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인도 하셨네..."

찬송가 43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일 당한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아-멘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신실하심을 내 인생으로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신실하신 인도하심을 정말로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인도하심에 내 인생을 걸어야 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그분께 의지해야하고, 그분만이 내 인도자가 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한다.
그것은 그분께, 그분의 말씀에 내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내 삶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끊고, 그분께 100% 의지할 때, 분명히 그분은 나를 인도하신다. 그것도 신실하게...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며...

마지막 날, 천국으로 달려가며 나는 외치련다.
"예수 인도하셨네! 예수 인도하셨네!"

진리 하나...

누군가에 대한 정죄가 내 안에 있다면,
누군가의 부족한 부분들이 내 눈에 잘 보인다면,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잘 받는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그 만큼 멀어져 있다는 증거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죄악된 모습이 더 분명히 보이고,
내 부족한 부분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고,
내가 주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준 끔찍한 상처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에,
남들에 대해서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너무나 심각한 내 자신의 죄악에 견주어 볼 때, 다른 사람의 것은 보잘 것 없이 작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진리이다.

영원한 죄인...

(교회 게시판에 올린 제 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처리하신 능력이며,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믿음의 가장 기초에 해당하는 이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았고, 이제는 만왕의 왕이시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 가운데, 천국을 소유한 자로 살게 된 것은 이 세상 그 어느 복보다도 큰 복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용서받은 자. 죄사함을 받은 의인...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타이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진정으로 거듭난 영혼에게 "죄책감"은 있을 수 없는 것일까요?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고백이 점차 사라질 수 밖에 없을까요? 죄문제는 십자가에서 해결 되었으니, 이제는 다른 문제, 혹은 하나님을 믿는 긍정적인 면에 집중해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예"와 "아니오"가 동시에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죄책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정죄로 인한, 사망으로 이끄는 죄책감입니다. 이 죄책감은 사탄이 이용하는 죄책감이며, 이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당하며, 결국 영원한 심판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죄책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에서 오는 정죄의 저주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정죄의 문제, 죄책감의 문제, 결국 죄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죄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두번째 죄책감은 율법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 죄에 노출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마암아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도 죄의 유혹에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방법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안타까와 하시기도 하는 모습으로 다가 오시기도 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죄의 자리를 떠나서 아버지의 은혜의 자리, 거룩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나오는 죄책감이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가운데 정죄의 사슬에 더 묶이게 함으로써, 더 확실한 마귀의 종이 되게하는 효과가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정죄는 죄의 자리를 속히 떠나서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도록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내가 특별히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점차 나아감으로써 생겨나는 죄책감(죄인식)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가는 가운데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그 빛이 더 강렬해짐으로 인해서,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내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에 생기는 죄책감입니다. 그전에는 빛이 약해서, 혹은 빛을 가리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드러나지 않았던 내 존재의 지저분한 모습들이 서서히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죄책감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것들, 그 전에는 결코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그분을 더 알아감으로써, 이제는 죄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죄인식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더 확실하게 무릎을 꿇도록 인도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할수록, 십자가가 위대해져 보이고, 그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더 커보이고, 그런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위대해져 보입니다. 이런 죄인식은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을 더 내려 놓게 하고, 주님을 붙들게 하며, 주님께만 소망을 두게하고, 따라서 보다 더 확실하게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을 드리게 됩니다.
이런 죄인식은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며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영적 감수성이 더 발달하여 예민해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란 역설의 연속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종이 된 정도 만큼, 자유를 누립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만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합니다. 내가 내 삶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을 때,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됨을 인식한 만큼, 내 삶은 거룩해져갑니다. 수많은 위대한 영적 선배들이 그들의 신앙이 성숙해 갈수록 자신의 죄인됨을 더 처절하게 고백하고, 죄와 더 치열하게 싸웠던 것은 그들의 삶에서 죄의 절대량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 주님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그들의 삶은 더욱 정결해져가고, 더욱 거룩해져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숙, 다시 말해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주님 앞으로 불려갈 때까지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죄인"인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진정한 축복입니다.

인생에서 내가 가장 성취하고 싶은 것...

