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금요일...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날...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안장되신 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직후 세 시간 동안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그것은 이땅에 하나님의 아버지의 은혜의 따사로운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의 대표로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버리시는 아버지의 진노, 거기에는 생명의 빛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은 주님이 존재한 그 영겁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아버지와의 단절, 아버지의 버리심을 경험하며 그것에 고통하며 처절하게 몸부림치신다. 아버지와의 단절, 그 은혜의 비추심이 없는 그것이 그가 당한 육신의 모든 고난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우셨던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그 고통의 절규이다.
주님께서 돌아가시자(원어 그대로로 하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자")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커튼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된다. 그리고 최초의 성막 이후에 인간들에게 철저히 감추어 있었던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곳, 언약궤와 그 위의 속죄소, 그 은혜의 보좌가 사람들에게 드러난다. 인간의 편에서 본다면 죽지 않고도 그 속죄소를 볼 뿐만 아니라 나아갈 방법이 생겼으며, 하나님의 편에서 본다면, 당신의 거룩함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커튼(휘장)은 성인의 손으로 재서 한 뼘의 두께로 매우 무겁고 두꺼운 천이었으며, 극상품의 재질로 매우 정교하게 짜여진 것이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은 그만큼 두꺼웠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로도 결코 찢을 수 없는 두터운 장벽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놓인 장벽이었다. 그것은 바로 죄의 장벽. 죄와 거룩 사이의 장벽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바로 그 장벽을 단번에 위에서 아래로 찢어버리는 놀라운 능력이었다.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그 휘장에는 그룹 천사들의 모양이 수놓아져 있었다.(출 26:31-33) 성경에서 그룹천사들은 하나님의 호위천사들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계신 그곳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수비하게 하신 천사들이다.(창 3:24)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겨 내린 것은 바로 그 에덴으로의 길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열리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관계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누린 던 그 곳, 그 상태로의 회복의 길이 주님으로 인해서 열린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 의하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히 10:20)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에덴으로 통하는 길은 그의 몸이 찢기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나의 죄 때문이다. 내 죄가 주님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찢으셨다. 나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으셨으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의 고통과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셨다. 아무 죄가 없으신 그분의 육체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터지고, 십자가에서 그분이 생명을 잃어갈 때, 주님은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무엇을 생각하시며 그 고통을 참으셨을까? 바로 내 이름이 아닐지... 나를 생각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으로 내 죄를 끝까지 담당하시며, 나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고자 그 고통을 감내하셨을 것이다.
내가 달려야할 십자가... 내가 당해야할 핍박과 고난... 그분은 나를 대신해서 이 모든 일을 당하셨다. 그런 그분이 그 희생 가운데 나에게 무엇을 원하셨을까? 십자가 위에서 나를 생각하시면, 나에게 무슨 기대를 하셨을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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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21
(2006.03.06에 쓴 글)
통통하네..
토요일 아침은 늘 분주하다... 한글학교에 가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교회에 가는 나는 시간에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 후다닥 식사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한다.
지난 토요일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더 정신 없이 챙겨야 했다는 것을 빼곤...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이를 닦고 있었다. 그 때 하연이가 들어오더니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쓱 내밀어 내 엉덩이를 만졌다. 그러더니 하는 말..
"어? 통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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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하네..
토요일 아침은 늘 분주하다... 한글학교에 가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교회에 가는 나는 시간에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 후다닥 식사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한다.
지난 토요일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더 정신 없이 챙겨야 했다는 것을 빼곤...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이를 닦고 있었다. 그 때 하연이가 들어오더니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쓱 내밀어 내 엉덩이를 만졌다. 그러더니 하는 말..
"어? 통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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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11:00
여행-돌아봄
2002년 7월에 미국에 온 후, 한국을 방문하는 것과 단기선교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 가족이 떠난 첫 여행이었다. 매일 24시간 intensive하게 같이 보낸 시간들... 아마 그 자체가 앞으로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약 3천 900마일의 장거리 여행. Texas, New Mexico, Arizona, Utah, Nevada, California를 넘나드는 긴 여행...
