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젊었을 때는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인생의 가장 좋은 뭔가가 있을 것 같은 환상에 젖어들기도 했다.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사랑으로 밤에 한 숨도 잠을 못 자기도 하고... 사랑은 특별한 그 뭔가가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나 중심적이었을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누군가 내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좋아하는 마음이 들고,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 내 모든 것을 내어주고자 하는 마음도, 그 전에 나를 향한 이기적인 욕구의 충족이 있고난 다음에 생기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기심의 다른 모습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나중에 그 사랑하는 상대로부터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것이 채워지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그 "사랑"이라는 것이 내 안에서부터 점차 사라져가고 급기야는 완전히 바닥을 보이기까지 고갈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수 많은 커플들의 이혼은 결국 "나와 다르기 때문"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오히려 상처만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궁극적인 원인이다. 그들에게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성경의 사랑은 그것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얻으실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 분의 원수가 되어서 그 심장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그 분을 증오하고 있을 때,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다. 나를 사랑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얻으신 것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런 죄도 없으신 가운데 십자가에 고통 당하게 하시고 돌아가시게 하는 것 뿐이었다.
성경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성경의 사랑은 나에게 깊은 상처가 있을지라도, 상대방이 영적인 생명 가운데로 나아오고 그 상대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모든 마음과 그에 따른 헌신과 희생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일 1:2)
성경적인 사랑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상대만 있을 뿐이며, 그 상대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는 것을 바라는 소망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왜냐하면 죄악된 인간은 어떤 경우에서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범죄한 것도 교만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꽃피어난 이기심 때문이다. 자기가 높아지기를 원했고, 자기에게 좋은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죄악된 인간의 본성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기심의 흔적은 매우 진하게 남아 있어서 없애기가 힘들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나의 본성과 정면으로 반대가 된다. 나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차원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 내가 내 안에 성령을 모셔야 하고, 그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순전함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형제자매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속에는 나의 이기심이 도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이기심은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을 맺을 수가 없다. 내가 사랑하고 섬기려는 그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만 줄 뿐이고, 또한 나도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사랑하는 자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여야 한다. 성령께서 내 안을 온전히 채우시고, 나를 사로잡으실 때만, 생명과 치유와 기쁨과 감사를 낳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성령 하나님! 나를 온전히 다스려 주시고,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목적

어제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을 위해 사는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매우 근본적인, 그리고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사실, 그것은 내가 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정해 주신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생의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적지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감으로써 나아가는 존재들이다.
성경은 인간의 창조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창조 목적이라면, 바로 내 인생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약을 통해서 내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 도구들은 참 많이 있다. 나로서는 현재 교수가 되는 길을 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청년부를 섬기는 자로 서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목적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바뀌면 안된다는 것이다. 교수가 되는 것이 내 인생의 최대의 목표, 아니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없다. 되어서는 안 된다. 청년부장으로써 성공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그것들은 단순히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목적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언제든지 바뀔 수가 있다.
미국에 오기 전에 컨설팅을 했었다. 컨설팅을 위해 기업을 방문하면 기업에서 내건 표어나 기업의 목적들이 있다. 대부분 사원의 복지, 사회기여, 더 나은 미래 창조 등 거창한 구호들을 내건다. 그것이 그 회사의 존재 목적이라고 표방하긴 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책결정이나 회사에서 실재로 일어나는 것들을 보면 그것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에서 내 건 회사의 존재 목적에 대한 statements는 대외용일 뿐이다. 사실 기업들의 실재 존재 목적은 "돈을 더 많이 번다"는 것이다. 회사 내의 모든 시스템과 모든 의사결정은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분명히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산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떠벌리고 다닌다. 그런데 내 삶이 진정으로 그것에 맞추어져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단순히 그것은 겉으로 표방하는 것이고, 실재로 내 삶에는 다른 목표를 붙잡고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면, 그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삶이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설령 그 인도하시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 알지 못할지라도) 묵묵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삶이다. 나는 내 삶이 그런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거룩과 경건의 모습...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거룩한 삶, 경건한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당연히 드러나야하고, 당연히 자라나야할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방법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40일을 함께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전염"되고 말았다. 그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얼굴에는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나타났다. 유대인들이 모세를 보고 두려워 했던 것으로 봐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거룩한 삶, 경건한 삶은 모세처럼 하나님과 근접 거리에서 동행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갖는 동안에 그의 삶에는 자연스럽게 광채가 날 수 밖에 없다. 그 광채는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광채이며, 그 광채는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을 선포하는 광채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서 뿜어져 나와야 하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과연 남들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이 진짜 하나님께 전염된 거룩한 빛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혹은 남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청년들을 섬기는 자리에 있고, 말씀을 전하고, 권면하는 자리에 있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주어진 거룩, 경건의 모습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리더의 자리에서 섬기다보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과 권면의 수준이 나의 진정한 내면의 모습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런 착각 속에서 나는 스스로 경건과 거룩의 모습을 띈 가짜 껍데기를 두껍게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 두께가 두꺼워져 갈수록 그 속에서는 썩어서 냄새나는 뼈다귀와 부패해가는 살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일갈하셨을 때, 그것은 그들의 존재의 핵심을 꿰뚫는 말씀이었다. 그들이 인간적인 경건한 신앙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동안, 그들의 내면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치유될 기회를 잃어버린 채 완전히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닌가? 거룩하고자 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은 내 안에 넘쳐나지만, 그것이 나의 노력과 나의 힘, 때로는 나의 위선으로 "만들어져가는" 내 신앙의 껍데기가 아닌가?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이, 그냥 동행하고 있다는 확신과 생각 속에서 그분 없이 살아가는 데 너무 익숙한...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불쌍한 인간은 아닌가?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확실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본다.
신앙의 껍데기를 벗어버려야 한다.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는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께서 이 시간 나에게 뭐라고 하시는가이다. 그것은 내 삶 속에서 내가 하나님과 "실재로" 얼마나 동행하고 있는지, 하나님 당신과 내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긴 시간을 만나고 있는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회칠한 무덤이여! 나에게서 떠라가라!"고 저주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 스스로가 하나님께 내 있는 모습 그대로 들고 나아가 무릎꿇고 고쳐달라고 외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취중진담 블로그를 시작합니다.

취중진담 블로그를 시작합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글을 적어 보려 합니다. 되도록이면 은혜와 묵상의 나눔, 진리의 나눔이 되기를 바라지만, 때로는 푸념과 어려움, 감상적인 글들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어쨋든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 그리고 친구들과 제 생각을 나누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