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하 7:8-9)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의 한 작은 고을 중 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허드렛일을 하며 심부름꾼으로, 또 당시 가장 천대 받는 목자로 집에서 종처럼 일하고 있던 다윗을 지명하시고, 그에게 기름부으셔서 왕으로 불려 주셨다. 다윗의 이름은 천하에 존귀한 이름이 되었고, 그처럼 복받은 자가 이 세상에 없었으며, 오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우는 엄청난 영광을 누렸고, 실제로 그의 혈통을 좇아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극악한 죄를 범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신 것처럼 그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삼하 7:14-15)

어찌보면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지극히 심한 편애이다. 사울은 비록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기는 했어도, (적어도 인간적 관점으로 봤을 때는) 다윗처럼 파렴치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다. 블레셋과 대치할 때, 군대의 사기가 점점 떨어져 가고 있고 소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래처럼 많은 블레셋 군사들과 그들의 뛰어난 병기를 보면서 두려워 하는 가운데 하나 둘씩 도망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그들을 종교적으로 결집시켜줄 수 있는 사무엘은 온다는 시각에 오지 않고 지체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급한 마음에 왕인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림으로써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를 원했던 것 뿐이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전하여 말 그대로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고, 가축까지 도살했지만, 그 힘든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전리품 하나 챙겨가지 못한다면 군대의 사기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뭔가 보일 것이 없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그 왕을 사로잡음으로써 함께 출전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가지게 하고자 아말렉의 왕을 사로 잡고, 제사 드리기에 너무 적합한 가축들을 몇 마리 끌고 왔을 뿐이었다.

반면, 다윗은 자기의 가장 충성된 신하 중의 한 사람의 아내를, 그것도 자신의 장수들이 모두 전장에 나가고 자기 혼자 왕궁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 여자를 범했고, 그것을 덮으려고 온갖 꽁수를 썼었고, 그것이 실패하자 무자비하게 그 충성스런 장군을 모살했으며,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여자를 끝내 자신의 아내로 (이미 몇 명의 아내들이 있었음에도) 취하고 마는 뻔뻔한 자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이스라엘의 강성함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으며, 인구조사를 하며 세금을 부과하려는 죄악 가운데서 수 많은 자신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벌을 받게 했던 형편없는 리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왕위에서 폐하셨던 하나님께서 다윗을 폐위하지 않으신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사랑이고 그분의 은혜이다. 물론 다윗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마음이 있었고,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 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겠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종으로 택하시고, 그의 종으로 삼으신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왕이 되었던 것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는 나... 나 또한 다윗보다도 더 악한 자이고, 다윗보다도 더 비열한 자이고, 다윗보다도 더 뻔뻔스러운 자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죄용서를 받았고, 거룩한 삶을 갈망할 수 있는 자로 세우심을 받았다. 내 삶에서 행해진 수 많은 악들을 생각할 때, 나 또한 사울처럼 버림받아 마땅한 자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겔 15:2-5)

목재로서 아무짝에 쓸모 없는 포도나무와 같던 나를 당신의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

[펌] 함께 있는 것.. 그 자체가 행복

(2006.02.02에 다른 곳에 쓴 글)

예전이 한국에서 큰 참사가 있었다. 일명 씨랜드 화재사건... 유치원생들이 단체로 놀러 갔다가 화재로 인해서 대부분 죽임을 당한...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신문에는 연일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 중에 내 마음에 남는 한 인터뷰... 그것은 한 부모와 인터뷰였는데, 그 중에서 마음에 남는 한 마디...

"내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그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다는게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 현장에서 얼마나 엄마 아빠를 찾았을까? 그 현장에 같이 있지 못하고 그 아이의 부르짖음이 응답하지 못했던 그 부모의 마음.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 마음이 참으로 공감이 간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유학오기 전에 "TV 동화 행복한 세상"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거기에 나온 에피소드 한 가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625 때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전사하여 화장된 유골로 전우의 손에 집을 다시 찾았다. 그 유골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어머니... 그 어머니에게 그 전우가 물었다.

"지금 과거로 돌아가 아드님과 함께할 한 순간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어머니의 대답... 그것은 아이와 행복했던 때도, 아이가 자랑스러운 일을 했을 때도, 아이가 효도했을 때도 아니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울고 있을 때...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우는 아이를 마음껏 안아주고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싶다는 그 어머니의 바램...

