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수련회를 앞두고...

오늘 오후 3시 30분부터 주일 오전 10시 30분까지 목자수련회를 갖는다.

어제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 다니며, 목자들을 먹일 음식재료를 준비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교회에 챙겨놓는 것, 그리고 목자 수련회 프로그램 책자를 만드는 것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목자수련회는 목자들을 위한 시간, 그들이 쉼을 얻고, 힘을 얻고, 도전을 얻고 재충전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들이 충분히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내 확고한 생각이다.

목자들...
2006년 10월 청년부 부장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목자들과의 개인 면담이었다. 한 사람 당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5시간 동안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그들을 통해 청년부를 파악했고, 또한 목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었다. 그 후, 내 청년부의 사역은 목자들이 중심이 되는 사역이었다. 목자들은 나와 한 몸이 되었고, 한 마음이 되었고, 그들을 깊이 사랑하며, 그들과 늘 함께하는 것이 내 사역이었다. 일상의 삶에서도 목자들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나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정도와 비슷하게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 훌륭한 목자들을 보내 주셨다. 대부분 나보더 더 훌륭하고, 내가 배울 점이 있는 지체들을 목자로 세워 주셨다.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영혼을 구원하고, 자라게 하는 그 사역을 같이 하는 것이 나에게는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면서도 즐거운 사역이었다.

목자 수련회 음식을 준비하면서, 예산 걱정을 하는 아내에게 "목자들을 잘 먹여야 하니까 돈은 걱정하지 말고, 먹이고 싶은 것은 마음껏 사도록 해!"라고 말해 주었다. 그것이 진정한 내 심정이다. 청년부의 영혼들을 직접 섬기고,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목자들이다. 청년부에 주어진 영혼들이 소중하다면, 그들의 목자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은 더더욱 소중한 지체들이다. 이것은 편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혼을 섬기는 일꾼들에 대해 당연히 가져야할 태도이다. 그들은 분명 특별한 존재들이다.

늦어도 올 겨울에는 논문을 마치고 졸업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목자수련회가 부장으로서 마지막 수련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나는 늘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산다. 아무리 사랑하는 지체들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내가 그들을, 혹은 그들이 나를 떠날 수 밖에 없는 것... 지난 달, 하나님께서는 내가 청년부 목자들에게 얼마나 깊이 감정적으로 attach되어 있는지, 사역면에서 얼마나 심하게 그들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러면서 질책하셨다. 그리고 이별을 준비하라고, 또한 주님만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이제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아니 그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 이런 훌륭한 목자들과 함께 사역하는 기쁨과 특권을 또 누릴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내 인생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섬기고 사랑하고 싶다. 주님께서 그들을 감정적으로, 사역면에서 과도하게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니지 않는가?

목자수련회에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사랑과 하나됨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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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하나...

시 하나...


THE LESSON

By Paul Lawrence Dunbar

My cot was down by a cypress grove,
And I sat by my window the whole night long,
And heard well up from the deep dark wood
A mocking-bird's passionate song.

And I thought of myself so sad and lone,
And my life's cold winter that knew no spring;
Of my mind so weary and sick and wild,
Of my heart too sad to sing.

But e'en as I listened the mock-bird's song,
A thought stole into my saddened heart,
And I said, "I can cheer some other soul
By a carol's simple art."

For oft from the darkness of hearts and lives
Come songs that brim with joy and light,
As out of the gloom of the cypress grove
The mocking-bird sings at night.

So I sang a lay for a brother's ear
In a strain to soothe his bleeding heart,
And he smiled at the sound of my voice and lyre,
Though mine was a feeble art.

But at his smile I smiled in turn,
And into my soul there came a ray:
In trying to soothe another's woes
Mine own had passed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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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ppo Jungle Song

프랑스에서 만든 에니메이션인 것 같은데...

하마가.. 정말 귀엽다..

묵상

(아래 내용은 오늘 아침 묵상노트에 적은 내용의 일부입니다.)

