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저녁 8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수요일 오전에 학교 보건소의 lab에서 검사를 받아야 해서... 아침을 유난히 많이 먹는 나로서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의사가 내 나이 때에는 피검사를 해야 한다고 해서 참았다.
수요일 아침 9시에 보건소에 도착해서 피검사와 오줌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도서관으로 돌아 와서 그날 점심과 저녁으로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다 먹어 버렸다.... 한꺼 번에... 그날 하루 종일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나에게 아침 식사가 이렇게 중요한지 미쳐 몰랐었다.
그리고 어제 보건소의 의사로부터 아래와 같은 통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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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Kwangjin Lee:
all your labs are normal.
Sincerely,
Elena V. Stephens,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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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이상했다. 아무 이상 없다는 소식인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밥 굶고, 허기를 참아가며, 시간을 내가면서 가서 한 것에 대한 보상이 겨우 이건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몸 어딘가에 비정상적인 것을 발견했다는 통보라도 와야 제대로 보상을 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기분...
때로는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일 수 있는지를 본다. 그리고 감정과 느낌에 의존하는 삶이 얼마나 misleading한 것인지도 보게된다. 내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느낌을 의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과 행동과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는 결코 나를 허탄한 곳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기뻐해야할 소식을 듣고, 기분나빠하는 나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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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했던 것들과의 이별
인생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다.
어릴 때는 이별보다는 만남이 더 많고, 모든 것을 새롭게 접해야 하는 때라면, 인생의 중반에는 만남과 이별이 비슷한 비율로 일어나며, 노년으로 갈수록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내 나이는 어느새 이별 더 많아지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 동안 익숙했던 것과 많은 이별을 했다. 그리고 이제 머지 않아 중요한 이별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그 이별을 맞이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슬프다.
이제는 이별에 많이 익숙해질 때도 되었으련만... 이별은 언제나 힘들다. 그것은 그 만큼 그 "익숙했던 것"에 내 마음과 사랑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는 이별보다는 만남이 더 많고, 모든 것을 새롭게 접해야 하는 때라면, 인생의 중반에는 만남과 이별이 비슷한 비율로 일어나며, 노년으로 갈수록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내 나이는 어느새 이별 더 많아지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 동안 익숙했던 것과 많은 이별을 했다. 그리고 이제 머지 않아 중요한 이별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그 이별을 맞이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슬프다.
이제는 이별에 많이 익숙해질 때도 되었으련만... 이별은 언제나 힘들다. 그것은 그 만큼 그 "익숙했던 것"에 내 마음과 사랑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인생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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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2:13:00
그래도 글을 쓰는 이유...
고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집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기타를 치면서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감정에 깊게 몰입한 상태에서 내 나름대로는 멋드러지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좋아하는 곡들을 부르며 스스로 감격해 하며 즐기고 있을 때, 옆 방에 있던 동생이 다가 왔다. 한참을 쳐다본 후에 하는 말...
"형... 지금 형은 정말 멋지게 노래 부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
"그런데 듣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좀 알아 줬으면 좋겠네...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공해도 이만저만한 공해가 아니야..."
"......"
"이제 그만하소!"
평소에 바로 윗 형인 나에게 꼼짝을 못하는 동생인지라, 그가 하는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남에게 들려 주려고 노래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의 너무나 솔직한 말에 더 이상 노래부를 용기가 사라졌다. 그 후로 기타는 거의 잡아본 적도 없고, 노래는 혼자 있을 때만 그것도 최대한 조용히 부른다...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언젠가부터 인테넷의 한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동생을 생각한다. 또 조용히 다가와서 한 마디 하지 않을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생에게는 좀 읽으라고 그렇게 권해도 시간 없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이 노래할 때, 그것이 공해가 되듯이, 글 못 쓰는 사람이 글을 써댈 때 그 글을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피해가 될까? 내가 써대는 글들을 읽으면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짜증이 난다면...
글을 쓸 때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난 뒤에 다시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나에게 참으로 글쓰는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동생이 어느날 불쑥 전화해서 "형... 인터넷에 있는 글 말이야..."라고 말을 꺼내며 구박을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기타치는 것을 그치고 조용하기로 작정했던 것처럼, 글쓰기를 그만 두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감상하며 즐기는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지...
