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청년부를 맡아 섬긴 이후 매주 토요일은 거의 빠짐없이 말씀을 전한다. 정식 신학교육도 받지 않은 평신도에 불과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아가 설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다. 설교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도 그 부담의 한 원인이 되지만, 그것보다는 말씀을 전하고 섬기는 것 외에 일상의 삶에서 내가 감당해야할 학업 때문에 충분하게 말씀 준비에 시간을 쏟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학업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고, 또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비록 매우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지만...)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말씀 준비에 상당히 큰 제약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말씀 준비하는 시간 만큼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말씀 준비에 전념한다. 물론 일주일 내내 말씀의 주제를 선정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지만, 본격적으로 원고를 준비하는 시간만큼은 완전히 말씀 준비에만 올인한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분이 사랑하는 청년부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살피고, 그것을 글로 정리한다. 거의 하루 온 종일 꼬박 걸리는 작업이지만, 늘 시간이 부족함을 느낀다. 뭔가 준비가 부족한 느낌... 그것이 내가 말씀을 전하러 나가기 직전에 항상 느끼는 아쉬움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약 200번에 가까운 설교말씀을 전하는 동안 거의 항상 그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 주셨다. 아니, 넘치도록 채우고도 남음이 있음을 경험해 왔다. 결국 말씀의 준비는 내가 하지만,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그 말씀의 내용을 내 입술에 담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임을 그 누구보다도 절절히 느낀다. 그것이 말씀 전하는 자리에서 느끼는 은혜이다.

청년부를 떠나간 지체들, 그리고 여행 중에 있는 지체들로부터 내 설교를 녹음해서 웹에 올리거나 자신들에게 보내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내 답은 "무반응"이다. 물론 언젠가부터 내 설교는 녹음되어 보관되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설교를 웹에 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에 있어서 주저하는 마음이 있다. 나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말씀을 전하기 직전에 우리 청년부 공동체에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달라고, 그리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할 모든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날의 예배의 자리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사실 내 이 기도가 내 말씀을 웹에 올리거나 다른 곳에 있는 지체들에게 보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동체인 어스틴 한인침례교회의 청년부 소속의 지체들이 교회 예배당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는 그 참석 인원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주신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특정한 사람을 타겟으로 말씀을 준비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씀 준비가 끝나고 예배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 말씀 주제를 떠 올릴 때, 꼭 그 말씀을 들었으면 하는 지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경험상으로 볼 때,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 떠 올리는 지체들이 그 말씀이 전해질 때 정작 그 자리에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은 그 만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매 예배 때마다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꼭 들어야할 지체들을 어김없이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지체들에 대해서는 그 말씀을 들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시는 것이다. 그분의 종으로 섬기는 나로서는 내 생각을 앞세우기보다는 주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

나는 인터넷에 너무나 많이 떠도는 설교들에 대해서 경계하며,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 물론 인터넷에 너무나 훌륭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나에게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질지, 그리고 그 "훌륭하신" 설교자들의 설교에 익숙해진 귀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목사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주일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에 무릎꿇을 수 있을지... 그것이 가장 걱정이 된다.

(말씀 묵상이나 다른 경로가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 나에게 전달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내가 속한 교회의 목사님이 아무리 형편없는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의 영적 리더로 당신의 목자를 세우셨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자에게 특별한 영적인 리더십과 능력을 주시고, 그를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신다. 그 선포되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듣고자하는 겸손한 자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을 하는 자세인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많은 설교들은 그 설교가 일차적으로 전해진 그 공동체에 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진정으로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에 소속이 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 외의 경우에는 단순히 지식차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고, 많은 경우 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회자의 설교를 비교 평가하고 비판하는 데 사용된다. 그것은 자신에게 매우 해가 될 뿐이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설교를 전혀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자신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이 삶 가운데 역사하며 그 말씀에 인도함을 받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다면, 인터넷을 통해서 듣는 그 설교가 아무리 은혜롭고, 거기에서 많은 도전을 받는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영적인 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청년부를 떠난 지체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회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 가운데 충분한 메시지를 이미 담아 두셨다.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기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교회에서 같은 말씀을 들은 다른 믿음의 지체들과 연합하며, 그 말씀을 중심으로 믿음의 삶을 살며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것이 가장 건강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거기에 내 설교가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필요도 없다는 것이 내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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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Believing in God is believing God!"
내가 존경하는 신학자의 주장이다. 매우 단순하고, 당연해 보이는 이 주장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만, 그분을 "신뢰"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기 때문이다. 그분의 존재를 믿지만, 그분께,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내 삶을 완전히 dedicate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믿음이고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이다. 이 신학자의 주장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께 삶을 맡기는 것(다시 말해 그분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진정 살아계시고, 그분이 왕되시고 주권자 되심을 믿는다면,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순종이 되지 않고, 그분을 향한 인격적 신뢰가 없다면, 그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닌 것이다.