마 3:13-4:11

오늘 말씀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성령의 역할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시작점이 되는 침례사건--앞으로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위대한 사건--때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에 임하셨다.(3:16) 그리고 그 성령께서 처음으로 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로 이끄신 것이다.(4:1)

왜 그러셨을까? 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위에 임하신 직후에 그분을 광야의 시험으로 인도하셨을까?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셔야 할 미션들 중 하나가 첫째 아담의 죄와 실패를 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와 뱀의 대화로부터 인류의 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죄를 없이하려 오신 메시야로서 그 하와와 아담을 타락시켰던 뱀과의 대화로부터 다시 시작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이 시험을 극복하심으로써 타락직전의 에덴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 이후의 죄의 역사를 역사의 뒤안으로 밀어버리시고, 그 사이의 죄악의 역사를 봉합하여 처리하시고 죄 없는 인간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역사는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시기에 인간의 역사는 창조부터 시작되었으며 범죄 직전의 아담에서 멈추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광야시험으로 다시 재개되는 것이다. 그 사이의 역사는 죄악과 반역의 역사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중에 없어져야할 역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 세상의 역사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그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함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 역사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실패한 아담으로 인해 시작된 그 죄악의 역사 가운데 머물면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가운데 사라져버릴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분은 시험당하셨고, 그 시험을 완벽하게 이기셨다. 그것이 에덴의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담의 실패를 극복하셨을까?
침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사역을 시작하신 메시야로서의 예수님께서 하셔야 했던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과 하와의 죄를 극복하시는 과정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예수께서는 마귀로부터 오는 세 번의 시험을 그 말씀의 context를 제대로 이해하시고,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그 말씀을 context 안에서 사용하심으로써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것이 바로 하와가 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 그 말씀에 자신의 믿음과 신뢰를 얹어서 마귀에게 그 문장 그대로를--자기생각에 따른 변형없이--마귀에게 말했다면, 마귀를 결코 하와를 타락의 길로 인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나 하와에게만 요구되는 마귀 대응방식이 아니다. 오늘날을 사는 나에게도 동일한 것이 요구된다. 마귀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말씀의 능력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내가 죄의 유혹에 빠지고, 또 실제로 죄를 짓는 것은 바로 내 안에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동의, 그리고 믿음이 없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내 뜻대로 변형시키거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 시험을 받는 순간에 말씀을 떠올리기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가 말씀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신뢰함으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마귀는 더 이상 나를 죄로 인도하지 못한다.

주님의 역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놀랍고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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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탄생

지난 주일...
청년들과 함께 팔러에서 같이 식사하는 평소 때와는 달리, 한 형제님과 함께 작은 방에 마주 앉았다. 그분은 40대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에, 한국 최고의 회사에 다니는 분이고, 항상 진지하고, 진중한 분이다. 같은 목장에 속해 있는 나는 그 분과 약 2개월 정도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며칠 전, 그분께 같이 복음을 나누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복음과 말씀에 많은 관심을 보이던 그 분은 흔쾌히 동의하셨다. 지난 주일의 그 자리는 바로 그 복음을 나누는 자리였다. 둘이 마주 앉아서 약 네 시간 정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 동안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 죄, 그리고 죄사함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 전에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고,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있으신 것 같았다. 시종일관 진지하게 들으며 때로는 질문하며,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나누며 우리 두 사람은 복음에 점점 더 몰입하게 되었다. 두 딸을 가진 가장으로서의 공통점, 동시대를 살던 남성으로서의 공통점, 그리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지낸 젊은 시절의 공통점을 가진 우리는 많은 부분을 서로 공감하며 대화 할 수 있었다.

인생이 40줄이 넘어서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그 동안 쌓아온 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이미 구축한 상태이다. 따라서, 새로운 "정보"는 계속 받아들이지만, 그 정보를 처리하는 패러다임은 이미 거의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복음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 전에 알던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요구한다. 10대나 20대의 젊은이들에게는 그 패러다임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어렵지 않게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40대가 넘어가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없다. 특히 40년이 훨씬 넘도록 거부감을 가지고 배척해 오던 기독교의 복음을 나의 것으로 받는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분은 기적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복음을 나누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 문을 여시고 계시는 것을 깨달았다. 몇 번씩 확인하며 의미를 설명하며 전해진 복음... 그 복음을 다 들으시고, 모든 것에 동의하셨다. 예전에 왜 이런 내용을 들어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고 계셨다. 단지 때가 아니었을 뿐... 그리고 그것을 들을 귀가 없었을 뿐...
마지막에 영접기도문을 읽으며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를 다시 점검했다. 그분은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그분께 영접기도를 같이 하자고 묻는 대신, 그 동의가 지적 동의인지,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고백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분은 지적 동의는 분명한데,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고백인지는 스스로 점검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분께 얼마의 시간을 더 드리기로 했다.
나는 그분의 모든 관심사가 이제는 복음으로 맞춰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미 일을 시작하신 것을 보았다. 그래서 믿음으로 그분께 시간을 더 드릴 담대함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분 스스로가 복음을 자신의 입으로 분명하게 정리하고 가슴으로 시인하는 때가 곧 올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기적이다. 그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배척하고 하찮게 여기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새해 첫 주일,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해 들은 그 귀한 영혼이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받고, 주님 안에서 평강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시작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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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16

밥상에서..

