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으로서의 가장

성경적 원리로 볼 때 한 가정의 가장은 그 가정의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영적인 리더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가정의 남편/아버지를 가정의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것은 모든 남자들은 가정의 영적 상황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쉽지 않은 무서운 책임이다. 그 책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대로 양도할 수가 없다는 것이 더 두려운 것이다.

죄악으로 물들어 버린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가정의 가장에게 허락하신 영적인 리더십은 왜곡되어 버렸다. 그 한 모습은 가정 가운데 군림하는 제왕으로서의 모습이다. 명령을 내리는 가장. 모든 것을 자기의 뜻과 욕심대로 관철시키고 마는 가장. 그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언어적/정서적/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가장. 그것은 죄악이다.
또 다른 한 모습은 그 리더십을 포기하는 것이다. 가정의 모든 문제는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바깥 일만 신경을 쓴다. 가정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이들의 교육과 영적인 상황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가장들.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가장들의 모습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중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그런 가장들로 인해서 가정의 영적 상태를 악화되어 갈 수 밖에 없다. 가장이, 남자들이 제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아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 자이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은 가정의 죄악들을 들고 나아가 회개하는 자이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씩 이스라엘의 민족적 죄악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 가정의 죄악들, 그리고 가정 구성원의 죄악들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책임이 가장에게 있다.

그리고 가장은 하나님께 기도의 책임이 있다. 가정과 가정구성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중보자로서의 책임이 있다. 지난 수련회 때 신인훈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 뒤에는 반드시 그를 위해 중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이 기억난다.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늘 기도함으로 그 아이들이 구원 가운데로 나아 올 수 있도록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리더인 가장에게 그 책임을 맡기신다. 아이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지 않는 아버지는 가정 안에서 영적인 리더로서의 역할을 게을리하는 자다. 내가 날마다 기도 가운데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내 기도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실 것으로 믿는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은 섬기는 자이다. 가정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낮은 곳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섬기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도록 돕는 자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낮은 곳에서 섬기는 섬김으로 제거해 나아가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보여 주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리더가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는 것이다. 그 원리가 가정 안에서 분명히 실천될 때, 그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제사장으로서 가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해서 분명한 목소리로 "No!"라고 외칠 수 있는 자이다. 이 역할은 제사장보다는 선지자에 가깝다. 제사장은 중재자이다. 많은 경우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에게 나아가기도 해야한다. 가장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선 가운데 가족 구성원들에게 그 말씀을 분명하게 선포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훈육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가정의 가장은 반드시 말씀에 깨어 있는 자이어야 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자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한 가정의 영적 리더로 세우셨다. 그것은 특권이기도 하지만, 감당하기 버거운 의무이기도 하다. 이 무게 때문에 이 역할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리더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그 삶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 아침 묵상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뿌리지 못하는 땅,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아,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렘 2:1-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잊어버리고 찾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었고, 가나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좇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감사는 내가 가진 것에서 좋은 뭔가가 더해져야만 내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주어졌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알 때에야 내 안에서 감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가나안에서 살고 있고,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곳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곳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받은 것이다. 그들이 거기에 지속적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이 거기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진실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자 하신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이 되어버린다.
내가 삶을 사는 것, 숨을 쉬는 것, 공부하는 것, 그리고 경제적인 공급을 받는 것 등등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제목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격없는 죄인인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하신 은혜를 입은 자이다. 그것을 망각하게 될 때, 내 안에 감사가 사라지고, 내 안에 감사가 사라질 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겨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겨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우상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기업을 가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 그리고 구원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내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감사는 그 은혜가 주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치르셨던 희생, 즉 십자가를 늘 기억하고, 또한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형편없었던 나 자신을 기억함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이 감사의 원동력이 된다.

가난

(2009년 3월 5일에 쓴 글)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결혼하기 전, 교제하던 지금의 아내에게 한 번 정도 내 딴에는 심각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라고...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내는 그 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믿음을 가지고 나서, 자발적으로 가난하면서도 의미 있게 인생을 살아가는 믿음의 선배들을 보고, 그리고 "가난의 영성"을 접하고는 나는 가난한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는 추구하며 살게 되었다.

가난하기로 작정하면, 세상에 얽메이지 않는다. 불편을 감수하고 친척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할 것들을 조금 적게 하거나 못하는 것에 대해서 뻔뻔스럽기로 작정하기만 하면, 가난은 그리 힘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돈이 자유를 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자유라는 속박에 얽메여서 허덕거린다. 그것이 돈에 미쳐 돌아가는 한국 사회의 현 주소이다. 오히려 자유를 포기하고, 조금 고상한 삶을 포기한다면, 인생은 훨씬 자유로와지고, 세상은 살 만 하다.

가난하게 사는 삶의 백미는,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더 긴밀해진다는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단순히 돈에 쪼들려 살면서 해야할 것을 아무것도 못하면서 산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내 가정의 모든 필요를 내가 직접 모두 마련하고 장만한다는 욕심과 책임에서 벗어나서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돈이 많을 때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그만큼 줄어든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 살면,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을 기도하게 된다. 부족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작은 공급에도 감사하게 되고, 그분이 내 삶에 개입하고 계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기도 응답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며, 내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면서 살 수 있다.

가난은 내 자신을 믿고 사는 불신앙에서 나를 탈출시키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의 삶으로 인도한다. 삶의 지극히 냉혹한 현실 가운데서 가난한 자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그 냉혹함을 녹이는 따뜻한 불이며, 그 가운데 나는 하나님의 세밀하신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믿음을 견지하게 된다.

그러한 가난은 이 세상에 보화를 쌓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늘의 보화를 쌓으려는 거룩한 욕심을 가질 때, 나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다가온다.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내 놓을 수 있고,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고백 가운데서 나는 내 소유 뿐만 아니라 내 존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주님인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피조물인 내가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영광은,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자발적인 가난은... 내 삶을 통해 그 분이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나를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돌리는 삶으로 인도한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진정한 남성

"Men are easily threatened. And whenever a man is threatened, when he becomes uncomfortable in places within himself that he does not understand, he naturally retreats into an arena of comfort or competence, or he dominates someone or something in order to feel powerful. Men refuse to feel the paralyzing and humbling horror of uncertainty, a horror that could drive them to trust, a horror that could release in them the power to deeply give themselves in relationship. As a result, most men feel close to no one, especially not to God, and no one feels close to them.
"Something good in men is stopped and needs to get moving. When good movement stops, bad movement (retreat or domination) reliably develops." --from The Silence of Adam


현대사회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참으로 많이 왜곡되어 있다. 최근에 성경적인 남성관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면서, 내 자신을 보게 된다. 내 안에 이 사회가, 문화가 강요하는 남성의 모습에 내 자신이 많이 억눌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남자인 나에게 주신 남성성의 모든 좋은 것들을 오히려 억누르고, 죄악된 문화가 심어주는 좋지 않은 "남성성"을 내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가운데, 내 자아가 상처받고 비뚤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이시다. 나를 인간으로 만드셨지만, 동시에 나를 남자로 만드셨다. 만드신 분이 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시다.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꽃피워야 할 내 안의 하나님께서 심어두신 남성성을 발견하고 또한 나에게 강요된 왜곡된 남성성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 제거작업은 내 안에 진정한 남성성을 발견하고 개발해 나갈 때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 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이다.

보물 9

(2005년 3월 29일에 쓴 글)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었다. 주일 아침에 두 애들 챙기고 분주히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같이 차를 몰고 교회에 거의 도착했을 때, 둘째가 갑자기 물었다.

"아빠! 왜 맨날 똑같은 교회만 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