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에 비해 등치가 유난히 컸던 나... 항상 가장 크고 가장 무섭게 생겼다고 친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였지만, 그런 나를 어머니는 항상 걱정하셨다. 마음이 너무 여리다고... 이 험한 세상 살아가기에 너무 연약하다고... 남들이 들으면 말도 안된다고 할 것이고, 자기자식이라서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어머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안다... 어머님처럼 자식인 나를 잘 파악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약한 사람인지, 얼마나 두려움이 많은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쉽게 받는지, 약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의존적인지... 겉으로 보이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 내 안에 있다.
주님을 만난 후... 내 자신이 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내가 많이 변했다. 두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담대해질 수 있고, 상처를 쉽게 받는 내 자아는 여전하지만, 주님께서 방패가 되셔서 상처를 받지 않도록 도우시고, 감정적으로 연약하지만, 나를 굳게 세우셔서 강하게 하신다. 내 연약함은 그대로 있는데, 주님이 내 안에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강함을 경험하게 된다. 참으로 신기하다...
오늘 아침 한 형제를 멀리 떠나 보내기 위해 공항으로 함께 했다. 헤어지면서, 나의 연약함이 여전히 내 안에 있음을 느꼈다. 잠깐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해서 약해지는 감정...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감상적이 되려고 하는지... 잠깐 떠나 있는 것도 감당하지 못해서 약해지는 못난 내 모습... 그 때,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감정을 추스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인 이상 최선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 땅에서는 언제나 헤어짐의 아픔이 있지만, 천국에서는 그런 아픔이 없이 영원토록 같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
믿음은 소망을 낳고, 소망은 이 땅의 모든 아픔을 이길 힘을 준다. 세상에서 많은 소망이 있지만, 영원한 진리에 기반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지는 소망이 유일하다. 다른 모든 것은 물거품일 뿐...
나의 강함되시는 주님...
내 소망되시는 주님...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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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방금...
사랑하는 동역자의 아픔을 함께 했다.
바로 어제 참으로 어려운 일을 당한 그 지체...
어제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하루 종일 그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았다. 한숨이 절로 나오면서, 어떻게 위로할 방법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고,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오늘 같이 점심을 먹으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그는 믿음 가운데 담담하게 그 현실을 받아 들이고 있었고,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인생을 맡기는 믿음으로 이겨나가고 있었다.
믿음... 인생의 가장 어렵고 절망적인 순간에, 그에게서 피어나는 믿음의 열매는 참으로 아름다왔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어떤 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참으로 놀라왔다. 거센 폭풍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뒤집어지지 않는 커다란 배를 보는 것과 같았다. 믿음의 능력, 복음의 능력은 참으로 위대했다.
그 앞에서 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믿음에 대해서 거대한 말들을 쏟아붓는 나에게, 그와 비례한 믿음의 실재가 있는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줄 수 있는... 증거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믿음... 부끄럽다...
인생의 가장 힘든 이 시간에 주님을 붙잡는 그에게, 주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이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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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동역자의 아픔을 함께 했다.
바로 어제 참으로 어려운 일을 당한 그 지체...
어제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하루 종일 그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았다. 한숨이 절로 나오면서, 어떻게 위로할 방법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고,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오늘 같이 점심을 먹으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그는 믿음 가운데 담담하게 그 현실을 받아 들이고 있었고,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인생을 맡기는 믿음으로 이겨나가고 있었다.
믿음... 인생의 가장 어렵고 절망적인 순간에, 그에게서 피어나는 믿음의 열매는 참으로 아름다왔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어떤 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참으로 놀라왔다. 거센 폭풍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뒤집어지지 않는 커다란 배를 보는 것과 같았다. 믿음의 능력, 복음의 능력은 참으로 위대했다.
그 앞에서 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믿음에 대해서 거대한 말들을 쏟아붓는 나에게, 그와 비례한 믿음의 실재가 있는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줄 수 있는... 증거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믿음... 부끄럽다...
인생의 가장 힘든 이 시간에 주님을 붙잡는 그에게, 주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이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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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31:00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예수님 당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하나의 격언이었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그 때에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뜻의 격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격언,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그 격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다.
쟁기를 잡는 자는 밭에 고랑을 만드는 자이다. 그는 앞을 똑바로 보고 밭에 고랑을 내는 일이 집중해야 한다. 쟁기를 잡는 자가 자기 앞의 고랑에 집중하지 않고 뒤를 돌아 본다는 것은 일을 잠쉬 쉬거나 아니면 일을 하는 동시에 다른 일에 신경쓴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아니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자신의 유익과 내 삶의 목표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자세는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똑바로 앞을 보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Soli Deo Gloria"를 위해서 내 인생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에 전념하는 것이다. 내가 일상의 삶에서 무엇을 하든지, 누구와 있든지 간에 오로지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SDG의 쟁기를 잡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며, 주변의 세상을 바라보거나, 롯의 아내처럼 유황불에 심판을 받고 있는 소돔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여기서 "합당하다"라는 말은 "적합하다" "순응하다"라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 적합할 것인가?