여행 소요경비는 총 1,100불...
소요기간 7일과 반나절....
아픈 사람 없었고, 다친 경우가 거의 없었고, 경미한 사고도 없이 무사하게 다녀온 여행이었다.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내면에 있어왔던 갈등이 점점 더 증폭되어가는 상황에서 떠난 여행이었다. 여러가지로 분노하는 것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고, 방향을 잡지 못해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하나님께서 어디론가 떠나서 시간을 가지며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이 아니었나 싶다.
여행하는 내내, 좋은 곳들을 돌아 봤지만, 그리고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자주 한숨을 내 쉬는 나를 보면서 아내는 걱정했다. 복잡한 머리와 가슴은 그랜드 캐년의 웅장함과 Zion 캐년의 아름다움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복잡한 마음을 상당히 많이 정리해 주셨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 24:45)
"Who then is the faithful and sensible slave whom his master put in charge of his household to give them their food at the proper time?"(NASB)
"종"은 하인이 아니다. δουλος라는 단어의 의미는 "노예"이다. 물론 동일한 본문의 누가복음에서는 이 종이 "청지기"로 표현되어 있지만, 청지기는 신분이 아니라 역할을 말해주는 단어이다. 신분은 노예이다. 노예 중에서 다른 동료 노예들(집 사람들, οι’κετείας)을 돌보며 섬기는 일, 특히 그들에게 정한 때, 그들에게 꼭 필요한 때(καιρός)를 따라 고기를 공급함으로 그들이 주인을 위한 노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자이다. 그는 노예들 중에서도 주인의 신임을 받는 자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그 종말을 맞이하는 가장 지혜로운 자는 바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라는 말씀을 주셨다. 믿음의 지체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감당하는 자... 그는 복이 있는 자이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6)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으며, 내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그 웅장한 그랜드 캐년보다도 더 크게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착각 속에서, 여행하는 내내 그 말씀을 깊이 묵상했다.
나는 결국 종이다. 그리스도의 노예일 뿐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양식 나누어주는 일을 충성과 지혜로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 양식을 통해서 지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그 양식을 통해서 새생명이 탄생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 그것이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 그것을 위해서 내 섬김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이 살아 있다.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있는 내 모습... 그리고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 많은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와중에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하나님께서는 내 모습을 보시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는 내 노예다. 내가 하라는 것만, 신경써라.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줘라. 나머지는 내가 다 하마...'
'예...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지만, 사실 아직도 내 안에는 struggle이 있다. 말로는 순종했지만, 아직 내 스스로가 그분의 노예라는 것이 인정이 안 되는 모양이다. 기도하기는 진정으로 주님의 노예로서 주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청지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 하나의 말씀은 차 안에서 들었던 유기성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받았다.
"여러분! 교회에서 잘잘못을 따지기 잘하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많이 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선악과를 하나만 먹어도 선과 악을 분별하며 따질 줄 알게 되었는데,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그렇게 따지는 것을 잘하겠습니까?"
전에 들으면서도 내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들으니, 정말 내 얘기다. 내 안에 얼마나 "옳은 것"에 대한 집착이 많은지... 그리고 그 "옳은 것"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지... 사실 그 옳은 것에 분개하면서 내 스스로가 옳지 못한 쪽으로 많이 기울어 가고 있는지를 보았다. 옳은 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 물론 사랑은 진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모습을성찰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뢰"였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 그래서 내 안에 염려와 근심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했다.
이번 여행은 내 개인적으로 spiritual retreat이었다.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은혜를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삶의 자리를 떠나 낯선 곳을 다니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내 자신을, 내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삶의 자리로 돌아온 지금... 그 받은 말씀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그 앞에 무릎꿇으려고 한다. 꿇어지지 않는 무릎, 완고한 내 자신을 보지만, 결국 무릎꿇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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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천 900마일의 장거리 여행. Texas, New Mexico, Arizona, Utah, Nevada, California를 넘나드는 긴 여행...
