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사 37:36)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나는 언제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왜 그리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을까?

교리적으로는 100% 동의하는 그 단순한 사실이, 내 삶에서 진심으로 고백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내 죄성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증거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내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조지 뮬러와 같은 기도의 삶은 그저 늘상 있는 삶의 모습이 될 것이고, 불구덩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메드락과 사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삶에 두려움이 없이 오히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소망이 넘쳐날 것이고, 아귀다툼하는 사회 속에서 성실하게 살지만 그렇다고 부모없는 고아처럼 온 몸에 힘을 주며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해야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살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여 그분께 내 삶의 주파수를 맞추며 살 수밖에 없을텐데... 내 삶은 그런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침에 QT하며 기도하는 것 잠깐, 그리고 나서는 마치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정신없이 이 일 저 일 하는 가운데, 녹초가 되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가서 퍼져 잠만 자는 인생. 하나님께 이것저것 해달라는 요구는 많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묵상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삶.

18만 5천이라는 군대는 인구가 매우 적었던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군대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인구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들을 물리치기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그 군대를 보고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했던 히스기야도 참 대단한 인물이다. 어쨋든 그런 군대를 한 순간에 없애버리신다. 하나님께서 "치시니" 그 큰 군대는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 믿음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제발" 믿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세상은 두려워 보이고, 내면에서는 온갖 불평만 쌓인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니, 살아 남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삶은 피곤하기만 하다. 생존에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내 일, 내 가족 뿐이다. 그것에 도움되는 것은 "선한 것"이고 그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분류된다. 마치 사사기에서 왕이 없으므로(다시 말해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각자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았던 것처럼, 꼭 그런 영적,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삶에서 돌이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의 전능하심을 내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삶은 편안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주인되는 삶을 내려 놓고 전능하신 그분께 삶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차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푸른 풀밭도 가고, 사망의 골짜기로도 가는 것이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느 상황이나 두려움이 없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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