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그동안 성경을 많이 읽어봤지만,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특히 많이 읽어봤지만, 오늘 묵상 본문 말씀 중에서 이 구절이 가슴에 꽂힌다.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야고보와는 달리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받는 복은 궁극적으로 구원임을 생각할 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궁극적으로는 구원일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의도는 그런 차원에만 머물지는 않는 것 같다. 바울의 전도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받은 갈라디아교회의 영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바로 율법주의였고, 그 율법주의를 주창하는 자들은 필시 유대인, 특히 바리새출신 기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육신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믿는 유대교의 조상이기도 하다. 율법주의의 주창은 바로 그들이 말하는 (바리새인이라는 그 호칭의 원뜻과 같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바로 로마의 압제로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 즉 자속의 복과 땅의 복을 받을 수 (혹은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런 그들의 전제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은 그의 믿음에서 근거한 것이지 그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고보도 그의 믿음을 확증해 주는 근거로서의 행위를 강조함으로 바울과 같은 입장에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그 "복"을 누리는 통로라는 것이다.
개신교, 특히 세상의 물질적 축복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는 경향을 경계하는 측에서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구원"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그는 오실 메시야를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특권을 누렸고,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선지자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받았다. 그의 불순종이 있었지만,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아브라함의 보호자요 하나님되심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부족함이 없이 채우셨다. 비록 정작 약속하신 자손과 땅의 축복은 아브라함 당대가 아니라 후대로 미루셨지만...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복이라고 믿는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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