여행 소요경비는 총 1,100불...
소요기간 7일과 반나절....
아픈 사람 없었고, 다친 경우가 거의 없었고, 경미한 사고도 없이 무사하게 다녀온 여행이었다.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내면에 있어왔던 갈등이 점점 더 증폭되어가는 상황에서 떠난 여행이었다. 여러가지로 분노하는 것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고, 방향을 잡지 못해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하나님께서 어디론가 떠나서 시간을 가지며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이 아니었나 싶다.
여행하는 내내, 좋은 곳들을 돌아 봤지만, 그리고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자주 한숨을 내 쉬는 나를 보면서 아내는 걱정했다. 복잡한 머리와 가슴은 그랜드 캐년의 웅장함과 Zion 캐년의 아름다움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복잡한 마음을 상당히 많이 정리해 주셨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 24:45)
"Who then is the faithful and sensible slave whom his master put in charge of his household to give them their food at the proper time?"(NASB)
"종"은 하인이 아니다. δουλος라는 단어의 의미는 "노예"이다. 물론 동일한 본문의 누가복음에서는 이 종이 "청지기"로 표현되어 있지만, 청지기는 신분이 아니라 역할을 말해주는 단어이다. 신분은 노예이다. 노예 중에서 다른 동료 노예들(집 사람들, οι’κετείας)을 돌보며 섬기는 일, 특히 그들에게 정한 때, 그들에게 꼭 필요한 때(καιρός)를 따라 고기를 공급함으로 그들이 주인을 위한 노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자이다. 그는 노예들 중에서도 주인의 신임을 받는 자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그 종말을 맞이하는 가장 지혜로운 자는 바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라는 말씀을 주셨다. 믿음의 지체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감당하는 자... 그는 복이 있는 자이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6)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으며, 내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그 웅장한 그랜드 캐년보다도 더 크게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착각 속에서, 여행하는 내내 그 말씀을 깊이 묵상했다.
나는 결국 종이다. 그리스도의 노예일 뿐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양식 나누어주는 일을 충성과 지혜로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 양식을 통해서 지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그 양식을 통해서 새생명이 탄생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 그것이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 그것을 위해서 내 섬김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이 살아 있다.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있는 내 모습... 그리고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 많은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와중에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하나님께서는 내 모습을 보시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는 내 노예다. 내가 하라는 것만, 신경써라.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줘라. 나머지는 내가 다 하마...'
'예...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지만, 사실 아직도 내 안에는 struggle이 있다. 말로는 순종했지만, 아직 내 스스로가 그분의 노예라는 것이 인정이 안 되는 모양이다. 기도하기는 진정으로 주님의 노예로서 주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청지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 하나의 말씀은 차 안에서 들었던 유기성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받았다.
"여러분! 교회에서 잘잘못을 따지기 잘하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많이 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선악과를 하나만 먹어도 선과 악을 분별하며 따질 줄 알게 되었는데,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그렇게 따지는 것을 잘하겠습니까?"
전에 들으면서도 내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들으니, 정말 내 얘기다. 내 안에 얼마나 "옳은 것"에 대한 집착이 많은지... 그리고 그 "옳은 것"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지... 사실 그 옳은 것에 분개하면서 내 스스로가 옳지 못한 쪽으로 많이 기울어 가고 있는지를 보았다. 옳은 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 물론 사랑은 진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모습을성찰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뢰"였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 그래서 내 안에 염려와 근심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했다.
