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3

(2004.12.02일에 있었던 일)

아침에 큰 딸을 깨웠다. 학교에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내 큰 딸은 미국나이로 네 살이다. 몇 개월 후면 다섯살이 된다. 요즘은 Pre-K에 다니고 있는데, 8시 30분까지 학교에 도착해야 한다.)

부시시 눈을 뜬 큰 딸...

아빠를 보더니 안아달라고 했다. 요새 부쩍 커버린 애를 보면서 갓난 아기 때가 생각이 나서 번쩍 들어 안았다.

아빠의 가슴에 파고들면서 편하게 안기는 딸을 보면서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그 때... 큰 딸이 물었다.

"아빠!"

"왜?"

"근데 아빠는 다리도 안긴데 왜 키가 이렇게 커요?"

"....... 응... 그건.... 허리가 길기 때문이야..."

"예....."

하나님 아버지...

하연이와 예연이가 더 어렸을 때, 아빠는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맨이었다.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애들이 뭘 물어 보면 항상 아빠는 답을 알고 있었고, 그 때마다 아빠에 대해서 감탄했다. 그럴 때면 나도 장난으로 "I KNOW EVERYTHING!!!"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고, 아이들은 감탄과 존경의 찬사를 보내곤 했었다.

이제 9살과 7살이 된 지금... 아이들에게 아빠는 더 이상 만능맨이 아니다. 아이들이 이미 아빠의 한계를 보았고, 아빠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지는 좀 되었다.
나는 여전히 장난스럽게 "I KNOW EVERYTHING!!!"이라고 외치며 주장한다. 그럴 때면 예연이가 말한다. "No!" 그리고 나서 내가 모를 만한 질문을 한다. 예를 들어 같은 반 친구 여자애의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를 묻는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든다.
하연이는 좀 다르다. 이제 내 장난스런 주장에 별 관심을 안 기울인다. 나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간단하게 "No, you don't."라고 말하고 끝이다. 그런 실없는 소리 그만 하라는 듯한 태도...
이제 언젠가 아이들이 더 크면, "I KNOW EVERYTING!!"이라고 여전히 외치는 아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Yes!"라고 그냥 맞장구 쳐줄 날이 오겠지...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아빠의 한계를 점점 더 보게 되고, 아빠가 온전히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능력과 지식에서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도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그들에게 있어서 아빠의 존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져 갈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그 반대이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과 만나고 관계를 맺었을 때, 하나님은 사실 관념의 하나님이었고,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분이었다. 내 머리속에서 알고 인정한 것과는 별개로 내 삶 속에서 그분께 아주 사소한 것도 믿고 맡길 수 없었고, 그분이 전지 전능하다는 것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을 점점 알아 갈수록, 그리고 영적으로 성숙해 갈수록,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 그분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경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믿음 안에서의 성숙은 그 아버지를 점점 더 깊이 알아가고 경험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우리 아이들이 아빠인 나를 점점 더 알아가면서 그 부족함을 보고 한계를 보는 것과는 정반대로, 알면 알수록 더 위대하시고, 더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임을 깨닫게 된다. 그 가운데, 우리 아이들이 커 갈수록 아빠로부터 독립해가는 것과는 정반대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점점 더 의존적이 되며, 그분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삶, 그 분께 완전히 내 삶을 맡기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믿음 안에서의 성장이다.

오늘 저녁, 잠자리에 드는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그 아이들을 재우면서, 나의 아빠되신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며 감사드린다.

구원받는 믿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만 하셨다면, 믿는 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훨씬 편할텐데... 성경이 다른 곳에서 자주 말씀하는 것처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며,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시고 끝나셨다면, 지금 참 편안하게 믿음생활을 하고 있을텐데...