하지만, 내 글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글쓰기를 지속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내 글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 블로그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그들조차도 거의 들어 오지 않는다. 노래는 듣기 싫은 사람도 들을 수 밖에 없지만, 글은 와서 읽는 사람에게만 피해를 줄 수 있다.(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2. 내 글은 내가 만들어 낸 글이지만 그 내용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의 경험이다. 비록 포장이 매우 엉망일지언정, 그 내용물은 보석과 같은 것이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망각의 천재인 나로서는,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는 것들이다. 내 머리속으로부터 미끄러져 망각의 세계로 떨어지려는 그 보물들을 묶어 놓는 수단이 바로 글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 삶의 작은 경험들, 지식들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3. 머릿속에 맴도는 모호한 생각이나 은혜, 혹은 묵상은 대부분의 경우 글을 씀으로써 더 분명하게 정리가 된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입혔을지 모르지만, 글쓰기를 통해서 그 동안 내 자신에게 많은 유익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글쓰기를 지속하련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해서...
내 노래는 그쳤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한... 내 글은 지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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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기타를 치면서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감정에 깊게 몰입한 상태에서 내 나름대로는 멋드러지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좋아하는 곡들을 부르며 스스로 감격해 하며 즐기고 있을 때, 옆 방에 있던 동생이 다가 왔다. 한참을 쳐다본 후에 하는 말...
"형... 지금 형은 정말 멋지게 노래 부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
"그런데 듣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좀 알아 줬으면 좋겠네...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공해도 이만저만한 공해가 아니야..."
"......"
"이제 그만하소!"
평소에 바로 윗 형인 나에게 꼼짝을 못하는 동생인지라, 그가 하는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남에게 들려 주려고 노래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의 너무나 솔직한 말에 더 이상 노래부를 용기가 사라졌다. 그 후로 기타는 거의 잡아본 적도 없고, 노래는 혼자 있을 때만 그것도 최대한 조용히 부른다...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언젠가부터 인테넷의 한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동생을 생각한다. 또 조용히 다가와서 한 마디 하지 않을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생에게는 좀 읽으라고 그렇게 권해도 시간 없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이 노래할 때, 그것이 공해가 되듯이, 글 못 쓰는 사람이 글을 써댈 때 그 글을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피해가 될까? 내가 써대는 글들을 읽으면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짜증이 난다면...
글을 쓸 때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난 뒤에 다시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나에게 참으로 글쓰는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동생이 어느날 불쑥 전화해서 "형... 인터넷에 있는 글 말이야..."라고 말을 꺼내며 구박을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기타치는 것을 그치고 조용하기로 작정했던 것처럼, 글쓰기를 그만 두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감상하며 즐기는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지...
하지만, 내 글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글쓰기를 지속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내 글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 블로그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그들조차도 거의 들어 오지 않는다. 노래는 듣기 싫은 사람도 들을 수 밖에 없지만, 글은 와서 읽는 사람에게만 피해를 줄 수 있다.(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2. 내 글은 내가 만들어 낸 글이지만 그 내용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의 경험이다. 비록 포장이 매우 엉망일지언정, 그 내용물은 보석과 같은 것이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망각의 천재인 나로서는,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는 것들이다. 내 머리속으로부터 미끄러져 망각의 세계로 떨어지려는 그 보물들을 묶어 놓는 수단이 바로 글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 삶의 작은 경험들, 지식들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3. 머릿속에 맴도는 모호한 생각이나 은혜, 혹은 묵상은 대부분의 경우 글을 씀으로써 더 분명하게 정리가 된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입혔을지 모르지만, 글쓰기를 통해서 그 동안 내 자신에게 많은 유익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글쓰기를 지속하련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해서...
내 노래는 그쳤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한... 내 글은 지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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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47:00
마귀의 시험
창조 후 모든 것이 완벽한 그 때에, 마귀는 인간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하나님이 여기 있는 모든 나무의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이 질문... No라는 답변을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이 질문.
