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이 깔린 저녁..
미대 도서관... 매킨토시 컴퓨터와 비디오편집기 앞...
PBS의 The West가 play되고 있다...
다음 주 월요일 Discussion Section에서 사용할 자료를 만드는 중...
Carlisle Indian School... Philadelphia...
쉽지 않은 편집작업...
기도... 하나님의 주권
어제...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기도를 시작한 것에 대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찌보면, 상상할 수 없는 기도...
하지만, 기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꿈꾸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온전히 믿는 자들은,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 도저히 불가능한 그 일을 그분을 믿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자들 아닌가?
무엇을 기도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자세로 기도하느냐는 더 중요하다.
기도하는 자는, 그 기도가 자신의 입을 떠난 이후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100% 인정하는 자세를 가진 자여야 한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떼쓰고 조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기는 하지만, 그 기도에 Yes, No, 혹은 Later로 응답하시는 것은 그분의 주권이다.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식을 결정하시는 것도 그분의 주권이다.
기도하는 자는 그분께 더 집중하는 자이다. 그래서 내가 드린 기도에 대해서 그분이 어떻게 반응을 하시는지를 예민하게 catch하는 자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분을 더 자세하게, 더 잘 알아가는 법을 배우는 자이다.
기도하는 자는 순종을 전제하는 자이다. 기도 자체는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무릎꿇음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기도하는 자는 종이다. 주인이 아니다. Decision maker가 아니다. Decision maker에게 호소하는 자일 뿐, 결정을 기다리는 자이다. 그리고 그 결정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순종하는 자이다.
기도하는 자는 맡기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기도하는 그 것에 대해서 스스로 뭔가를 이루어 보려고 애쓰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께서 뭔가를 하기를 원하시는 분명한 싸인이 있을 때는 순종의 차원에서 action을 취하지만,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자기가 그 기도제목이 현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애쓰면서 발버둥치는 자가 아니다. 그는 기다리는 자이며, 그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행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이다.
어제 이후... 내 기도가 더 강화되었다. 더 간절하게, 더 직접적으로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더 간절해졌다고 해서, 기도에 대한 내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100% 인정하며, 그분께 집중하며, 순종하며, 맡기며 나아간다. 전보다 오히려 더욱 그렇게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응답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은 그 기도제목과 관련된 모든 자들에게 선한 방식으로 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전능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선한 결과를 가져 오실 수 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어찌보면, 상상할 수 없는 기도...
하지만, 기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꿈꾸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온전히 믿는 자들은,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 도저히 불가능한 그 일을 그분을 믿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자들 아닌가?
무엇을 기도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자세로 기도하느냐는 더 중요하다.
기도하는 자는, 그 기도가 자신의 입을 떠난 이후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100% 인정하는 자세를 가진 자여야 한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떼쓰고 조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기는 하지만, 그 기도에 Yes, No, 혹은 Later로 응답하시는 것은 그분의 주권이다.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식을 결정하시는 것도 그분의 주권이다.
기도하는 자는 그분께 더 집중하는 자이다. 그래서 내가 드린 기도에 대해서 그분이 어떻게 반응을 하시는지를 예민하게 catch하는 자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분을 더 자세하게, 더 잘 알아가는 법을 배우는 자이다.
기도하는 자는 순종을 전제하는 자이다. 기도 자체는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무릎꿇음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기도하는 자는 종이다. 주인이 아니다. Decision maker가 아니다. Decision maker에게 호소하는 자일 뿐, 결정을 기다리는 자이다. 그리고 그 결정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순종하는 자이다.
기도하는 자는 맡기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기도하는 그 것에 대해서 스스로 뭔가를 이루어 보려고 애쓰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께서 뭔가를 하기를 원하시는 분명한 싸인이 있을 때는 순종의 차원에서 action을 취하지만,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자기가 그 기도제목이 현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애쓰면서 발버둥치는 자가 아니다. 그는 기다리는 자이며, 그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행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이다.
어제 이후... 내 기도가 더 강화되었다. 더 간절하게, 더 직접적으로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더 간절해졌다고 해서, 기도에 대한 내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100% 인정하며, 그분께 집중하며, 순종하며, 맡기며 나아간다. 전보다 오히려 더욱 그렇게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응답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은 그 기도제목과 관련된 모든 자들에게 선한 방식으로 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전능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선한 결과를 가져 오실 수 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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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04:00
주일 오후의 단상...
사랑하는 형제를 공항으로 배웅하고 돌아온 지금...
저녁부터 시작될 교회 집회 때 섬겨야 하기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하고 있다.
교회 근처의 스타벅스...
혼자 앉아서 상념에 잠긴다...
사랑... 믿음... 신뢰... 능력... 가치... 헌신...
모든 단어가 공허하게 들린다.
그 동안 정확한 정의도 알지 못한 채 너무나 많이 자주 사용한 그런 단어들...