일상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쟁기를 붙잡고 살아가는 가운데, 내 시선, 내 관심, 내 삶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보게 된다.
"Soli Deo Gloria"인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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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하나의 격언이었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그 때에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뜻의 격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격언,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그 격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다.
쟁기를 잡는 자는 밭에 고랑을 만드는 자이다. 그는 앞을 똑바로 보고 밭에 고랑을 내는 일이 집중해야 한다. 쟁기를 잡는 자가 자기 앞의 고랑에 집중하지 않고 뒤를 돌아 본다는 것은 일을 잠쉬 쉬거나 아니면 일을 하는 동시에 다른 일에 신경쓴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아니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자신의 유익과 내 삶의 목표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자세는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똑바로 앞을 보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Soli Deo Gloria"를 위해서 내 인생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에 전념하는 것이다. 내가 일상의 삶에서 무엇을 하든지, 누구와 있든지 간에 오로지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SDG의 쟁기를 잡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며, 주변의 세상을 바라보거나, 롯의 아내처럼 유황불에 심판을 받고 있는 소돔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여기서 "합당하다"라는 말은 "적합하다" "순응하다"라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 적합할 것인가?
일상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쟁기를 붙잡고 살아가는 가운데, 내 시선, 내 관심, 내 삶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보게 된다.
"Soli Deo Gloria"인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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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18:00
"This is very good..."
"This is very good, Kwangjin!"
방금 전에 한 교수에게서 받은 메일의 첫 문장이다.
내가 쓰고 있는 논문은 미국학과 역사학 교수들 뿐만 아니라, 미국문학과 경영학과의 교수들의 도움이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논문이다. 미국학의 연구 방법론의 특징이 interdisciplinary이기 때문에 여러 전공을 이용하여 하나의 현상을 설명해내야 한다.
여러 전공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자신없는 전공이 경영학이다. 학부 때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전공이다. 2003년 가을학기 때, 경영대 대학원 수업인 Organizational Behavior를 딱 한 번 들었을 뿐이고, 그 때 교수였던 한 교수를 내 논문 committee에 초대하여 위원이 된 후, 그분이 준 방대한 양의 논문을 혼자 독학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교수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가며 공부한 것이었지만, 워낙 기초가 없고, 특히 통계가 핵심인 그 전공에서 통계적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공부를 해야했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다.
문제는 내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이론이 바로 경영학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 경영학의 이론을 활용하여 문학 작품들을 분석하고, 그 분석과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결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내 논문의 큰 방향이다. 만약 이론이 문제가 생기면 논문은 완전히 와해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어떤 미국학자도 이런 시도를 해 본적이 없다. 미국학과 내의 교수들이 내 논문의 방향을 보면서, 만약 성공한다면 true interdisciplinary한 논문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런 자신없는 분야, 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분야의 여러 이론이 내 논문에 필요한데, 그 중 하나의 분야인 "What is organization?"이라는 부분의 논문과 책을 읽고 나름대로 정리한 후 내 이론을 거기서 도출해 냈다. 글의 길이는 더블스페이스의 12포인트로 네장 반. 어찌보면 마음먹고 쓴다면 반나절이면 쓸 수 있을 것 같은 짧은 이 글을 만들어 내는데, 작년 가을과 올해 초 몇 달이 소요되었다. 알지 못하는 분야를 이해해야 했고, 읽어야 했고,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문제를 지적해야 했고, 또한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 작업을 마친 후, 교수에게 그 짧은 글을 보내서 feedback을 부탁했다. 그 교수는 경영학 내에서 전 미국에서 유명한 학자이고, 그 분야의 최고 저널의 editor이기도 한 분이다. 오래 공부하긴 했지만, 문외한인 내가 정리한 글을 그 대학자에게 읽게 한다는 것이 부담이 매우 크긴 했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을 분이 그분 밖에 없어서 용기를 내어 글을 보냈다.
약 3주가 지난 후... 오늘 그 글에 대한 답변을 받은 것이다.
"This is very good, Kwangjin! I think it's entirely appropriate ...."
교수로부터 답을 기다렸지만 (그분은 현재 경영대의 associate dean으로 일하기 때문에 정말 바쁜 분이다.) 답이 없어서, 일단 더 기다리지 않고 그 이론을 작품 분석에 적용해 나가기로 하고 글을 쓰고 있었다. 만약 내 글에 대해 딴지가 걸리고 수정을 많이 해야 한다면, 그 동안 분석해 나갔던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시작해야하는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도리가 없어서 글을 계속 써 내려갔다. 그런데, 오늘의 답장은 내가 아무런 수정이 없이 그대로 진행을 시켜 나가도 된다는 싸인인 것이다.