속이기의 명수, Rhetoric의 대가, 사람을 넘어뜨리는 데 선수인 마귀가 왜 그리 무식한 질문을 들고 인간에게 접근했을까?
이 질문은 언뜻 보는 것과 같이 그리 단순하고 무식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과하신 단 한 가지의 제한/금지 명령에 인간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제한적" 존재인 자기 자신을 불만스럽게 바라보게하는 효과를 노린 고단수의 질문이었다.
마귀의 의도대로 인간은 하나님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와의 답변 속에 그려지는 하나님은 금지 명령을 과도하게 내리는 폭군으로,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매우 관심을 깊이 보이는 존재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마음이 이미 그 안에 생겨난 것이다.
그것을 본 마귀는 "네가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분의 권위를, 더 나아가 그분의 하나님됨을 부인하도록 초청한다. 인간은 그 초청에 기꺼이 응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죽음의 길을 가고야 만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팔레스타인의 한 광야. 침례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신 직후 예수님께서 광야로 내몰리셔서 시험을 당하신다. 40일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한 예수님. 마귀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시험한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 당신이신 그분을 시험하여 쓰러뜨리려고 획책하는 마귀... 그가 역사 속에서 자행한 수 없이 많은 시험 중에서 가장 확실한 필살기를 준비했을 것은 뻔한 것... 그런 그가 준비한 첫 번째 질문이 에덴의 인간들에게 던졌던 질문과 같은 종류인 먹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40일이나 굶었으니 얼마나 힘드냐? 네가 하나님 아들 맞아? 40일 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확증하신 것이 맞아? 내가 보기에는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 뭐 이래? 도저히 못 믿겠는걸...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봐... 그리고 40일을 굶었으면 충분해. 너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야? 메시야고 뭐고 일단 먹어야 생존하지..."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귀는 마치 그가 인간의 편에서서 인간을 지극히 염려하고 생각해주는, 동정해주는 존재로 자신을 포장한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이 40일전에 하늘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듯, 마치 그것에 자신의 눈 앞에 증명되어야 확정이 되는 듯 교묘하게 시험한다. 또한 생존의 문제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에 앞선다는 것을 은근히 부추긴다.
첫째 인간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거리낄 것이 없는 분이시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드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셔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분이시다. 하지만 이 땅에 그분이 오신 것,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셔야할 그분의 사명은 철저히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인간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고 한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차원에서만 시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가운데 인간 구원을 위한 공생애 사역을 이루느냐 아니면 모든 인간이 매여 있는 먹고사는 문제를 이기지 못하고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인하느냐의 시험인 것이다.
마지막 때... 성경에 의하면 마귀는 역사상 최고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믿는 자들을 시험하며 핍박하며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발악하며 온갖 짓을 다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것이 시작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으로 시험할까?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에게 했던 것과 같이 먹는 문제, 즉 생존의 문제,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시험하지 않을까?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그 엄위하신 말씀을 부인하고 "사는 길"을 택하도록 종용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는 삶의 결과가 죽음이고 파멸인 것처럼 보이도록 우리를 속이지 않을까?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수히 순종하지 않고 약간 타협하면서 사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을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떡을 포기하고 말씀을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자유"를 포기하고 살아가야 하는 "손해"를 감수하는 삶이라고 속삭이는 마귀에게, 하나님의 속박 가운데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선언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자유"를 제한하기를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분의 말씀이... 그분의 말씀만이 나에게 절대적인 진리이고 가치인가?
깨어 있을 때이고, 스스로를 돌아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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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여기 있는 모든 나무의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이 질문... No라는 답변을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이 질문.
속이기의 명수, Rhetoric의 대가, 사람을 넘어뜨리는 데 선수인 마귀가 왜 그리 무식한 질문을 들고 인간에게 접근했을까?
이 질문은 언뜻 보는 것과 같이 그리 단순하고 무식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과하신 단 한 가지의 제한/금지 명령에 인간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제한적" 존재인 자기 자신을 불만스럽게 바라보게하는 효과를 노린 고단수의 질문이었다.