내 무지...
철저한 무지...
몸서리가 쳐진다.
저녁부터 시작될 교회 집회 때 섬겨야 하기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하고 있다.
교회 근처의 스타벅스...
혼자 앉아서 상념에 잠긴다...
사랑... 믿음... 신뢰... 능력... 가치... 헌신...
모든 단어가 공허하게 들린다.
그 동안 정확한 정의도 알지 못한 채 너무나 많이 자주 사용한 그런 단어들...
내 무지...
철저한 무지...
몸서리가 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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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45:00
[펌] 아버지와 딸
아버지와 딸
좋은 아버지는
딸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딸은 이를 기억하며 산다. 이것이 혼자 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아버지의 사랑과 지원은
딸이 스스로를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삶을 긍정적이고 진지하게
살아나갈 수 있게 해준다.
- 플로렌스 포크의《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중에서 -
* 아버지는 딸에게 한 그루 나무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말 없는 사랑의 그늘이 되어줍니다.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불어 잎이 지고 가지가 꺾여나가도
그루터기로 남아 조용히 눈물 쏟으며 딸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기도로 자란
딸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좋은 아버지는
딸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딸은 이를 기억하며 산다. 이것이 혼자 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아버지의 사랑과 지원은
딸이 스스로를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삶을 긍정적이고 진지하게
살아나갈 수 있게 해준다.
- 플로렌스 포크의《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중에서 -
* 아버지는 딸에게 한 그루 나무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말 없는 사랑의 그늘이 되어줍니다.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불어 잎이 지고 가지가 꺾여나가도
그루터기로 남아 조용히 눈물 쏟으며 딸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기도로 자란
딸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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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36:00
두 죽음
죽음 하나...
한국시간으로 7일 남편과 함께 자살한 최윤희씨...
"행복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으며, 방송에서 희망과 삶에 대한 긍정적 해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했던 사람.
"자살"의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사람...
도대체 유서에 나온 700가지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악화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인데... 그동안 그녀가 주장했던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그는 무엇을 믿고 있었을까?
그 믿음이라는 것.. 그 긍정과 희망이라는 것... 그것이 세상의 것일 때 얼마나 덧엇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긍정의 힘은 신기루일 뿐이다. 인생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 인생, 그 생명이 도대체 누구의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도 그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 처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안에서 주어진 사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 갔던 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삶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진정으로 의미있게 사는 것이다.
그의 죽음... 특히 남편과 동반 자살한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이 상당히 클 것 같다. 걱정이다.
죽음 둘...
황장엽...
바로 오늘 그가 죽었다. 집에서...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심장마비에 의한 자연사라고 일단 결론이 내려진 듯하다.
87세의 고령인 것을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죽음의 싯점이 참으로 절묘하다. 북한에서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으로 대대적인 군대 열병식을 거행하고 있던 바로 그날이다. 최근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공식화된 셋째아들 김정은이 북한의 기라성 같은 장군들과 아버지인 김정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박수치고 있을 그 때이다.
이 두 사건이 묘하게 오버랩이 되면서, 북한의 공작에 의한 암살이 아니었나하는 의심을 저버릴 수 없다.
김정일의 가정교사를 지낸 인물로 1965년 김정일종합대학 총장과 1970년 당중앙위원, 1980년 노동당 비서의 북한 최고위직을 지낸 그... 북한의 주체사상의 이론적 틀을 다진 최고의 이론가로서 북한 권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가 1997년 돌연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줄곧 반북한, 반김정일을 외치며 남한 내에서 보수 우파를 자극했던 인물...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름대로의 한 시대의 종언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죽음... 어떤 죽음이든지 간에,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향하여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 두 사람의 죽음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한국시간으로 7일 남편과 함께 자살한 최윤희씨...
"행복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으며, 방송에서 희망과 삶에 대한 긍정적 해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했던 사람.
"자살"의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사람...
도대체 유서에 나온 700가지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악화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인데... 그동안 그녀가 주장했던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그는 무엇을 믿고 있었을까?
그 믿음이라는 것.. 그 긍정과 희망이라는 것... 그것이 세상의 것일 때 얼마나 덧엇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긍정의 힘은 신기루일 뿐이다. 인생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 인생, 그 생명이 도대체 누구의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도 그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 처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안에서 주어진 사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 갔던 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삶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진정으로 의미있게 사는 것이다.
그의 죽음... 특히 남편과 동반 자살한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이 상당히 클 것 같다. 걱정이다.
죽음 둘...
황장엽...
바로 오늘 그가 죽었다. 집에서...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심장마비에 의한 자연사라고 일단 결론이 내려진 듯하다.
