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5

(2005월 1월 5일에 쓴 글)

어제 저녁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컴퓨터가 있는 안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고, 애들은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둘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쁘아~~~ 잉잉.. 아쁘아~~~~~"

필시 뭔가 다툼이 있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첫째가 빠른 속도로 거실에서 도망을 쳐서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 상황만으로도 사태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분명히 둘이 옥신각신 하다가 큰 애가 힘으로 둘째를 재압하고 둘째는 울음으로 아빠의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리라.
한껏 낮은 목소리로 큰 애를 불렀다.

"하연아!"

아빠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직감한 첫째는 나에게 오는 대신 둘째에게 다가가서 화해의 제스쳐를 취한다. 둘째는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대화를 거부하며 더 큰 목소리로 아빠를 부른다. 난감한 첫째... 온갖 감언이설로 달래려고 하지만 둘째의 징벌의지는 확고하다. 나는 결국 사태의 해결을 위해서 내가 나서야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첫째를 부른다.

"하연아!"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아차린 첫째는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예연이가 왜 울어?"
"...."
그 때 거실에서 예연이가 오면서 이른다.
"언니가 밀었쩌요."
"밀었어? 아니 이런!" 하면서 나는 매를 찾는다. 주위를 아무리 봐도 매는 보이지 않는다.
"하연이는 방에 가서 무릎꿇고 있어!"
한 마디 해놓고 매를 찾지만 실패... "매가 어디있지?" 혼잦말로 중얼거린다.
하는 수 없이 첫째 앞에 앉아서 자초지종을 들으려고 하는데, 그 동안 잠시 사라졌던 둘째가 어디서 찾았는지 50cm 자를 찾아서 들고 정말 빠른 속도로 와서 건네준다. (이걸로 언니 때려주라고?) '짜식! 밥을 좀 이렇게 빨리 먹어봐라...'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별로 때릴 생각은 없지만 (참고로 나는 애들을 결코 때리지 않는다. 그냥 겁을 줄 뿐) 둘째의 성의를 생각해서 건네 받아서 첫째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둘째는 언니가 야단맞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감상하고 싶어서 내 옆에 자리를 잡는다.

"왜 동생을 밀었어?"
"예연이가 내 얼굴을 손으로 때렸어요!" (순간 예연이의 표정이 변한다. 미소작전을 쓰기로 했는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동생이 때렸다고 밀면 돼?"
"아니요, 잘못했어요..."

이제는 둘째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아빠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 전에 언니를 혼내줘야 한다는 표정은 사라지고 멋쩍은 웃음만 온 얼굴에 가득하다.
"언니 때렸어?"
"예..."
"언니는 왜 때렸는데?
"...."
"언니 때린 것 잘한거야?"
"아니요. 잘못했어요."
"언니에게 미안하다고 해!"
"언니. 미안해.."

하연이를 향한다.
"동생 민 것은 잘 한거야?"
"아니요..."
"예연이에게 미안하다고 해!"
"예연아.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심지어 웃음을 참기 위해서 입을 가리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약 2초 후... 둘은 언제 싸웠냐는 듯이 서로 깔깔거리며 웃고 뛰논다.

아이들을 키우는 재미.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부끄러운 내 모습...

이번 주에 여러 형제자매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청년부 내에서 믿음을 갖지 못한 지체들이나 믿음이 있지만 아직 신앙의 기초가 부족한 지체들을 돕기 위해 이번 여름에 특별히 개설한 신앙기초반에 소속된 지체들 중 특별히 형제들을 일대일로 만나서 개인의 신앙을 점검하고 복음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 주는 여름학기 TA를 시작해야하고, 날마다 지속되는 수업과 TA office hours, review sessions에서 가르치는 것등의 시간부담이 많을 것 같아서 이번 주에 모두 만나기로 했다. 지난 월요일에 두 명을 연달아 만나고, 화요일에도 만나고, 수요일에도, 그리고 오늘까지 하루에 몇 명씩을 만나 한 사람 당 두 세 시간씩 시간을 보내면서 복음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깊이있게 나누었다. 그리고 수요일인 어제 밤 9시부터는 모두 모여서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밤 늦게까지 나누었다. 복음을 나누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그 시간들을 통해서 지체들이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진지하게 복음에 한 걸음씩 더 다가가는 것을 보는 것이 참 행복했다.
하지만, 다음 주부터 시작될 TA를 위해 준비해야할 것들이 많이 있고, 논문을 써야하고, 청년부의 일들 중 기도 중에 결정해야할 것들이 있고, 해야할 집안 일들에 대한 부담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던 것 같다... 정말 몰랐었는데...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약속된 3 명의 개인면담자 중에서 오후에 약속되어 있던 형제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고, 전화로도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을 최종 확인하면서, 내 안에서는 안타까움보다는 안도감이 생기는 것을 보고야 알았다. 그 안도감은 저녁 6시에 약속된 다른 지체와 만날 때까지 3시간이 확보되었다는 것, 그래서 내가 책을 읽고 내 공부를 할 수가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 안도감이었다.

'드디어 내 것을 챙길 시간이 생겼다!'

