체는 한 명 뿐이다. 그 지체는 그것을 거부했고, 지금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나머지 지체 중 절반에게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그 교회에서 중요한 것들을 더 배울 것을 권면했고, 그 나머지 절반에게는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권면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교회를 떠나라고 한 것은 한 경우 빼놓고는 없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대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고, 그리스도였고, 말씀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는 내가 위험인물이고 기피해야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면, 참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는, 사랑하는 교회이다. 나는 그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복음 안에서 바르게 자라가는 것을 참으로 소망한다. 교회가 잘못되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복음이 바르게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소망이되고 중심이되고 생명이되고 기쁨이 되는 가운데, 모두가 십자가로 인해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만약 그런 내가 그들의 경계 대상이고 기피 대상이라면, 나로서는 할 말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Let it be! I don't care!"
나는 나를 찾아 오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그 일... 바로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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