참 기뻤다...
이 교수를 만나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 Oral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 논문 Committee를 구성하는 과정, 논문을 쓰는 과정...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인도하셔서 나로 하여금 이 논문을 마칠 수 있도록 주장하시는 것을 본다.
솔직히... 나는 너무나 거대한 이 논문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거나 끝마칠 능력이 없는 자이다. 누구보다도 내 스스로가 그것을 너무 잘 안다. 기적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마칠 수 없는 이 논문... 그런데 지금까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내가 갈 수 없는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나로 하여금 그냥 가게 하시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논문을 쓰는 이 과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을 보는 과정이다. 참으로 dynamic한 인생의 경험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그분의 능력을 즐기는 무능력한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있기를 원하시는 그 자리에 있으련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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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한 교수에게서 받은 메일의 첫 문장이다.
내가 쓰고 있는 논문은 미국학과 역사학 교수들 뿐만 아니라, 미국문학과 경영학과의 교수들의 도움이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논문이다. 미국학의 연구 방법론의 특징이 interdisciplinary이기 때문에 여러 전공을 이용하여 하나의 현상을 설명해내야 한다.
여러 전공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자신없는 전공이 경영학이다. 학부 때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전공이다. 2003년 가을학기 때, 경영대 대학원 수업인 Organizational Behavior를 딱 한 번 들었을 뿐이고, 그 때 교수였던 한 교수를 내 논문 committee에 초대하여 위원이 된 후, 그분이 준 방대한 양의 논문을 혼자 독학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교수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가며 공부한 것이었지만, 워낙 기초가 없고, 특히 통계가 핵심인 그 전공에서 통계적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공부를 해야했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다.
문제는 내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이론이 바로 경영학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 경영학의 이론을 활용하여 문학 작품들을 분석하고, 그 분석과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결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내 논문의 큰 방향이다. 만약 이론이 문제가 생기면 논문은 완전히 와해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어떤 미국학자도 이런 시도를 해 본적이 없다. 미국학과 내의 교수들이 내 논문의 방향을 보면서, 만약 성공한다면 true interdisciplinary한 논문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런 자신없는 분야, 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분야의 여러 이론이 내 논문에 필요한데, 그 중 하나의 분야인 "What is organization?"이라는 부분의 논문과 책을 읽고 나름대로 정리한 후 내 이론을 거기서 도출해 냈다. 글의 길이는 더블스페이스의 12포인트로 네장 반. 어찌보면 마음먹고 쓴다면 반나절이면 쓸 수 있을 것 같은 짧은 이 글을 만들어 내는데, 작년 가을과 올해 초 몇 달이 소요되었다. 알지 못하는 분야를 이해해야 했고, 읽어야 했고,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문제를 지적해야 했고, 또한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 작업을 마친 후, 교수에게 그 짧은 글을 보내서 feedback을 부탁했다. 그 교수는 경영학 내에서 전 미국에서 유명한 학자이고, 그 분야의 최고 저널의 editor이기도 한 분이다. 오래 공부하긴 했지만, 문외한인 내가 정리한 글을 그 대학자에게 읽게 한다는 것이 부담이 매우 크긴 했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을 분이 그분 밖에 없어서 용기를 내어 글을 보냈다.
약 3주가 지난 후... 오늘 그 글에 대한 답변을 받은 것이다.
"This is very good, Kwangjin! I think it's entirely appropriate ...."
교수로부터 답을 기다렸지만 (그분은 현재 경영대의 associate dean으로 일하기 때문에 정말 바쁜 분이다.) 답이 없어서, 일단 더 기다리지 않고 그 이론을 작품 분석에 적용해 나가기로 하고 글을 쓰고 있었다. 만약 내 글에 대해 딴지가 걸리고 수정을 많이 해야 한다면, 그 동안 분석해 나갔던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시작해야하는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도리가 없어서 글을 계속 써 내려갔다. 그런데, 오늘의 답장은 내가 아무런 수정이 없이 그대로 진행을 시켜 나가도 된다는 싸인인 것이다.
참 기뻤다...
이 교수를 만나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 Oral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 논문 Committee를 구성하는 과정, 논문을 쓰는 과정...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인도하셔서 나로 하여금 이 논문을 마칠 수 있도록 주장하시는 것을 본다.
솔직히... 나는 너무나 거대한 이 논문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거나 끝마칠 능력이 없는 자이다. 누구보다도 내 스스로가 그것을 너무 잘 안다. 기적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마칠 수 없는 이 논문... 그런데 지금까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내가 갈 수 없는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나로 하여금 그냥 가게 하시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논문을 쓰는 이 과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을 보는 과정이다. 참으로 dynamic한 인생의 경험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그분의 능력을 즐기는 무능력한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있기를 원하시는 그 자리에 있으련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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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