마귀의 의도대로 인간은 하나님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와의 답변 속에 그려지는 하나님은 금지 명령을 과도하게 내리는 폭군으로,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매우 관심을 깊이 보이는 존재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마음이 이미 그 안에 생겨난 것이다.
그것을 본 마귀는 "네가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분의 권위를, 더 나아가 그분의 하나님됨을 부인하도록 초청한다. 인간은 그 초청에 기꺼이 응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죽음의 길을 가고야 만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팔레스타인의 한 광야. 침례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신 직후 예수님께서 광야로 내몰리셔서 시험을 당하신다. 40일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한 예수님. 마귀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시험한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 당신이신 그분을 시험하여 쓰러뜨리려고 획책하는 마귀... 그가 역사 속에서 자행한 수 없이 많은 시험 중에서 가장 확실한 필살기를 준비했을 것은 뻔한 것... 그런 그가 준비한 첫 번째 질문이 에덴의 인간들에게 던졌던 질문과 같은 종류인 먹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40일이나 굶었으니 얼마나 힘드냐? 네가 하나님 아들 맞아? 40일 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확증하신 것이 맞아? 내가 보기에는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 뭐 이래? 도저히 못 믿겠는걸...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봐... 그리고 40일을 굶었으면 충분해. 너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야? 메시야고 뭐고 일단 먹어야 생존하지..."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귀는 마치 그가 인간의 편에서서 인간을 지극히 염려하고 생각해주는, 동정해주는 존재로 자신을 포장한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이 40일전에 하늘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듯, 마치 그것에 자신의 눈 앞에 증명되어야 확정이 되는 듯 교묘하게 시험한다. 또한 생존의 문제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에 앞선다는 것을 은근히 부추긴다.
첫째 인간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거리낄 것이 없는 분이시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드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셔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분이시다. 하지만 이 땅에 그분이 오신 것,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셔야할 그분의 사명은 철저히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인간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고 한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차원에서만 시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가운데 인간 구원을 위한 공생애 사역을 이루느냐 아니면 모든 인간이 매여 있는 먹고사는 문제를 이기지 못하고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인하느냐의 시험인 것이다.
마지막 때... 성경에 의하면 마귀는 역사상 최고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믿는 자들을 시험하며 핍박하며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발악하며 온갖 짓을 다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것이 시작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으로 시험할까?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에게 했던 것과 같이 먹는 문제, 즉 생존의 문제,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시험하지 않을까?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그 엄위하신 말씀을 부인하고 "사는 길"을 택하도록 종용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는 삶의 결과가 죽음이고 파멸인 것처럼 보이도록 우리를 속이지 않을까?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수히 순종하지 않고 약간 타협하면서 사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을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떡을 포기하고 말씀을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자유"를 포기하고 살아가야 하는 "손해"를 감수하는 삶이라고 속삭이는 마귀에게, 하나님의 속박 가운데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선언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자유"를 제한하기를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분의 말씀이... 그분의 말씀만이 나에게 절대적인 진리이고 가치인가?
깨어 있을 때이고, 스스로를 돌아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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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33:00
보물19
(2008년 9월 17일에 쓴 글)
지난 12일과 13일... 혼자서 교회의 집사수련회에 다녀왔다.
가는 날 하연이는 친구집에 놀러 갔었고, 그래서 인사를 못했다.
수련회에서 다녀온 날, 하연이가 쓴 쪽지를 발견했다.
(참고로 우리 집에서 X는 Kiss를, O는 Hug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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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13:00
사랑으로...
요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 노인이 자주 생각난다.
에코가 의도적으로 포스트모던 소설가로 유명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이름을 땄다는 그 노인.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이었던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중세 한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도서관장이었다.
이 소설은 그 수도원에서 일어나고 있던 연쇄 살인사건의 미스테리를 풀기위해 파송된 영국의 윌리엄 수도사와 그의 시종이었던 아드소가 끔찍하게 죽어간 수도원 내부의 피살자들의 죽음의 흔적을 추적하는 가운데 그 범인이 바로 호르헤 노인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다.