예수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구원을 얻는 길을 여신 분이고, 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값 없이 은혜로 주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이 값싼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 쉽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점이 현대 기독교에서 가장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사도는 말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5) 논리적으로 본다면 이 명제의 대우인 "세상을 이기는 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이다"는 참된 진리가 된다. 다시 말하면, 내가 믿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믿음을 가진 자라면, 그래서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거주하시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자라면,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이다.
예수께서 "내게서 떠라가라!"고 하신 그 불행한 무리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하는 그들의 항변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행위와 열정이 그들의 구원의 보증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판단은 다르다. 구원을 받는 자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하시는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종교적 행위들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성경에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는 몇 가지 구절들이 있다. 마 11:26, 마 18:14, 요 6:40 등에서는 하나님께서 한 영혼--아무리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형편없는 영혼이라 할지라도--이라도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 하지만 그것이 교만한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함"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뜻은 1차적으로는 예수께서 그 직전까지 하셨던 산상수훈의 모든 교훈이다. 이 산상수훈을 보다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5장의 핵심구절이 바로 16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세상에서 살다보면, 특히 그리스도인으로 살다보면 참으로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는다. 불교에서 인생의 근본상태를 "고통"이라고 진단한 것은 너무 정확한 진단이다. 인생은 온갖 고통과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고통과 문제의 연속인 인생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기쁨과 감사의 원천이 되며,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기도로 나아가 우리의 문제와 고통을 아뢸 수 있는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시다. 내 문제와 내 고통이 바로 그분의 문제와 고통이 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문제들을 그분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얼마든지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다.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슥 13:9a) 믿음 안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확신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그 믿음을 시험하신다. 때로는 결혼/진로의 문제, 때로는 인간관계의 고통,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 가족을 잃는 고통 등등...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자들은 그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단련되며,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지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며, 하나님께 더욱 기도로 나아가며, 그분만을 의지하는 가운데, 믿는 자에게 주어진 기쁨과 감사가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자들이다. 반면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 시험을 견디지 못하여 그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소위 "믿음"이라고 했던 것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으며, 그 문제/고통에서 빠져 나오려고 스스로 안간힘을 다한다. 그들이 평소에 스스로 예수께서 자신들의 하나님이고 구원자라고 고백했지만, 막상 닥친 그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예수는 결코 구원자가 아니며 자신들의 피할 바위가 되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 드러나게 된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18-2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자는, 결국 그 마음의 중심에, 다시 말하면 그 존재의 한 가운데서 붙잡고 살았던 우상을 내려 놓고, 그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린 자들이다. 다시 말해, 말씀의 뿌리가 그 심령의 중심까지 뿌리를 내린 자들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책망하셨던 우상숭배의 습관을 완전하게 처리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순간, 그 모든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선한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 때문에 나는 세상을,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삶의 원리와 세상의 문제해결 방법과 세상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완전히 포기하고, 천국의 가치와 하나님의 삶의 원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삶의 목표가 생기게 된다. 그것이 믿는 자의 진정한 모습이고, 그것이 믿음생활이다. 이 시대에 이런 믿음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그리스도가 주인되신 삶 2

내가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참으로 여러 가지로 진단해 볼 수 있다. 그 대부분의 방법들은 이미 많이 소개되고 있고, 많이 알려져 있다. 나는 오늘 약간은 색다른 방법으로 내 삶에 그리스도가 진정한 주인이 된 삶인지를 점검하는 법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진정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 "믿는 자"인가? 그것은 내가 속한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 목적,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인가, 아닌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회 공동체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사랑해서 모이는 것 같지만, 실상 그 목적과 동기는 천차 만별이다.
사람이 그리워서, 뭔가 배우기 위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소위 "은혜"라는 것을 소망하며, (제자)훈련을 받기 위해서, 말씀을 더 배우기 위해서, 사업상 필요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이성과의 만남을 위해, 재미를 위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병을 낫기 위해, 리더십을 배우기 위해, 담임 목사님(혹은 공동체의 리더)을 존경하기 때문에, 주일 말씀이 좋아서,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등등...