갈대아 우르의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한 말씀, 즉 창세기 12장 1절의 말씀인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과 그에 이은 약속을 받았다. 히브리서 본문에 따르면 "갈 바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떠나는 것은 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그 결국이 어떻게 될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이미 익숙한 고향, 자신의 보호막이되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것을 요구 받은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아브람의 "믿음"은 그 말씀을 들음이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는 것이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으며, 그 말씀을 믿는 것이었다.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그 말하는 자를 신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내딛는 그 발걸음을 믿음이라고 규정하신다.

인간은 익숙한 환경, 예견될 수 있는 미래, 안락한 삶을 선호한다.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낯선 환경, 그리고 불편한 삶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에 있어서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는 후자의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 믿음이 빛을 발하며, 그 상황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내가 섬기는 청년부 안에서 내가 처한 상황... 그것은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청년부의 사역이 어떻게 될지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이다.
내일은 청년부의 영적인 리더들을 선발하는 마지막 날이다. 청년부의 모든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힘든 사역이 바로 목자들을 선발하고 목자단을 구성하는 것이다. 영적인 공동체에서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분의 통로 역할을 하는 주님의 종들을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청년부에 처음 부장으로 섬기기 된 3년 반 전 겨울... 나는 처음으로 목자들을 선발해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어떤 원리로, 누구를 선발할 것인가를 기도하는 중에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90년대 중반에 있었던 어느 작은 "사건"을 하나 떠 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내가 속해 있던 교회의 믿음이 성숙했던 한 자매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해 준 말이었다. 나보다 네 살 정도 많았던 그 자매는 어느 날 나를 불러 놓고 조용히 말했다. 목회의 길로 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라고... 그러면서 별 생각없이 목회의 길로 들어서는 세태에 대해서 한탄을 하면서 말했다. "목회의 길로 가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당사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부르심을 받고 소명을 받아야 하며, 또한 교회 내의 형제자매들로부터 진지한 권유가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속한 교회의 영적리더인 목회자로부터 진지한 권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함부로 목회의 길로 가는 일이 없다." 그분의 말의 요지는 같은 청년부의 지체인 자신으로부터 진지한 권면이 있기 때문에 이제 나머지 둘에 대해서 확인해 보라는 말이었다.

그분의 말은 그 당시 상당히 충격적이었으며, 그분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었다. 나는 그분의 원리를 목자선발에 도입하기로 했다. 그래서 공동체 내의 지체들이라 할 수 있는 현임 목자들에게 일정기간 진지하게 기도하게 한 후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목자로 서기를 원하는 형제자매들을 추천하게 했다. 그 추천을 받고 각 후보에 대한 현임 목자들의 의견을 모은 후, 공동체의 영적인 책임자인 내가 일정기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 안에서 확신이 드는 지체들에게만 목자로 섬길 것을 권유하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낸 후 당사자들이 일정기간 동안 하나님께 기도한 후 섬길것인지의 여부를 부장인 나에게 통보함으로써 결정이 되도록 했다.
이 과정 중에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만 묻고 기도할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내용도 입밖에 내지 않도록 주의를 줬고,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 제대로 잘 지켜지고 있다.