수도원... 중세 당시 많이 타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타락해서 악취가 나던 중세 교회에서 영성과 말씀과 기도의 보루였던 그곳... 그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세상과 결별하여 주님 앞에서 (Coram Deo) 살겠다고 작정한 자들이 모인 그곳. 그 당시로 볼 때, 그나마 가장 깨어 있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 그리고 그 주인공 호르헤 노인...
왜 그 수도원에서 그런 끔찍한 살인사건을 자행했을까?
호르헤 노인이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다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분실되었다고 믿어지는 시학의 둘째권(첫째는 "비극"이다.)인 "희극"이 이 수도원의 도서관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책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해서 읽은 수사들을 호르헤 노인이 차례로 죽였던 것이다.
그 책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
그것은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표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 호르헤 노인의 잘못된 신념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표현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웃지 않으셨고, 예수님이 웃지 않으셨기 때문에 웃음을 죄악이라고 단정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과 해학에 대해서 쓴 "희극"은 불경한 것이고 악마의 서적이 되는 것이다. 그 악마의 서적에 접근한 자들은 성경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되는 논리이지만, 호르헤 노인 나름대로는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진리에서 벗어나는 "이단자들"을 과감하게 처단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료 수도사들을 처참하게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았다.
진리...
진리라는 말이 점점 의미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하나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웃음거리가 되어버리는 이 시대에, 진리를 붙들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그것은 바보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편협한 독단주의자들의 광기어린 집착증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세상이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이 진리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 그리고 진리를 더욱 선명히 붙잡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놓치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가치가 교회에 해일처럼 밀려오는 이 시대에, 수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잃어버리고, 세속에 물들어간다. 그것은 교회가 생명을 잃는 것이고, 그것으로 교회는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다.
진리 사수...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너무나 critical한 문제이다. 따라서 진리를 더욱 분명히 하고, 그 진리를 타협없이 지켜나가는 것은 이 시대에 꺼져가는 생명의 등불을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가 진정한 진리라면... 그것도 단순한 세상의 진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했던 진리라면... 그 진리는 생명의 진리이다. 무책임하게 마구 휘둘러댐으로써 상처를 주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서슬퍼런 칼 같은 진리가 아니라, 그 진리를 가진 자에게 아름다운 열매와 향긋한 향기가 넘쳐나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의 진리인 것이다. 진리를 더 알고, 진리에 더 누릴수록, 그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나며,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자유가 있으며,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들이 눈에 띄게 나타나며, 겸손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넘쳐나고, 상황에 관계 없이 안식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누가 보든지 간에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열매들로 인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복음의 진리를 누구나 다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를 가진 사람들, 복음의 정수를 맛본 사람들은 반드시 그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열매들이 증거로 나타나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삶에서 진리를 명확하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런 인격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너무 드물다. 많은 경우는 진리가 없는 상태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그것은 가짜일 뿐이다. 또 다른 경우는 열매가 없이 진리에 대한 지식만 늘어간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호르헤 노인과 같이 인격적인 매력이 거의 없는 냉혈한, 혹은 현대적 율법주의자가 되어간다.
둘 다 완전히 잘 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 위에 분명히 서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열매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열매들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반대로 복음을 진정으로 맛본 자들, 복음의 진리를 더 선명하게 깨달은 자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히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 열매들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면, 복음의 진리를 더 "깊이" 혹은 "분명하게"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허구이고, 착각일 뿐이다.
만약 열매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소위 "진리"에 더 집착하게 될 때, 그 결과는 호르헤 노인, 그리고 그 소설의 마지막에 불에 타서 없어져버린 그 도서관과 같은 운명이 되어버릴 것이다.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복음을 더 선명하게 깨닫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엄중하게 물어 보아야 한다. 나에게서 주님께서 기뻐 찾으시는 그 열매가 그 만큼 풍성하게 맺히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진정으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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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가 의도적으로 포스트모던 소설가로 유명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이름을 땄다는 그 노인.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이었던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중세 한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도서관장이었다.