그 모든 이유가 반드시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 많은 이민교회에서 교회가 갈라지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런 일들이 생길까? 내가 소속된 교회는 분열과 갈등이 있지 않지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날까? 아니, 그 이전에, 그들은 왜 교회에 나왔었을까?
많은 경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은 형제자매들과 교제에서 오는 상처들, 그리고 특히 담임목사님이나 공동체의 리더와의 갈등 때문에 떠난다. 상처를 받았거나, 자신을 인정해 주지(혹은 이해해주지) 않는다거나,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자신과 의견과 입장이 다르다거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일반 교인들과 그런 갈등을 겪는 경우에도 교회를 떠나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리더나 담임목사님과 그런 문제가 생긴다면, 많은 경우 교회를 떠나거나 공동체에 나오지 않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공동체에 속했던 것일까? 그들이 그 교회에 출석하고 공동체에 소속되게 만든 가장 중요한 factor가 뭐였을까? 만약 그것이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특히 공동체의 리더나 담임목사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그 다른 것이 그 사람들을 그 공동체에 붙어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면, 그들이 교회나 공동체를 떠날 수 있을까?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내가 교회 혹은 신앙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공동체에 속해 있는 이유, 내가 공동체에 출석하고, 그 안에서 교제하는 이유는, 아니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여야만 한다. 나를 공동체에 붙어 있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공동체의 주인인 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공동체에 성령으로 역사하는 한에 있어서는 내가 그 공동체를 떠날 이유가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형제자매들과 갈등이 있어도, 그 공동체에서 나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심지어 공동체의 리더 혹은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갈등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교회를 떠날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삶/신앙생활/교회생활이다.
그것을 다른 면에서 본다면, 내가 교회나 신앙공동체 안에서 추구해야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그 곳에서 의지해야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공동체 안에서 섬기는 이유, 내가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는 이유, 내가 찬양하는 이유, 내가 기도하는 이유, 내가 정해진 시각에 모임에 출석하면서 가장 기대하는 바, 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한다면, 나를 공동체로 이끌고 붙어있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부에 있는 지체들 중에서 나와의 관계를 힘들어 하는 지체들이 몇 명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 나를 좋아하고 나를 신뢰하며 따르는 지체들이 많이 있다. 그 어느 경우이든 간에, 청년부의 리더인 나와의 관계가 청년부의 진정한 주인이고 리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거나 영향을 끼쳐서는 결코 안 된다. 리더인 나를 너무 좋아하고 의지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뒷전으로 밀린다면, 그것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또 나와의 관계 때문에 공동체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분 안에서 풍성하게 은혜를 누리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도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는 자는, 그 신앙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앙생활의 기반이요, 방법이요, 최종 목적이 되는 자이다. 그런 자는 공동체 생활 가운데 인간관계로 인해서 상처받는 것 때문에 함부로 공동체를 떠난다거나, 공동체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구한다거나, 모든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 외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한 자이며, 그 모든 삶이, 특히 교회와 공동체에서의 삶이 Coram Deo(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자이다.

보물2

(2004년 11월 27일에 있었던 일)

애들을 차에 태우고 자주 밖을 다닌다. 두 애들은 뒷자리의 보조의자에 앉아서 자기들만의 대화시간을 갖는다. 때로는 그 대화를 듣는 도중에 웃느라 운전에 심각한 지장을 받을 때도 있다.

어제, Thanksgivng day 세일기간이라 여기저기 쇼핑을 하러 돌아다녔다. 저녁에 쇼핑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데, 좀 피곤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 뱉었다.
"휴, 산다는게 뭔지..."
큰 애가 뒤에서 그 말을 들었나보다.
"아빠, 뭐라 그랬어요?"
"응~~, 아니야..."
"나는 들었는데... 으히히히..."
"뭐?"
"나도 들었다고요.. 으히히히히..."
"아빠가 뭐라고 그랬는데?"

"산타가 뭔지... 그랬잖아요? 으히히히..."

크리스마스가 가까왔나보다... 사랑스런 애들에게 뭘 사줄까?

그리스도가 주인되신 삶 1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복음을 깨달아 나가는 과정, 즉 복음이 내 삶에 실재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물론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를 나의 주(하나님)로, 그리고 나의 구원자로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지만, 그 이후의 과정은 이미 내가 고백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 깨달아가고, 그것이 내 삶의더 많은 영역에서 진리로 인정되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현대 교회에서 복음은 하나의 통과 의례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죄인됨의 고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의 통과 의례가 되어버렸고, 그 이후의 삶,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마치 복음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나도 간단해 보이는 복음의 내용이 삶 가운데 온전히 뿌리내리고 실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평생을 걸쳐 일어나는 것이며, 평생 배워야하고 힘써야 하는 것이다. 내 모든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지고,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현장, 내 삶의 그 자리에서 "주인"으로 "하나님"으로 "구원자"로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기독교는 도덕론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더 착한 사람, 더 좋은 사람, 심지어 교양인을 만들어 내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었으며,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만 사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삶으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셨다면,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감정과, 나의 모든 욕구가 바로 그분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바른 의미이며,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것의 바른 의미이다.
기독교는 삶의 원리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실재에 관한 것이다. 바르게 사는 법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이 나를 완전히 주장하시도록 하는 것을 배우는 진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 관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내 삶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인격체"로서 나와 늘 관계를 맺으며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분을 더 알아 나가고, 닮아 나가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다. 그리고 복음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구체적인 교제가 있을 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산" 지식이 된다. 성경을 지식적으로 더 많이 알아 나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 문화에 더 익숙해 가는 것이 아닌, 진리가 되는, 생명을 살리는 그 지식이 내 안에 쌓여가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살아계시는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음성"이 되며, 기도가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신비의 시간이 된다.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이요 종착점이요,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놀랍고도 신비한 선물은 바로 그 복음이다.

복음은 한번 내 입에서 나왔다고, 처리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내 평생에 복음을 붙잡고, 복음 만을 진리로 여기고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복음을 값싼 천국행 티켓 정도로 가볍게 취급되는 현대 교회에 울리는 하나님의 경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