87세의 고령인 것을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죽음의 싯점이 참으로 절묘하다. 북한에서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으로 대대적인 군대 열병식을 거행하고 있던 바로 그날이다. 최근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공식화된 셋째아들 김정은이 북한의 기라성 같은 장군들과 아버지인 김정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박수치고 있을 그 때이다.
이 두 사건이 묘하게 오버랩이 되면서, 북한의 공작에 의한 암살이 아니었나하는 의심을 저버릴 수 없다.
김정일의 가정교사를 지낸 인물로 1965년 김정일종합대학 총장과 1970년 당중앙위원, 1980년 노동당 비서의 북한 최고위직을 지낸 그... 북한의 주체사상의 이론적 틀을 다진 최고의 이론가로서 북한 권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가 1997년 돌연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줄곧 반북한, 반김정일을 외치며 남한 내에서 보수 우파를 자극했던 인물...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름대로의 한 시대의 종언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죽음... 어떤 죽음이든지 간에,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향하여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 두 사람의 죽음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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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40:00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49-50)
이 두 구절은 마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인정되고 있는 절들로서 학자들마다 해석이 모두 다르고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구절이다. 각 성경번역본들도 나름대로의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번역했기 때문에, 번역본만 가지고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가 매우 힘들다.
이 본문에서 핵심단어는 "소금"이다. 그럼 소금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집으로 돌아오시는 도중에 제자들 사이에 분란이 있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집에 도착하셔서 제자 중 몇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막 9:33)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노중에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34)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을 가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작업 도중에 서로가 크다고 우기면서 심하게 언쟁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두 소집하시고 나서는 훈계를 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35)
그리고는 집에 있던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안으시면서 강조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37)
예수님께서 한참 심각하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요한이 불쑥 엉뚱한 말을 하며 분위기를 흐트러 뜨린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38)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요한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온유하게 그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금하지 말라고 타이르신 후, 다신 자연스럽게 원래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주제로 돌아 오신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41)
예수께 속한 사람을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자(제자들처럼 서로 밟고 올라가서 높은 자가 되려는 자가 아니라)를 예수님께 칭찬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자들의 관심이 높은 자리, 권력, 부에 있어서는 안되고, 낮은 자리 작은 자를 섬기고 돕는 일, 그리고 죄로부터 떠나 정결하고 거룩한 삶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42-47) 동시에 낮은 곳에 임하려 하지 않고, 죄악을 일삼는 자들에게 임할 지옥형벌을 강조하신다.(45-48)
그 이후에 나오는 구절이 오늘 본문이다. 48절에서 지옥의 불형벌을 강조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바로 다음 말씀이 49절인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이고, 또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49절의 두번째 단어로 "γάρ(가르)"(For, 왜냐하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49절은 지옥에서 불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음식에 소금치듯이 불의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하지만 이 해석의 문제점은 49절의 소금과 50절의 소금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다른 해석들이 나오는데, 나는 지옥에 관한 경고의 말씀은 45절부터 시작해서 49절까지로 일단락 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면 무리하게 50절과 연결 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50절의 다음 구절인 10장 1절이 완전히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50절은 가버나움 집에서 제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치신 말씀의 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50절의 "소금"은 그 맥락에서 해석해야하고, 그 맥락에서라면, 소금은 적어도 1차적이고 직접적으로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낮은 자세로 섬기는 종이되는 섬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작은 자들에게 물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섬김, 그리고 그 가운데 죄로부터 떠나 정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인이 그것들을 잃어버린다면,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런 자들은 마태복음 5:13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의 "소금"이 바로 제자들을 화목하게 하는, 하나되게 하는, 공동체로 온전히 연합하는 그런 끈이 된다는 것이다. 낮은 종의 자세로 섬기는 것을 소망하는 자들의 모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자들의 모임, 정결함과 거룩함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자들의 모임... 그 모임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밖에 없으며,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είρήνη(에이레네)"(평화 = 샬롬)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두 구절은 마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인정되고 있는 절들로서 학자들마다 해석이 모두 다르고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구절이다. 각 성경번역본들도 나름대로의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번역했기 때문에, 번역본만 가지고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가 매우 힘들다.