목자의 선발 과정은 부장인 나로서는 우리 공동체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다. 내 생각이 있고, 내가 함께 섬기고 싶은 지체들이 있고, 또 공동체를 이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목자들의 수가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오로지 다양한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여쭙는 가운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 그리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과정이 바로 목자를 선발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선발되는 목자의 수와 그들의 특성을 통해서 향후 일년 동안 청년부의 사역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 모든 프로그램과 모든 시스템이 종속되도록 하였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에 목자로 섬기던 지체들도 같은 기간 동안 목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직도 유효한지를 진지하게 기도해보고 만약 그 부르심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 목자의 자리에서 내려 오도록 재헌신을 하도록 했다.
새로운 목자를 선발하는 과정이건, 기존의 목자의 재헌신 과정이건 간에 부장인 내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가 재헌신을 할지, 누가 새롭게 목자로 설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권유한다거나 설득의 과정이 완전히 배제되고(모두 기도하고 있는 요즘, 나는 목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을 삼가고 있다. 그들의 결정에 있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하나님과 기도가운데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이 전부다. 나는 그 결과를 통보 받을 뿐이다.

사실 이 모든 과정은 내가 기도하면서 확립한 과정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가장 힘든 것은 내 자신이다. 그것은 한 치 앞이 내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떠나는 것처럼, 향후 1년 간의 청년부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두렵고 어렵다. 하지만, 이것이 옳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제도를 고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영적 리더들을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를 직접 책임져 달라고 매달린다. 능력없고, 무식하고, 판단력이 흐린 내 자신을 믿지 않고, 전능하시고, 무한한 지혜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으니 그 결과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내일 하루 동안... 그 동안 기도해 왔던 모든 지체들이 나에게 그 결과를 통보하는 날이다. 두렵지만, 기쁨의 날이 되리라 믿는다. 내가 원하고 기대하는 대로 되어서가 아니라, 그 날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 공동체 안에 선포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뜻이 내 바램과 기대를 완전히 져버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뜻은 언제나 지극히 선하시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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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감사...

일년 내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터져 나오는 재채기로 고생합니다. 1996년부터 시작된 알레르기는 1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네요... 14년 동안 아침마다 콧물과 재채기로 고생하다보니, 이것도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슨 알레르기인지는 모르지만, 아침마다 나를 괴롭히는 이 재채기 때문에 때로는 매우 불편하기도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작해서 오전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약화되고, 점심 때 즈음에는 멀쩡해집니다. 심할 때는 하루 아침에 큰 두루마리 화장지의 2/3를 소모할 때도 있고, 많이 좋아질 때에도 상당히 많은 양의 화장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제 주위에는, 특히 아침에는, 화장지가 꼭 필요합니다. 화장지가 없을 때는 마음이 불안해지는 '금단현상' 생기기도 하지요.
오늘 아침에도 끝없이 터져나오는 재채기 때문에 고생했고, 고생하고 있습니다. 알레르기를 고쳐보고자 전에는 한약방에도 갔었고, 알레르기 약도 먹어 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네요... 그래서 불편하긴 하지만 죽을 병은 아니니 그냥 달고 삽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에, 알레르기가 암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들이 백혈병에 걸릴 확률이 40%가 낮고, 각종암에 걸릴 확률이 현저히 낮다고 하네요... 연구진들이 아직은 그 원인을 밝히지는 못했지만, 알레르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 몸이 스스로의 면역력을 현저히 높이는 것이 그 이유가 되지 않을까 추측한답니다.
그러고 보면, 알레르기도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긴 있는가 봅니다. 알레르기가 심한 저도 암에 걸려 죽을 확률이 많이 떨어진다고 봐야겠지요? 암이 얼마나 심한 고통 가운데 사람을 죽게 하는지를 잘 지켜본 저로서는 알레르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네요...
전에 언젠가, 암에 걸려 죽는 사람은, 평소에 잔병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암은 정말 무서운 병이지만, 굳이 암이 "고마운" 점을 찾는다면, 적어도 암에 걸리기 전에는 몸을 힘들게 만드는 잔병들이 없이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겠지요..

세상 어떤 것이든지, 좋은 면과 좋지 않은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서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 가다온 행복을 누리느라 하나님을 잊고 그분 앞에서 교만한 것은 지극히 어리석고 그 지식에 제한이 너무 많은 인간이 쉽게 저지르는 죄악인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그것은 지극히 선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어려움 가운데서도 감사의 제목을 찾고,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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