이 소설은 그 수도원에서 일어나고 있던 연쇄 살인사건의 미스테리를 풀기위해 파송된 영국의 윌리엄 수도사와 그의 시종이었던 아드소가 끔찍하게 죽어간 수도원 내부의 피살자들의 죽음의 흔적을 추적하는 가운데 그 범인이 바로 호르헤 노인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다.
수도원... 중세 당시 많이 타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타락해서 악취가 나던 중세 교회에서 영성과 말씀과 기도의 보루였던 그곳... 그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세상과 결별하여 주님 앞에서 (Coram Deo) 살겠다고 작정한 자들이 모인 그곳. 그 당시로 볼 때, 그나마 가장 깨어 있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 그리고 그 주인공 호르헤 노인...
왜 그 수도원에서 그런 끔찍한 살인사건을 자행했을까?
호르헤 노인이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다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분실되었다고 믿어지는 시학의 둘째권(첫째는 "비극"이다.)인 "희극"이 이 수도원의 도서관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책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해서 읽은 수사들을 호르헤 노인이 차례로 죽였던 것이다.
그 책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
그것은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표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 호르헤 노인의 잘못된 신념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표현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웃지 않으셨고, 예수님이 웃지 않으셨기 때문에 웃음을 죄악이라고 단정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과 해학에 대해서 쓴 "희극"은 불경한 것이고 악마의 서적이 되는 것이다. 그 악마의 서적에 접근한 자들은 성경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되는 논리이지만, 호르헤 노인 나름대로는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진리에서 벗어나는 "이단자들"을 과감하게 처단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료 수도사들을 처참하게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았다.
진리...
진리라는 말이 점점 의미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하나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웃음거리가 되어버리는 이 시대에, 진리를 붙들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그것은 바보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편협한 독단주의자들의 광기어린 집착증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세상이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이 진리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 그리고 진리를 더욱 선명히 붙잡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놓치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가치가 교회에 해일처럼 밀려오는 이 시대에, 수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잃어버리고, 세속에 물들어간다. 그것은 교회가 생명을 잃는 것이고, 그것으로 교회는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다.
진리 사수...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너무나 critical한 문제이다. 따라서 진리를 더욱 분명히 하고, 그 진리를 타협없이 지켜나가는 것은 이 시대에 꺼져가는 생명의 등불을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가 진정한 진리라면... 그것도 단순한 세상의 진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했던 진리라면... 그 진리는 생명의 진리이다. 무책임하게 마구 휘둘러댐으로써 상처를 주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서슬퍼런 칼 같은 진리가 아니라, 그 진리를 가진 자에게 아름다운 열매와 향긋한 향기가 넘쳐나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의 진리인 것이다. 진리를 더 알고, 진리에 더 누릴수록, 그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나며,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자유가 있으며,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들이 눈에 띄게 나타나며, 겸손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넘쳐나고, 상황에 관계 없이 안식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누가 보든지 간에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열매들로 인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복음의 진리를 누구나 다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를 가진 사람들, 복음의 정수를 맛본 사람들은 반드시 그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열매들이 증거로 나타나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삶에서 진리를 명확하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런 인격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너무 드물다. 많은 경우는 진리가 없는 상태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그것은 가짜일 뿐이다. 또 다른 경우는 열매가 없이 진리에 대한 지식만 늘어간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호르헤 노인과 같이 인격적인 매력이 거의 없는 냉혈한, 혹은 현대적 율법주의자가 되어간다.
둘 다 완전히 잘 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 위에 분명히 서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열매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열매들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반대로 복음을 진정으로 맛본 자들, 복음의 진리를 더 선명하게 깨달은 자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히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 열매들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면, 복음의 진리를 더 "깊이" 혹은 "분명하게"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허구이고, 착각일 뿐이다.
만약 열매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소위 "진리"에 더 집착하게 될 때, 그 결과는 호르헤 노인, 그리고 그 소설의 마지막에 불에 타서 없어져버린 그 도서관과 같은 운명이 되어버릴 것이다.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복음을 더 선명하게 깨닫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엄중하게 물어 보아야 한다. 나에게서 주님께서 기뻐 찾으시는 그 열매가 그 만큼 풍성하게 맺히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진정으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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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2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