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10월 8일). 이모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급히 광주로 내려갔다.
지난 3일부터 어머니께 극심한 통증시 시작됐다는 것. 너무 아파서 집 근처의 큰 병원을 찾았는데, 진료 후 바로 당장 호스피스병동으로 들어 오라고 했다는 것. 그 의사 말로는 (오판이라고 믿고 싶지만) 2주 밖에 안 남으셨다는 것.
자식들이 염려할까봐 그 사실을 함구하고 계셨다가, 현재 사시는 집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지난 9월 첫째주에 약 8개월간 어머니의 췌장암 치료를 하던 건국대병원으로부터 더 이상 손 쓸 것이 없다며 사형선고를 듣고 광주로 내려가신 어머니. 췌장암 환자 중에서 매우 드물게 잘 버티고 계신다며 담당 의사선생님이 신기해 하던 어머니에게 갑작스럽게 떨어진 그 선고에 얼얼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그리고 그분 말씀으로는 앞으로 3개월이라는 예상을 듣고 그래도 조금은 시간이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리 빨리 진척될 줄은 몰랐다.
앞으로 뵐 시간이 얼만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족들과 함께 내려갔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생의 끝이 가시권에 들어 왔다는 사실이 나를 멍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이후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인가?
광주. 어머니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셨다. 바로 그 병동에서 2007년에 아버지를 보내신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병동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이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바램은 지금 사시는 집에서 최대한 버티다가 들어 가시겠다는 것. 들어 가시는 그 순간까지 평상시의 삶을 살고 싶으시다는 것.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모인 자식들 중 어느 누구도 어머니를 만류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그것이 가능한 길을 찾는 것일 뿐...
어머니와 형제들을 뒤로하고 어제 밤에 올라왔다.
내 기억 속에는 나에게 사랑을 알게하시고, 희생을 알게하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영원하겠지만, 이제 살아계신 어머니를 뵈올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어머니의 상을 치를 때까지 수업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어머니 곁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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