이번 여행은 내 개인적으로 spiritual retreat이었다.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은혜를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삶의 자리를 떠나 낯선 곳을 다니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내 자신을, 내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삶의 자리로 돌아온 지금... 그 받은 말씀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그 앞에 무릎꿇으려고 한다. 꿇어지지 않는 무릎, 완고한 내 자신을 보지만, 결국 무릎꿇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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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2:26:00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려면...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열매맺는 삶의 비결... 같이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3-9)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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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43:00
여행-귀환
Palm Springs에서의 일박... 숙소였던 Extended Stay에 침대가 두개인 방이 모두 차서 할 수 없이 침대가 하나 밖에 없는 방에서 자야했다. 물론 프론트에서 smoking room인 더블침대의 방이 비어 있다고 했지만, 평생 담배 냄새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나 였기 때문에, 특별히, 잠잘 때는 매우 깊이 잠드는 편이지만, 담배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잠을 자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거절했다. Front에서 미안한 나머지 suite room을 줬다. 넓고 좋은 방... 하지만 하나뿐인 침대... 거기서 예연이와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잘 만 했다. 어릴 적.. 아니 결혼하기 전까지 방바닥에서 잠을 잤던 옜날 생각이 났다. 그것도 벌써 11년이 훨씬 지났다...
Palm Springs는 말 그대로 Palm으로 가득찬 작은 도시였다. 참 이국적인 이 도시를 즐겨보지도 못하고 다음 경유지인 El Paso로 향했다. 하루 종일 달렸다. 79마일의 속도로... 중간에 기름을 넣고 휴게소에서 식사를 하는 것 빼놓고는 계속 달렸다.
저녁 늦게 El Paso에 도착했다. 11시 정도 된 줄 알았는데, 아직 10시였다. 미국을 동에서 서로 여행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혼동되었다. 내가 속한 Central Time, Mountain Time, Pacific Time zone을 오갔을 뿐만 아니라, Daylight Saving이 시작된 직후라 더 혼동되었고, 더구나 Daylight Saving에 참여하지 않는 Arizona를 중심으로 여행했기 때문에 무지하게 헷갈렸다. El Paso에 도착한 뒤 이제 텍사스로 돌아 왔으니 이제는 어스틴 시간으로 살면 되겠다고 안도했었는데, 텍사스의 서부 끝인 El Paso는 텍사스의 도시였지만 텍사스 시간인 Central Time을 따르지 않고 Mountain Time을 따른다는 것을, 도착해서야 알았다.
어쨋든 여행의 마지막 숙소인 El Paso의 한 호텔에서 푹 쉬고, 다음날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엘파소한인침례교회로 향했다. 참고로 El Paso에서 오스틴까지는 10시간 정도가 걸린다. 9시 30분에 출발한다 하더라도 저녁 7시 30분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간에 한 번도 안 쉴 경우에... 아침 8시 30분에 1부예배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목표로 준비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내가 늦게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교회에 9시 10분 정도에 도착했다. 하나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 아무리 여행중이라지만, 그리고 아무리 일찍 출발해야 한다지만 예배에 있어 이건 너무했다는 생각에 정말 속이 많이 상했다. 예배가 뒷전으로 쳐지는 상황...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준비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형식화 되는 이 상황... 그리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차를 타고 가면서 아내에게 늦게 도착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음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문도 모두 잠겨 있었다. 예배를 드리고 있거나 드렸다는 흔적이 전혀 없었다.
'왠일인가?'
속으로 혼자 생각하며 교회를 둘러보고 있을 때, 어떤 나이드신 미국인 부부가 차를 타고 도착했다. 알고보니 그분은 그 교회의 영어예배 담당 목사님이셨다. 그분의 말씀이 원래 8시 반에 1부예배가 있는데, 한국인 목사님이신 담임목사님이 베트남 단기선교를 가시는 바람에 그 주는 1부예배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2부예배는 영어예배이고, 3부예배가 원래 대예배라고 설명해 주셨다.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아내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2부예배에 Full로 참석하자고 했다.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흔쾌히 동의했고, 우리 가족은 한인2세들과 몇몇 미국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고,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린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기쁨이 넘쳤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난 직후, 우리를 환대하며 3부예배에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 적극 권면하는 한국인 교인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오스틴으로 향했다.