(2006.02.22에 쓴 글)

저녁식사를 하러 집에 갔다.
아내가 준비한 저녁식사를 놓고 하연이, 예연이, 아내, 그리고 내가 둘러 앉아 식사를 같이했다.

예연이가 말했다.
(자랑스럽게)"나~~ 쓴약을 사자처럼 먹었어요~~" (번역하면 한국에서 지어온 보약을 꿀꺽꿀꺽 잘 마셨다는 뜻.)
"그~~래? 장~~하다 예연이!" (애들이 뭔가 자랑스러워 할 때에는 꼭 맞장구를 근사하게 쳐주어야만 한다...)

오손도손 모여 앉아 식사가 계속되자 점차 흐트러지는 아이들의 식사 자세...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아내의 협박... 하연이가 스시알이 묻어있는 밥이 싫다고 걷어내 버리자 아내는 으르렁 거리며 드디어 하연이로 하여금 먹게하고, 예연이는 손을 옷 속에 감추고 손이 없다면서 엄마에게 먹여달라고 어리광부리고..
식탁에서 옥신각신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아내와 예연이가 맞붙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음)
말 안듣는 예연이를 향해 갑자기 터진 아내의 일성.

"얘가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래~~~"
(나는 속으로 '엄마아빠 닮았지 누굴 닮아?'라고 중얼거리면서 계속 밥을 먹는다.)

노려보는 엄마를 아무 일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예연이의 간단 명료한 답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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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오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마 2:2-3)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오해 가운데 이 땅에 오셨고, 오해 가운데 사셨고, 그 오해 때문에(물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지만) 죽으신 분이시다.
동방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의 탄생에 대해 전해들은 헤롯과 예루살렘은 "소동"했다. 왜 그랬을까? 당연히 왕이 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왕, 즉 메시야는 어떤 존재인가?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

헤롯은 왜 탄생하신 메시야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것은 그가 "왕"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왕"이라는 단어를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자기 대신 왕으로 군림할 메시야를 두려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럴 가능성부터 없애버리고자 수 많은 아이들을 죽이는 잔학한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헤롯왕만 그랬을까? 사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극소수의 선지자급 신앙인들을 제외하고는 (혹은 그들조차도) 이 땅에 오신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인 왕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수 많은 이적들을 통해서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그가 메시야라는 징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가난과 억압에 고통스러워하던 민중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는 확증으로 받아들여졌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다윗과 같은 번영을 약속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징표로 여겨졌다. 민중들은 예수를 왕으로 모시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와 함께 군대를 결성하여 로마를 무너뜨리고 자주독립국가, 경제, 군사, 정치적으로 막강한 위대한 이스라엘 재건의 꿈을 이루고자 했다.

반면, 정작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정치적 메시야로 해석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몰려드는 군중들을 향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기적을 행하면서도 당신 자신의 정체성인 메시야됨을 드러내는 것을 극히 꺼리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환호하며 경배하는 자들 가운데서 곧 무너져 완전히 파괴될 예루살렘과 성전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민중들의 처참한 상황에 관심이 전혀 없으셨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분은 치유하셨고, 먹이셨고, 곤고한 그들을 가르치심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당신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민중들을 보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방황하는 것을 안타까와 하셨다. 그들이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분리된 처참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가슴 아파 하셨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죄인들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내면의 흑암 가운데 썩어들어가는 자아로 고통하는 죄인들도 있고, 양심에 화인맞아 아무런 감각이 없이 살아가는 죄인들도 있는, 모두가 죄인인 이 세상을 향하여 아픔을 가지고 계셨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신 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바로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의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예수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었다. 그들을 끝끝내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지 20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민중들이 갈망하던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포기 되었는가? 많은 에큐메니컬 진영의 운동들과 일부 교단이 추구하는 진보적 사회운동화된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혹은 표방하는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그 예수의 이미지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만족하실 것인가?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회정의와 사회적 약자의 복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중점을 두셨던 것인가?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모습인가?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보수진영, 그리고 복음주의 진영에서의 예수는 어떤가? 이 땅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충분히 인정되고 있는가? 개인주의화 되어버린 신앙, 물신주의, 기복주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신앙의 모습은 축소화되고 변형된 "정치적 메시야관"이 아닌가?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민중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당시의 소망이었다면,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잘 살고, 평안하며, '예수를 믿으니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예수를 좇아가는 것... 그것이 현대판 정치적이 왕으로 오신 예수를 모시는 모습이 아닌가?

예수님에 대한 오해... 그것은 사실상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던 것이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리고 그 이후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오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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