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요 11:47-48)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 기적은 심지어 죽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경악하게 할 능력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모두가 표적이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기적을 행하는 그 능력, 그 사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그것을 행하시는 그분의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리키는 지시자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단순히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대적했던 종교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매우 바람직한 질문이었고, 예수님이 바라시던 질문이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행하신 많은 일들을 보면서 나는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들을 누리는 가운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분이 베푸시는 것을 받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서 끝날 것인가? 아니면 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좇으며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 것인가? 이 질문을 하는 것 그 자체, 그리고 그 질문에 바른 답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질문을 잊고 살 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관성화되고, 마귀의 밥이 되기에 알맞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른 질문을 던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내 놓은 그들의 답은 가히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임을 알고 있었던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급기야 그분을 죽이는 모의를 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살인 모의가 예수님이 행하셨던 가장 극적인 표적인 나사로를 살리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 사건 바로 뒤에 있었다는 것이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단순히 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냄새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세상구원에 대한 비밀을 공개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것을 가장 잘 알고 가장 환영해야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평소에는 원수로 서로에 대해 으르렁거렸던 그들)이 연합하여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대적한는 종교지도자들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본성은 선악과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자기중심성에 근거한 하나님의 상대화이다. 즉, 타락한 인간은 모든 것의 가치판단에 자신의 욕망을 중심에 두며, 그것에 부합하지 않으면 심지어 하나님의 위대한 표적이라 할지라도 "거추장스러운 것",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두 가지가 중요했다. 한 가지는 그들의 종교권력을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의 종교-사회적 자치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로마의 피정복민 정책으로 어느 정도 자치를 허용받았었는데, 그것을 지키는 가운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그것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심지어 하나님조차도--제거되어야할 것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은혜롭고 가장 찬양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당신 그 자체를 대적하고 거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증한 성향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간 모두에게 있는, 따라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겸손을 생각한다. 인간들 사이에서 예의를 차리기 위해 자신을 잠시 낮추는 척하는 거짓 겸손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왕이시고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고, 그 앞에서 무지하고, 죄악되고, 무능력한 존재인 나 자신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내 안의 죄악된 욕망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늘 배우고, 성경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안을 채우려는 노력.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믿음의 공동체에서 중요한 위치에서 섬기는 자들, 그리고 영적인 리더들은 이 부분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가 꼭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한 자들이 당대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내 이야기다. 내가 문제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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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위대하심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32)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그 믿음이 참으로 커지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예수님 당시 그분의 이적을 보고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 소수 중에서도 도드라진 믿음을 가졌던 자들, 어찌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진실하고 바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였다. 마르다는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드렸던 그 위대한 고백과 동일한 고백을 드렸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그분의 장례를 예비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예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인지를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그들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의 크심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죽은자는 죽은자일 뿐, 다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은 그 인식의 한계 내에 머물렀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그 배우려는 자세 이면에는 자신의 지식이 짧다는 고백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한다는 인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교회 문화와 성경의 지식에 익숙하게 되면, 어느새 마치 자신은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는 열정이 식게 된다. 그 결과는 신앙생활의 나태함으로 나타나고, 믿음의 열매들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다. 그 크심은 초신자가 몇 년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생활과 문화에 익숙하게 되었다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비교한다면, 우리의 자람은 미미한 것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말씀을 대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대할 때, 우리 안에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인정에서 비롯되는 겸손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분은 항상 내 생각보다 크시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자세로 성경을 접할 때, 성경은 늘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새로운 예수님의 면모, 그분의 능력, 그분의 인격, 그분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새로움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자라가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가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지적 교만이 자리잡을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앙생활이다.
이 아침. 하나님 앞에는 늘 겸손해야 함을 깨닫는다. 내 안에 있는 교만을 지적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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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그 믿음이 참으로 커지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예수님 당시 그분의 이적을 보고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 소수 중에서도 도드라진 믿음을 가졌던 자들, 어찌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진실하고 바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였다. 마르다는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드렸던 그 위대한 고백과 동일한 고백을 드렸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그분의 장례를 예비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예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인지를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그들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의 크심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죽은자는 죽은자일 뿐, 다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은 그 인식의 한계 내에 머물렀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그 배우려는 자세 이면에는 자신의 지식이 짧다는 고백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한다는 인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교회 문화와 성경의 지식에 익숙하게 되면, 어느새 마치 자신은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는 열정이 식게 된다. 그 결과는 신앙생활의 나태함으로 나타나고, 믿음의 열매들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다. 그 크심은 초신자가 몇 년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생활과 문화에 익숙하게 되었다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비교한다면, 우리의 자람은 미미한 것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말씀을 대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대할 때, 우리 안에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인정에서 비롯되는 겸손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분은 항상 내 생각보다 크시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자세로 성경을 접할 때, 성경은 늘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새로운 예수님의 면모, 그분의 능력, 그분의 인격, 그분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새로움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자라가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가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지적 교만이 자리잡을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앙생활이다.
이 아침. 하나님 앞에는 늘 겸손해야 함을 깨닫는다. 내 안에 있는 교만을 지적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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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3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