오스틴으로 오는 길... 여전히 황량한 광야... 그런데... 이제는 그 광야가 고향처럼 느껴졌다. 그 "광야"가 뉴멕시코나 아리조나의 광야에 비해서 얼마나 나무가 많은지... 얼마나 푸르름이 더한지 깨달았다. 고향에 온 듯 즐기며 운전했다. 중간에 Rest Area에서 쉬었다. 참고로 Rest Area는 화장실이 있고, 속도는 느리지만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이다. 또한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와 바베큐 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Picnic Area는 화장실이 없고 테이블과 의자만 있다. Parking Area는 아무것도 없고 그냥 차를 대고 쉴 수 있는 공간만 있다. Rest Area에서 여행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블루스타를 켜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텍사스의 광야 한 가운데서 끓여먹는 라면맛... 평소에는 라면을 거의 먹지 않는 나이지만, 거기서만큼은 참 맛있었다.
저녁 11시 정도에 도착하리라 예상했었는데, 다행히 80마일의 속도를 유지한 끝에 9시 30분 정도에 집에 도착했다. 짐을 내려 놓고 대충 정리하고 누운 침대... 역시... 내 집이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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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었던 Palm Springs의 숙소)
Palm Springs는 말 그대로 Palm으로 가득찬 작은 도시였다. 참 이국적인 이 도시를 즐겨보지도 못하고 다음 경유지인 El Paso로 향했다. 하루 종일 달렸다. 79마일의 속도로... 중간에 기름을 넣고 휴게소에서 식사를 하는 것 빼놓고는 계속 달렸다.
저녁 늦게 El Paso에 도착했다. 11시 정도 된 줄 알았는데, 아직 10시였다. 미국을 동에서 서로 여행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혼동되었다. 내가 속한 Central Time, Mountain Time, Pacific Time zone을 오갔을 뿐만 아니라, Daylight Saving이 시작된 직후라 더 혼동되었고, 더구나 Daylight Saving에 참여하지 않는 Arizona를 중심으로 여행했기 때문에 무지하게 헷갈렸다. El Paso에 도착한 뒤 이제 텍사스로 돌아 왔으니 이제는 어스틴 시간으로 살면 되겠다고 안도했었는데, 텍사스의 서부 끝인 El Paso는 텍사스의 도시였지만 텍사스 시간인 Central Time을 따르지 않고 Mountain Time을 따른다는 것을, 도착해서야 알았다.
어쨋든 여행의 마지막 숙소인 El Paso의 한 호텔에서 푹 쉬고, 다음날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엘파소한인침례교회로 향했다. 참고로 El Paso에서 오스틴까지는 10시간 정도가 걸린다. 9시 30분에 출발한다 하더라도 저녁 7시 30분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간에 한 번도 안 쉴 경우에... 아침 8시 30분에 1부예배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목표로 준비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내가 늦게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교회에 9시 10분 정도에 도착했다. 하나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 아무리 여행중이라지만, 그리고 아무리 일찍 출발해야 한다지만 예배에 있어 이건 너무했다는 생각에 정말 속이 많이 상했다. 예배가 뒷전으로 쳐지는 상황...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준비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형식화 되는 이 상황... 그리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차를 타고 가면서 아내에게 늦게 도착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음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문도 모두 잠겨 있었다. 예배를 드리고 있거나 드렸다는 흔적이 전혀 없었다.
'왠일인가?'
속으로 혼자 생각하며 교회를 둘러보고 있을 때, 어떤 나이드신 미국인 부부가 차를 타고 도착했다. 알고보니 그분은 그 교회의 영어예배 담당 목사님이셨다. 그분의 말씀이 원래 8시 반에 1부예배가 있는데, 한국인 목사님이신 담임목사님이 베트남 단기선교를 가시는 바람에 그 주는 1부예배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2부예배는 영어예배이고, 3부예배가 원래 대예배라고 설명해 주셨다.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아내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2부예배에 Full로 참석하자고 했다.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흔쾌히 동의했고, 우리 가족은 한인2세들과 몇몇 미국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고,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린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기쁨이 넘쳤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난 직후, 우리를 환대하며 3부예배에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 적극 권면하는 한국인 교인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오스틴으로 향했다.
