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다윗의 이 고백은 개인적으로 다윗의 고백 중 가장 위대한 고백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고백은 그가 하나님과 내밀한 인격적인 관계 가운데 있었으며, 그 속에서 그분을 경험했으며, 또한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이 고백은 가장 쉬운 고백인 것처럼 보인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그분을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내게는... 나는 솔직히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잘 드리지 못하고, 고백드릴 때 조차도 진심이 담겨 있을 때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지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다윗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시편 18편이 그것을 보여준다. 7절부터 15절까지는 그의 고백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묘사하는 것은 그의 "힘"되신 하나님의 두려우신 영광과 능력과 위대하심이다. 그는 그것을 친히 경험했고, 그 앞에 무릎꿇었다. 또한 "사망의 줄"과 "불의의 창수"(4),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5) 가운데서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경험했다. 그를 둘러싼 원수들에게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절망을 경험했다.(3) 하나님의 위대하심의 경험과 자신의 무능함의 경험. 이 두 가지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다윗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
그 결과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라는 고백인 것이다.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하나님",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반복해서 여러번 고백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진하게' 그를 위험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그런 경험의 결과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라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은 그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난 영혼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런 고백을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쁘게 받으신다.
내 경우는 어떤가? 나도 역시 다윗과 같은 고백을 입에 늘 달고 살지만, 그것은 입술의 고백일 뿐, 내 중심에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고, 너무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 내 삶을 그분께 의탁하려고 하지만, 나는 어느새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해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 규정되어야 할 "악"은 어느새 "나에게 해를 끼치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로 규정되어,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악"과 싸우기에 바쁘다. 그 가운데 아내가 언젠가 지적한 대로 "성마른" 자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내가 규정한 악을 처리하는 쓰레기 처리인, 그리고 내 욕망을 성취해 주는 알라딘의 램프의 거인으로 전락해 버린다. 중심에 "사랑"을 잃어버리고 율법주의자가 되어 정죄하기에 바쁘다. 심지어 하나님께 정죄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악을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흉악한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그런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쉽게 용서해 주실 것으로 "믿고" 가볍게 넘겨버린다. 가증함의 극치를 달리는 내 모습...
그런 가운데 "나의 힘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입술의 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저 기도하기는, 내 삶 가운데 위대한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앞에 무릎꿇고 겸손히 내 무능력을 고백하고, 지극히 무능한 자에게 임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밖에... 성령께서 너무나 자주 솟아오르는 교만의 싹을 잘라 버리고 철저하게 낮아짐으로 하나님과 남을 높이고, 오로지 사랑만으로 가득찬 내면이 되기를 기도할 밖에...
오늘 아침, 다윗을 보며 갈길이 너무나 멀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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