이 본문에서 핵심단어는 "소금"이다. 그럼 소금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집으로 돌아오시는 도중에 제자들 사이에 분란이 있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집에 도착하셔서 제자 중 몇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막 9:33)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노중에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34)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을 가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작업 도중에 서로가 크다고 우기면서 심하게 언쟁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두 소집하시고 나서는 훈계를 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35)
그리고는 집에 있던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안으시면서 강조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37)
예수님께서 한참 심각하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요한이 불쑥 엉뚱한 말을 하며 분위기를 흐트러 뜨린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38)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요한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온유하게 그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금하지 말라고 타이르신 후, 다신 자연스럽게 원래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주제로 돌아 오신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41)
예수께 속한 사람을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자(제자들처럼 서로 밟고 올라가서 높은 자가 되려는 자가 아니라)를 예수님께 칭찬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자들의 관심이 높은 자리, 권력, 부에 있어서는 안되고, 낮은 자리 작은 자를 섬기고 돕는 일, 그리고 죄로부터 떠나 정결하고 거룩한 삶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42-47) 동시에 낮은 곳에 임하려 하지 않고, 죄악을 일삼는 자들에게 임할 지옥형벌을 강조하신다.(45-48)
그 이후에 나오는 구절이 오늘 본문이다. 48절에서 지옥의 불형벌을 강조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바로 다음 말씀이 49절인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이고, 또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49절의 두번째 단어로 "γάρ(가르)"(For, 왜냐하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49절은 지옥에서 불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음식에 소금치듯이 불의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하지만 이 해석의 문제점은 49절의 소금과 50절의 소금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다른 해석들이 나오는데, 나는 지옥에 관한 경고의 말씀은 45절부터 시작해서 49절까지로 일단락 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면 무리하게 50절과 연결 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50절의 다음 구절인 10장 1절이 완전히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50절은 가버나움 집에서 제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치신 말씀의 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50절의 "소금"은 그 맥락에서 해석해야하고, 그 맥락에서라면, 소금은 적어도 1차적이고 직접적으로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낮은 자세로 섬기는 종이되는 섬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작은 자들에게 물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섬김, 그리고 그 가운데 죄로부터 떠나 정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인이 그것들을 잃어버린다면,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런 자들은 마태복음 5:13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의 "소금"이 바로 제자들을 화목하게 하는, 하나되게 하는, 공동체로 온전히 연합하는 그런 끈이 된다는 것이다. 낮은 종의 자세로 섬기는 것을 소망하는 자들의 모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자들의 모임, 정결함과 거룩함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자들의 모임... 그 모임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밖에 없으며,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είρήνη(에이레네)"(평화 = 샬롬)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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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01:00
거리에서...
Dean Keaton의 버스 정류장...
22번 버스를 기다리는 거리의 한 복판에서 인터넷이 된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토요일... 해가 저물어 가는 캠퍼스의 거리...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한가하게 걸어다니는 몇 사람들이 눈에 띄고, UT 타워에서 울려오는 종소리가 은은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김광석의 "거리에서"가 생각난다...
대학생시절... 하숙방에 앉아 그의 CD를 틀어 놓고, 얼마나 자주 불렀던 노래인지..
얼마 전에 다시 만난 필라델피아에 있는 후배, 같은 하숙집에 있었던 그 후배가 과거를 생각하며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김광석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내 모습이었으니...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왠지 모든 것이 꿈결같아요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뭐라 말하려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 와요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 먼 그곳으로
떠너버린 후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거리에 짙은 어둠이 낙엽처럼 쌓이고
차가운 바람만이 나의 곁을 스치면
왠지 모든 것이 꿈결같아요
옷깃을 세워 걸으며 웃음지려 하여도
떠나가던 그대의 모습 보일 것같아
다시 돌아보며 눈물 흘려요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 먼 그곳으로
떠나버린 후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22번 버스를 기다리는 거리의 한 복판에서 인터넷이 된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토요일... 해가 저물어 가는 캠퍼스의 거리...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한가하게 걸어다니는 몇 사람들이 눈에 띄고, UT 타워에서 울려오는 종소리가 은은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김광석의 "거리에서"가 생각난다...
대학생시절... 하숙방에 앉아 그의 CD를 틀어 놓고, 얼마나 자주 불렀던 노래인지..
얼마 전에 다시 만난 필라델피아에 있는 후배, 같은 하숙집에 있었던 그 후배가 과거를 생각하며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김광석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내 모습이었으니...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왠지 모든 것이 꿈결같아요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뭐라 말하려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 와요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 먼 그곳으로
떠너버린 후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거리에 짙은 어둠이 낙엽처럼 쌓이고
차가운 바람만이 나의 곁을 스치면
왠지 모든 것이 꿈결같아요
옷깃을 세워 걸으며 웃음지려 하여도
떠나가던 그대의 모습 보일 것같아
다시 돌아보며 눈물 흘려요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 먼 그곳으로
떠나버린 후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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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33:00
음식
하나님!
오랫만에... 참으로 오랫만에...
혼자 있으면서 배고픔을 느껴 밖에 나가서 먹을 것을 사왔습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이제 혼자 있으면서도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회복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손과 발이 움직여 음식을 사올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시간은 흐릅니다...
정말...
시간은 흐릅니다.
시간의 주인이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참으로 오랫만에...
혼자 있으면서 배고픔을 느껴 밖에 나가서 먹을 것을 사왔습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이제 혼자 있으면서도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회복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손과 발이 움직여 음식을 사올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시간은 흐릅니다...
정말...
시간은 흐릅니다.
시간의 주인이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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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21:00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찌기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욥 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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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5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