자식을 키우면서 참으로 여러가지 감정을 복합적으로 경험한다. 그렇게도 사랑스럽던 자식들이 고집피우고 말안들을 때면 어찌 그리 미운지... 하지만 나는 늘 그럴 때마다 이 두 사건을 떠올린다. 그리고 울며불며 고집부리면서 말 안듣는 내 아이... 비록 그런 모습이지만 내가 그 애들과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행복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내가 만약 전사한 아들의 어머니가 되어 내 아이들 곁에 있다면 해주고 싶은 것을 생각한다... 후회가 덜 될 그런 대응을 찾는다...

나의 행복...

그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이미 주신 것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내 성질과 내 욕심에 가리고 사는가 아니면 주심에 감사하며 한 순간 한 순간 그 것을 맛보며 사는가의 차이이다.

나는...

행복하다.

[펌] Bible Riddles

Q. Which servant of God was the most flagrant lawbreaker in the Bible?
A. Moses broke all 10 commandments at once. (Exodus 32:19)

Q. Which area of Palestine was especially wealthy?
A. The area around the Jordan-the banks were always overflowing.

Q. How do we know that Job went to a chiropractor?
A. Because in Job 16:12, 14, 16 we read, "I had come to be at ease, but he proceeded to shake me up: and he grabbed me by the back of the neck and proceeded to smash me."

Q: Why didn't Noah go fishing?
A: He had only two worms! (Genesis 7)

Q: How do we know that they played cards in the ark?
A: Because Noah sat on the deck. (by inference, in Genesis 7)

Q: What is the first recorded case of constipation in the Bible?
A: It's in Kings, where it says that David sat on the Throne for 40 years.

Define Yourself!

어제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경영대 근처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 왔다. 평소에 길을 가면서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에 거의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포스터에는 고민하는 신사의 모습과 두 단어가 적혀 있었다.

"Define Yourself!"

그 글을 읽자마자 1초의 여유도 없이 내 안에서는 답이 터져 나왔다.

"I'm Christian. I'm a child of God!"

남자, 남편, 아빠, 집사, 대학원생 등등...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수 많은 방법이 있었지만, 내 속으로부터 즉시로 튀어나온 답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이 참 감격스러웠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define할 수 없어서 힘들어한다. identity crisis는 개인에게 닥칠 수 있는 위기 중에서 심각한 것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 내 자신이 schizophrenia에 걸린다 하더라도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을 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구하라... 예수의 이름으로...

지난 주 아이들 학교에서 event가 있었다. 어스틴 경찰서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아이들 중에서 선발된 25명이 경찰들과 같이 쇼핑하고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먹는 Shop with a Cop이라는 프로그램을 위해서 아이들을 선발하는 event였다. 경찰들과 같이 Target에 가서 개인당 50불어치의 쇼핑을 하게 하고 경찰들이 그 비용을 대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기대가 대단했다. 하연이와 예연이도 목요일 저녁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금요일에 추첨이 있었다. 결과는 하연이는 뽑혔고 예연이는 뽑히지 못했다. 확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하연이가 뽑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참고로 예연이가 속한 2학년 중에는 한 명도 뽑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예연이가 매우 상심했다. 하나님께서 언니의 기도는 들어 주시고, 자신의 기도는 들어 주지 않으셨다는 것 때문에 많이 울었다. 그날 오후, 예연이가 나에게 조용히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절하셨다면서 원망과 눈물이 섞인채로 서럽게 울었다.
예연이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기도하는 자세와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여러 비유를 들어가며 알아듣도록 설명하려 했지만, 예연이를 이해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끝내 울음과 원망을 그치지 않는 예연이를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할 도리가 없어서 조용히 예연이에게 현금으로 10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말을 듣고 예연이의 표정은 금새 밝아졌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 건넨 10불을 몰래 자신의 저금통에 고이 간직하고는 그 후로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미봉책으로 10불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금으로 문제를 수습하긴 했지만, 아직도 예연이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거절감에 대한 문제, 보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늘 새벽에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예연이를 위해 특별히 기도를 많이했다.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도록...

예연이의 일이지만... 예연이를 보면서 나 또한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자임을 느낀다. 기도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간절히 기도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 내 안에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쓴뿌리는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연이를 보게 하심으로써 내 모습을 보여 주신다. 얼마나 유치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소치인가? 예연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지만, 나는 왜 그 모양인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성숙한 기도는 주님 안에 거하는 기도,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함으로써 그 말씀에 따라 구하는 기도이다. 그것은 다른 표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첫번째로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지만, 그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미 외에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내가 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 두셨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간에,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더 소유하고 더 누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b-3)

기도는 나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구하는 수단이며,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더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주님을 구하는 기도, 주님을 누리기를 갈망하는 것이 동기가 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여 주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