오스틴으로 오는 길... 여전히 황량한 광야... 그런데... 이제는 그 광야가 고향처럼 느껴졌다. 그 "광야"가 뉴멕시코나 아리조나의 광야에 비해서 얼마나 나무가 많은지... 얼마나 푸르름이 더한지 깨달았다. 고향에 온 듯 즐기며 운전했다. 중간에 Rest Area에서 쉬었다. 참고로 Rest Area는 화장실이 있고, 속도는 느리지만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이다. 또한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와 바베큐 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Picnic Area는 화장실이 없고 테이블과 의자만 있다. Parking Area는 아무것도 없고 그냥 차를 대고 쉴 수 있는 공간만 있다. Rest Area에서 여행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블루스타를 켜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텍사스의 광야 한 가운데서 끓여먹는 라면맛... 평소에는 라면을 거의 먹지 않는 나이지만, 거기서만큼은 참 맛있었다.
저녁 11시 정도에 도착하리라 예상했었는데, 다행히 80마일의 속도를 유지한 끝에 9시 30분 정도에 집에 도착했다. 짐을 내려 놓고 대충 정리하고 누운 침대... 역시... 내 집이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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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32:00
[펌] 은혜...
(교회 게시판에 제가 올린 글입니다.)
은혜란 무엇일까?
소위 "은혜받았다"는 말로 자주표현되는 그 은혜란 무엇일까?
'주일 예배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 부흥집회 때 은혜를 꼭 받아야 하는데...'
'이번 설교는 은혜가 안 되네...'
'찬양을 부르며 충만한 은혜를 느꼈어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은혜란 내 마음 속에 느끼는 어떤 좋은 감정, 특별한 감동, 감정적 고양, 혹은 맺혔던 것이 풀리는 것같은 '느낌'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배나 부흥집회, 찬양집회 등에 참석하면서 우리는 그 '은혜'를 기대한다. 찬양인도자나 설교자는 그 은혜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자세이며, 그 기대에 충족하는 설교자, 혹은 집회를 '좋은' 집회 혹은 설교자, 그렇지 않은 경우를 '좋지 않은' 혹은 '문제 있는' 집회 혹은 설교자로 간주한다.
이것은 비단 성도들 뿐만이 아니다. 설교자나 찬양인도자 또한 그런 관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다. 감동을 불러 일으킬만한 적절한 예화, 삶에 와 닿게 하기 위한 성경 풀이, 고민이나 걱정, 삶의 문제들에 대한 성경의 솔루션 등, 설교자는 그의 메시지가 각 사람에게 피부에 와 닿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소위 청중들이 '은혜'받은 듯한 결과가 나왔을 때는 '성공적' 설교라 자찬하고, 반응이 좋지 못할 때는 '실패한' 설교라고 스스로 자책한다.
이렇듯 모든 집회에서 '은혜'는 빠져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은혜를 받기 위해 모이고, 은혜를 끼치기 위해 집회를 준비하고 인도한다.
은혜가 중심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그 '은혜'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감동'과 같은 것인가? 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하는 그 어떤 것, 내 마음을 찡하게 하거나, 뭉클하게 하거나, 아니면 뭔가 회복되게 하는 그 어떤 '느낌'인가?
모두가 그렇듯 집회에서, 혹은 찬양이나 성경이나 기도를 통해서 기대하며 얻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인가?
잔뜩 기대하고 참여했던 수련회에서 아무런 감동이나 특별한 느낌을 받지 못했을 때, 실망하며 그 '은혜'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건 소극적으로건 간에) 원망하는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의무가 있는 그 어떤 특별한 것인가?
성경적으로 볼 때 은혜란 주는 자의 뜻을 따라서 자격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 (많은 경우 값비싼) 선물(혹은 좋은 것)이다. 은혜는 네 가지의 요소로 구성된다.
