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제 글이 아니라 존경하는 역사학자이신 이만열 교수님께서 그분의 페이스북에 올리신 것을 퍼온 것입니다. 너무 좋은 내용이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허락도 안 받고 퍼날랐습니다. 이만열 교수님께는 죄송...
=============
[먼저 그 의를 구하라] 오늘 오후 3시부터 ‘함석헌읽기’강독회가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모였다. 이 강독회는 매월 한 번 모여 <함석헌저작집>(한길사, 2009) 전 30권 중 1권씩을 읽어나가고 있다. 이번 모임에서는 김제태 목사의 인도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는 제목의 제 18권을 읽고 토론했다. 이 책에는 1927년 7월 <성서조선> 창간호에서 1940년 3월 제 134호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이 쓴 32편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는 글은 32편의 글 중 맨 처음에 나오는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6:31-33절에 나오는 다음의 성경 귀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개정개역판)
함석헌의 글에는 위의 성경 구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에서 ‘그의 나라’는 빼 버린 채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고만 언급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1927년 ‘일제강점하’라는 사실도 그 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제는 일본 이외의 어느 나라도 용납하지 않으려 한 때가 있었다.
함석헌은 그 시대에 이런 제목의 글을 쓰면서 많이 망서렸다. 당시 조선은 이 말을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로 양식 삼아가며 북만(北滿)으로 들어가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이 말로써 전송할 이가 몇인가. 벗은 허리를 꼬부리고 모욕을 옷 삼아 현해탄을 건너가는 자매를 보고 이 말로써 진정한 위로를 드릴 이가 과연 몇인가. 없다.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 그 안에 새 생명이 창조된 이를 제하고는. 만일 그리 말하는 이가 있으면 그는 양심을 속이는 자라고 꾸짖음을 들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미친 자라고밖에 인정을 받지 못하리라. 실로 이 가르침을 그대로 믿기에는 우리 현실문제는 너무 절박한 듯하다. 너무나도 명백한 듯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체하고 복음을 믿기는 너무나도 무지한 듯하다.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듯하다. 너무나도 고집인 듯하다. 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개인 중심적이요 너무나도 고식적이요 너무나도 동포애가 없는 듯하다.”
함석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그 의를 구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이렇게 강조했다. “현실문제가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지식이 아무리 긍정을 아니 하더라도 복음은 진리다. 어찌할 수 없이 진리다. 참 생명을 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과 민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근역(槿域:조선)의 자녀들아, 의를 구하자. 생명을 위하여 먼저 그 의를 구하자 - 현실이 아무리 급박한 듯해도. 이는 우원(迂遠)하고 어리석은 말 같고 점점 더 패멸로 인도하는 말 같으리라. 끌어올리는 두레박줄을 놓으라는 것같이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듯하리라. 그러나 진리다. 생명에 이르는 진리다. 근역의 자녀들아, 오늘날 우리는 불행에 우는 자다. 환난의 물결은 우리 위를 넘고 비탄의 부르짖음은 우리 입에 가득하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저주하고 싶고 온갖 것을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그로 인하여 살길은 아니 온다. 구원은 오직 의의 신으로부터 온다. 그의 의를 구하라. [요한계시록 21: 3-4절 인용] 흰옷 입은 근역의 자녀들아, 그 의를 구하여라. 네 입은 옷은 정의의 흰 빛이 아니냐. 네 맘도 그와 같이 되기를!”
이 글을 쓰던 시기의 함석헌(1901-1989)은 27세에 불과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기 1년 전, 그는 김교신 등 선후배 동지들이 동인지로 간행한 <성서조선> 창간호에 이 글을 발표했다. 글은 당시 일제의 검열을 피할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식민지 조선의 비참한 현실 묘사와 더 절절한 호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비참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그 비극적 절망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먼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희망을 강조했던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함석헌이 강조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당부는 오늘날에도 들려져야 한다.
오늘 강독회에서 토론하면서 필자는 내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함석헌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의 사회경제적 억압과 궁핍 속에서도 성경의 생명의 말씀을 씨알들에게 소개하고 용기와 희망을 북돋우려고 한 것은 놀랍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성경의 그 대목을 여러번 읽었지만 그 말씀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젊은이들이 사악한 정권 하에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등의 사회경제적 욕구에만 관심을 갖고 스펙쌓기에만 열중하지, 자기 사회의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하는 현상을 보면서 이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다. <복음과상황> 2011년 5월호애 ‘빚진자들이 무임승차까지 한다면’이라는 권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취업전선에 몰두하면서 역사의식마저 상실한 듯하다. 젊은이들을 그렇게 만든 기성세대로서 무력감과 자괴감을 통감한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이 용서받거나 변명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대 풍조도 경제 이외의 것에는 신경쓰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옥죄고 있어서 무기력증을 반전시킬 분위기 조성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이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경제도, 정의로운 사회도 기약하지 못한다. 이럴 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는 약속의 말씀에 용기를 얻는다. 그렇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결단 없이는 이 정권, 이 암울한 세대가 파놓은 깊은 수렁을 헤쳐나지 못한다. 이승만정권이나 유신독재체제, 신군부파쇼체제의 엄혹함 속에서도 학생과 젊은이들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불의에 항거하면서 자기 몸을 던졌다. 그것이 민주화를 가져왔고 산업화를 이끌었다. 그 때도 취업자리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암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의 비전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데서 찾았다. 그것은 곧 스스로의 희생을 의미했다. 그 요구에 먼저 순응했다. 자기 몸을 불사르는 젊음들의 희생이 이만한 정도의 오늘을 이룩했다. 호구지책과 안일한 도생(圖生)만을 위해 젊음을 도로(徒勞)하다가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약속한 ‘이 모든 것’도 기약할 수 없다. 무임승차를 즐기는 공동체에 무슨 미래가 약속될 수 있겠는가.”
함석헌은 1927년 일제 강점하 자기 동족이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젊은이다운 혈기를 전혀 노출시키지 않은 채 이 글을 썼다. 이를 보고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27세에 주목했던 그 말씀이 필자에게는 이 나이에 눈에 띄었으니 그것도 부끄럽지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후반부의 사회경제적 약속을 보고서야 그 앞에 나오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으니 그건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함석헌이 식민지하의 상황에서 ‘먼저 그 의를 구하라’고 한 것은, 민주화 산업화 시대에 ‘먼저 그 의를 강조한’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벌써 기독교 사상가의 가능성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