내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생명이라도 내 놓을 것 같았는데...
그래서 이번 일주일을 모두 희생해서라도 영혼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돕는 데 아낌없이 다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래서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그 고백이 진실됨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내것"을 챙기고자 하는 나의 자아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내것과 하나님의 것을 나누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내 삶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 나머지는 "나"를 위해 쓰고싶은 욕망이 있었던 모양이다.
영혼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안타까움으로 이 클래스를 인도하고 영혼들을 돌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그래도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라고 자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독버섯처럼 내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것이 내 진실된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셨겠지...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고후 9:7)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내 모든 것을 다해 주님께 드리고도 전혀 아깝지 않은 그런 섬김, 그런 믿음을 소망한다. 아직은 너무나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런 섬김을 할 수 있겠지... 그날을 기다리며, 이 완악한 나를 사용하셔서라도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시는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뿐이다....

보물 4

(2005년 1월 4일에 쓴 글)

1. 지난 주 집에 있는 일이 많았다. 특별히 한 일은 없고 그냥 집에서 빈둥빈둥... 데굴데굴...
한 번은 예연이랑 같이 놀고 있었다. 푹신한 아빠의 배 위에서 놀고 있던 예연이가 아빠 목걸이가 옷 속에 있는 것을 보더니 그것을 잽싸게 옷 밖으로 꺼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아빠! 예연이가 아빠 목걸이 나와뜨렸어요..."


2. 지난 주일. 2005년의 첫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 동안 예연이가 자주 입지 않는 치마가 있는 투피스 옷을 입었다. 너무 귀여워서 "예쁘다"는 말을 남발해 주었다. 모두들 집에 나와서 교회에 가려고 차를 탔다. 예연이를 보조의자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려는 순간, 예연이가 말했다.

"아빠! 공주가 왜 안전벨트를 메요?"

반중 조홍감이...


소반(小盤)에 놓인 일찍 익은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비록 유자(柚子)가 아니라도 품어갈 마음이 있지마는,
품어 가도 반가워해 주실 부모님이 안 계시므로 그를 서러워하나이다.

2007월 7월 7일 저녁 8시경(미국시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입니다. 2주기를 맞이하며 이인로의 시조가 생각이 나네요.
아직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저와 함께 지냈던 그 순간들,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그리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무섭고, 근엄하고, 나머지 가족과는 정서적으로 떨어져 있는 군주의 모습이셨기 때문에... 평생동안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정말 그립네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편지...

나는 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래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마치 하나님께서 육성으로 내게 직접 말씀하여 주시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를 늘 지켜보고 계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는 내가 가진 모든 것, 그러하기에 주께 내 희망을 건다." 주께서는, 주를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를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주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젊은 시절에 이런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좋고,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겸손하게 사는 것이 좋다.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라.
주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주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세상에서 옥에 갇힌 모든 사람이 발 아래 짓밟히는 일, 가장 높으신 주님 앞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일, 재판에서 사람이 억울한 판결을 받는 일, 이러한 모든 일을 주께서 못 보실 줄 아느냐? 말씀으로 명령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냐? 주님이 아니시더냐? 궂은 일도 좋은 일도, 가장 높으신 주께서 말씀하셔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 죄값으로 치르는 벌을 불평하느냐?(애 3:19-39)


최고의 사악함

"그 어떤 것도 이기적인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욕망이 있든지,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선택과 행동을 취하든지 결국에 있어 그 바탕에 있는 동기가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영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동기가 불순하면,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모임에 출석하면서도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만으로 기도한다고 합시다. 그것이 신앙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자기의 전능한 종으로 삼고자하는 시도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큰 투자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사람은 우주와 하나님과 모든 것을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악한 행위입니다. 이것은 경건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며, 사실상 최고의 사악함입니다."-Charles G. Finney

나를 포함한 현대 기독교인들 중 "지극히 사악한 행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될까?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수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 때에, 이 사악함을 온전히 거부하고 참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될까?
자신의 가치관 하나 바꿀 수 없는 믿음의 고백, 삶이 도대체 변화되지 않고, 세상의 도덕군자보다 못한 그 믿음의 고백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외쳐대는 거짓 선지자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구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찾으시는 거룩한 백성들은 어디에 있는가?

신명기 3:25-27

(2004년 10월에 썼던 글)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신 3:25-27)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의 신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온 인생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거의 모든 순간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산 사람입니다. 한순간의 분노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죄를 짓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의인이라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런 그가 하나님께 아주 단순한 일로 간청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셔서 요단을 같이 건너게 하여주시고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보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그런 청이었지만, 모세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이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세의 한 일을 생각해 볼 때, 그 정도의 청은 좀 들어 주셔야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이 하나님께 크게 죄를 지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멸하시려고 작정하셨을 때, 모세의 간청으로 그 뜻을 돌이키셨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보면 형평에 어긋나는 것 같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찌보면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단호한 거절의 반응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한 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가 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이었습니다. 그 결정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따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먼 발치에서나마 가나안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볼 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간구한 뒤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이라면 우리의 뜻을 접고 일단 따르는 순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