1. "주는 자의 뜻을 따라서"
은혜는 근본적으로 주는 자의 뜻에 달려 있다. 그것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는 자가 기뻐하는 대로, 주고 싶은 대로 주는 것이 은혜이다. 만약 그것이 의무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를 베푸는 기준은 "주는 자의 기뻐하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 기준은 결코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기준이 강요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의무가 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할 때,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비유를 읽으면서 대부분 그 비유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은혜는 은혜를 베푸는 자가 기뻐하는 뜻에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신다. 몇 시간을 일했건 간에,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공평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은혜는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서운해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처사이다.
2. "자격없는 자에게"
은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그것을 받는 자가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는 것... 그것이 은혜다.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받는 것은 보상이지 은혜가 아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제일 먼저 와서 일을 시작한 자들은 하루 종일 일했고, 그에 정당한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것은 정당한 보상이다. 그것이 은혜가 될 수 없다. 물론 이 비유에서 그들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할 일이 없이 놀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은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만 놓고 본다면 처음와서 온 종일 일한 그들은 정당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일꾼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이 베푼 은혜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도, 그분으로부터 좋은 것을 기대할 자격도 없는 자라는 것을 망각한다면, 나는 이미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인 것이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은혜라는 것...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자에게 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 자체가 은혜이다.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그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데나리온이 온전히 주어졌다는 것을 망각한 삼시, 육시, 구시에 온 일꾼들은 자신들보다 늦게 온 11시의 품꾼들이 자신들과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에 대해서, 아니, 그들보다 자신들이 더 많이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분을 낸다. 그들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처사에 대해서 '공평'하지 못하다고 항의하기까지 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만다. 그들에게는 은혜가 없는 것이다.
3. "값없이 주어진"
은혜는 값 없이 주어진다. 댓가가 없는 것이다. 포도원의 비유에서 모든 품꾼들은 일을 했지만, 포도원의 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노동이었다. 사실상 첫번째로 불러온 품꾼들의 노동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주인은 "장터에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줄 구실을 찾기 위해서 그들을 고용했을 뿐이다. 그에게는 그들의 노동이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일량에 관계 없이 그들이 하루를 살기 위해 필요한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이다. 그것은 값없이 주어진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하나님께 뭔가들 드림으로써 주어지는 반대급부의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자격이 없고,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은혜에 보답할 아무런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이 은혜이다.
4. 선물(혹은 좋은 것)
은혜는 좋은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품꾼들이 하루에 벌 수 있는 임금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가족이 하루 동안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생명이었다. 주인은 그것을 주기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 다만, 그 '좋은' 것이 내가 판단하는 것과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최선의 것으로 주신다. 그것으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내가 생명을 더 누리도록 하시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신다.
하지만 나는 내 '필요'가 우선이다. 내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 아픈 곳이 낫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내 좁은 소견과 경험에 비추어 좋은 것을 하나님께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시는 대로 '좋은' 것을 주신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엉망이 될 것인가?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고 전지하신 분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주시는 것은 그것이 내 마음에 들던지 그렇지 않던지 간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은혜는 내가 느끼는 어떤 좋은 감정이나 감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격없는 자, 자신이 은혜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자,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차원에서의 좋은 선물을 누리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최고봉, 은혜의 결정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이 흉악한 죄인인 나,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내가 죽어야 할 끔찍한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나를 살리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과 인간 편에서의 가장 비싼 댓가를 치른 선물인 것이다. 자신의 죄인됨(죄성)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긍휼만을 바라며 나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긍휼... 죽어 마땅한 죄인, 탄식하며 애통해하는 자를 품으시고 살리시는 그분의 사랑...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은혜의 감동이 없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에서 은혜를 느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에서 은혜를 찾을 수 있겠는가?
예배를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내가 구하는 은혜가 바로 그 십자가의 은혜인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꿇고 고개를 숙이며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들고 나아오는가?
그것이 진정으로 은혜받는 자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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