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하는 유민이 아빠를 보며...

솔직히... 내 딸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나는 유민이 아빠처럼 그렇게 저항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훨씬 더 과격했을 것이고, 아마도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유민이 아빠를 보면서, 그의 단식을 보면서, 정말 격렬하게 저항하면서도, 법과 품위를 지키는 그 모습에서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난다.
나 역시 그가 죽기를 절대 원하지 않고, 건강하게 승리하기를 바라지만... 감히 그에게 단식을 중단하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딸에 대한 미안함, 그 딸의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그 죽음이 그 이후에 있을, 수 많은 죽음을 막는 거룩한 희생이 되어야만, 그나마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라도, 그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고, 후에 유민이를 만났을 때 면목이라도 설 것이라고 믿는 그 마음을, 비슷한 나이의 딸을 가진 아빠로서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을 만듦으로서 그를 살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인 것 같다.
정치권이 아무리 악한 자들이 모인 집단이라 하더라도, 한 아이의 아버지의 이 처절한 몸부림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갈까? 두려운 것은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이 점점 커진다는 것, 그것이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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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산 지 8개월 정도 된 아이패드 에어.

이 주 전에 갑자기 많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다.

그 후 밧데리 충전 능력이 현격히 떨어진다. 그 전에는 한 번 충전에 많으면 1주일, 적으면 3일 정도는 너끈히 견뎠는데, 지금은 똑같이 사용하는데도 많으면 3일이다. 물론 충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 전보다 훨씬 짧아졌다. 그래서 좋은 면이 있기도 하지만, 오래 쓰지 못한다는 것이 더 불편하다.

2011년에 iPod Touch 샀을 때도 똑 같았다. 약 8개월 정도 지나고 나니 한 번 엄청 뜨거워지더니 그 후로는 밧데리가 전과 같이 않게 되었다. 그래서 AS를 요구했더니, 애플 정책상 수리는 불가능하고 다른 것으로 교체해 준다고 해서 그렇게 하랬다. 멀쩡해 보이던 새로 받아온 기계는 다시 몇 개월 지나자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사설 수리기관에 가서 수리를 의뢰했는데, 뜯어 보더니 하는 말이 문제있는 부품을들 이것 저것 조립해서 만든 문제가 아주 많은 refub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걸레 조각 모아서 겨우 옷 모양을 만들어 놓은 형국이랄까? 문제는 원 제품을 살 때의 보증기간이 넘으면 애플은 아무 것도 안 해준다는 것. 두 번째 제품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그 보증 기간을 2개월 정도 넘긴 후였으니, 자기들은 책임질 수 없고,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딱 잡아 뗐다.

아이패드가 문제의 조짐을 보인다. AS기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래도 AS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경험 때문이다.

아이패드가 어느새 내 생활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 그것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어찌해야할지...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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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돌이킴

오늘 아침 밧새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살인하는 다윗을 봤다. 하나님께서 그의 행동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고 그분을 대적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다윗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최근에 어떤 분으로부터 남자는 돈과 권력이 생기면 꼭 딴짓을 하게 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만약 나라면 그 지위에 있을 때 다윗보다 더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장담하건데 결코 아니다. 이렇게 돈없고 힘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서슴지 않고 죄악을 저지르는 내가 다윗의 자리에 있다면 아마도 성경에 나온 악한 왕들의 계보에 들 것이 뻔하다.

다윗의 죄악을 볼 때마다 놀라는 것은, 그의 죄악의 크기와 깊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돌이킴이 참으로 놀랍다. 그가 한창 죄악 가운데 있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나타난다. 그의 출현 자체가 다윗에게는 가슴 철렁한 이벤트였을 터... 왜냐하면 나단은 그 전부터 선지자에 방불하던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던 선지자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나단이 그를 알현하고자 했을 때, 그것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다윗답다. 나라면 다난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이 면담을 거부했을 것이다.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고, 창피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죄악을 더 즐기기 위해서... 하지만 다윗은 그와의 면담을 허락한다.

잔뜩 긴장한 다윗에게 나단은 딴소리를 한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 대해서 추상같은 비판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소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아마 그는 그것이 비유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나단은 가축이 많은 부자와 암양 한 마리 밖에 없는 가난한 자 사이의 불의를 마치 다윗과는 관련이 없는 하나의 법적으로 다뤄야 할 케이스인 것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다윗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자기가 지은 죄책감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서 과도하게 반응한다. 그는 그 부자에게 대노하면서 그를 즉각 엄벌할 의지를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포장하고 싶었을 터이다.

안도감 속에서 죄책감을 의로운 겉모습으로 깊이 숨기고자 하는 그에게 나단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You are the man!"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어보나 마나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면전에서 그 죄를 들춰낼 때, 그것도, 불의의 습격으로 그렇게 될 때, 나는 분명 그에 반발할 것이다. 죄는 죄이고, 창피한 것, 황당한 것은 다른 문제이니까... 아마 나단을 그 자리에서 쫓아 냈을 것이고, 내가 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밧세바를 끝까지 책임졌다고,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혹은 심지어 밧세바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그 여자가 나를 유혹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가능한 모든 구실을 내세워 내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단의 추상같은 돌직구에 그는 말한다.

"I have sinned against the LORD."

변명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다. 체면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 그 앞에 무조건, 즉각적으로 무릎꿇는 것. 그것이 참 대단하다. 죄를 지은 경험이 많은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것이 바로 다윗의 이 반응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태도인 것이다.

성경이 지적하듯, 인간을 옥죄는 죄의 결박은 참으로 단단하고 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위대한 것은 그 죄의 결박으로부터 나를 자유케 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전히 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다윗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이 모습을 통해서 구약의 인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미리 받은 믿음의 조상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내 안에 그런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가?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즉각적으로 무릎꿇고 회개하는 그런 삶이 내 일상의 삶이 되고 있는가? 이 아침에 다윗을 보면서 내 자신을 부끄럽게 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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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중립??

교황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인간적인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면서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 희생자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를 생각하면 그 고통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라면서 "내 위로의 말이 죽은 이들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없지만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면서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한겨레신문 2014.8.19

정치적이지 않기 위해서 중립의 자리를 찾아 가는 것.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자리에서 마치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보다 더 정치적인 것을 없다. 소위 그 "중립"을 지키기 위해 정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가 정치의 한 분파와 결탁할 때 반드시 썩는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의 회색지점을 애써 찾아가며 모든 이슈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지 중립을 절대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종교인, 특히 내가 속한 개신교도라면, 정치적인 것보다 하나님 적인 것, 성경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한다. 성경적이다 보면 때로는 수구꼴통이라고 비난 받을 때도 있고, 때로는 종북이라고 비난 받을 수도 있다. 물론 때로는 매우 무관심해 보이는 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치를 가장 우위에 두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지키고자 애를 쓰는가이다.

작금의 한국 현실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침묵하는 것, 방관하는 것, 혹은 박근혜 정부에 동조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애써 외줄타기를 하며, 세상을 초월하는 듯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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