"The things I had fought for and burned my midnight oil for had failed me. Success--I despised it. Recognition--it was dead ashes. Society, men and women above the ruck and muck of the waterfront and forecastle--I was appalled by their unlovely mental mediocrity. Love of woman--it was like all the rest. Money--I could sleep in only one bed at a time, and of what worth was an income of a hundred porterhouses a day when I could eat only one? Art, culture--in the face of the iron facts of biology such things were ridiculous, the exponents of such things only the more ridiculous."--Jack London

Jack London은 그 짧은 생애를 살면서, 세상의 성공을 위해 초인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이고, 그로 인해서 세상의 명예와 부를 누렸던 사람이다. (socialist로서의 그의 신념과는 상반되게) 그는 명예와 부와 여자들 외에는 아무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한 전략적 수단에 불과했다.
그가 말년에 고백한 고백이 바로 위의 글이다. 그 글에서 허무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Martin Eden의 주인공이 소설을 통해서 유명해진 후, 유람선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것처럼, 무지개를 좇아 사력을 다해 달려 온 그 끝에 보이는 허무함. 그 허무 앞에 무너지는 인생을 볼 수 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London과는 대조적으로 사도바울의 삶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평생을 바쳐왔던 그리스도의 종된 삶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찾은 사람이었다.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어느 모델을 따라갈 것인가? 세상의 성공여부와 물질의 다소 여부를 떠나서 허무하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참으로 의미있고, 소망이 있는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

내 인생...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 이 소중한 인생을 부와 명예와 안락이라는 세상의 신기루를 좇아 사는 어리석은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다.
마치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알리려 마라톤 평야를 죽을 힘을 다해 질주한 뒤 아테네 시민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알리고 죽었던 한 병사의 전설처럼 살고 싶다. 그리스도 앞에 가는 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 소진하여, 그분 앞에 쓰러지는 인생을 살고 싶다. 내 존재의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그분을 위해 모두 쏟아 붓는 인생을 살고 싶다.

설교말씀

주일...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무나 관성적으로 말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 속에 진리가 있다. 듣는 사람이 인정하건 안하건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님을 영접하고 난 이후 나는 참으로 많은 훌륭한 설교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분들을 통하여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영적으로 자라왔다.
사실 "훌륭한" 설교자라는 표현은 왠지 어색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선포자가 누구인지 상관 없이 예배 때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훌륭하다"는 것의 정의가 선뜻 와 닿지 않게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훌륭하다"는 것의 정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도록 준비된 설교자들을 일컫는다. 사실 그 만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한다는 것은 모든 설교자들의 과제이며,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담을 만큼 깨끗한 그릇인가와 그 설교자의 관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진리의 말씀이 성도들에게 잘 흘러가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씩 막히면서 흘러가는가를 결정한다.

내가 속한 교회의 목사님... 목사님 당신께서는 본인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을 매우 꺼려하시고 좋아 하지 않으시지만 그분의 설교를 들을 때면, 마음 속으로 참으로 깊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저런 설교를 하실 수 있을까?'

내로라하는 뛰어난 설교자들을 많이 접한 내가 볼 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설교자보다도,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흘러나가는 통로로서 거의 막힘이 없다.

사실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 처음 나오기 시작했을 때, 목사님의 설교는 참으로 지루했다. 설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예화, 열정, 요점정리, 성도들과의 non-verbal communication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시지 않는 우리 목사님의 설교는 내용은 매우 훌륭했지만, 그 포장이 너무 엉성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내가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자체를 전하는 데 있어서 그런 포장들은 오히려 그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릴 뿐이라는 것, 진리는 그 자체로 powerful하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 목사님의 목회철학, 설교철학은 분명하시다. 오직 복음! 오직 복음! 바로 그것이다. 모든 말씀은 복음으로 귀결되며,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로 해석이 되며, 복음이 기반이 된다. 어떤 본문이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석의 렌즈가 된다. 그분이 전하시는 어떤 말씀에서도 결코 복음이 빠지는 일은 없고, 복음이 중심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많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사님께서 바로 그런 철학 아래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진리에 의지하며 그것을 포장없이 그대로 전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주일 설교 말씀은 나에게 생명이 되었고, 그 어느 것보다 귀한 것이 되었다.

내가 청년부를 섬기게 되고, 매주 청년부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면서, 나는 내심 목사님처럼 말씀을 전해보리라 다짐했고 희망했었다. 하지만 3년이 조금 지난 지금... 내 스스로 느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목사님의 설교에 그 발치 만큼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포장없이 복음의 진리를 전한다는 것이 생각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달으면서, 나는 우리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특별하게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시면, 그런 설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주일 설교를 대하는 내 마음 자세가 확실히 달라졌다. 물론 그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귀기울여 들은 설교말씀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납작 엎드리는 마음으로, 천상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내 자신이 설교자가 되면서, 진정으로 그 설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오늘도 주일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사로잡으시는 것을 느꼈다. 그분의 진리에 압도되어 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경험을 했다. 담백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하는 설교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나는... 참으로 복받은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