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집안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서 명절은 항상 악몽과 같은 때였다. 집안에 돈이 없는 것은 그나마 작은 문제었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임금을 지불하지 못해서 늘 초긴장하고, 많은 경우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와서 돈을 달라고 떼쓰고 행패부리는 험악한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이 조용히 명절을 넘기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었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은 어린 가슴을 기대감으로 설레게 하는 뭔가가 있는 날이었다.
초등학교 때, 성탄절에 선물이라는 것을 주고 받는다는 것을 TV를 통해 배웠다. 여자라고는 어머니 밖에 없고, 5부자가 사는 집안. 모든 것이 군대식이고, 상명하복의 절대복종, 절대충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우리 집에는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생소한 것이었다. 어머니 생신 때 주로 하는 생일축하 인사는 "어머니... 오늘이 생신이셨어요?"였다. 성탄절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선물은 고사하고 카드조차 주고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이 성탄절의 중요행사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처음으로 내 돈을 들여서 작은형과 동생을 위해 선물을 하나씩 준비했다. 큰형은 왜 빠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쨋든 평생 처음으로 남을 위해 뭔가를 산 것이었다. 그 기분은 참 좋았다. 설레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란 이런 거였구나...'라고 혼자 생각하며, 기쁨으로 집에 와서 동생과 작은형에게 선물을 건넸다. 포장도 없었고, 카드도 없었다. 그 때는 그런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냥 가게에서 산 물건을 툭 던져 주었을 뿐이었다. 건넨 나도 어색하고, 받는 그들도 얼마나 어색해 하던지... 이런 것을 왜 주냐는 듯한 표정... 그러면서도 고마와 하는 그 표정... 사실 그 이후로 선물을 다시 산 기억은 없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성탄절은 선물을 주고 받는 절기였다.
조금 자라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에는, 성탄절 즈음 최고의 관심사는 24일에 눈이 오느냐 오지 않느냐였다. 소위 White Christmas가 되면 뭔가 제대로 된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하는 그런 절기였다. 눈이 오는 성탄절 이브에는 샹송인 "Tombe la Neige"를 부르며 감상에 빠져 거리를 혼자 걷곤 했다. 추위와 눈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눈 없는 성탄절은 뭔가 빠져서 실패한 작품과 같은 그런 것일 뿐이었다.
조금 자라고 대학생이 된 후, 성탄절은 여자친구와 함께 카페나 영화관이나 좋은 곳을 돌아 다니며 데이트를 하는 절기로 바뀌었다. 문제는... 나에게 여자친구가 없었다는 것.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에 어느 누구와도 교제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탄절은 언제나 나를 쓸쓸하게(혹은, 씁쓸하게)하는 시간이었다. 거리에 쌍쌍이 돌아다니는 연인들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러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성탄절이 눈도, 선물도, 데이트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그분의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Christmas라는 것... 그것을 그 때야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 성탄절의 중심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눈이 오지 않아도, 선물이 없어도, 데이트할 연인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절기가 되었다.
성탄절 새벽인 지금... 다시 한번 온 땅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오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께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올려 드린다.
보물15
"보면 알아!"
(2006.02.21에 쓴 글)
지난 주 토요일...
매주 토요일이면 저녁에 목장모임이 있다. 목장모임은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에서 모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 날이 목장모임하는 날인 것을 안다.
애들이랑 놀고 있었는데 예연이가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이 물었다.
"아빠! 오늘 목장모임 어디서해요?"
"응~~~ 박일 아저씨 집에서 할꺼야..."
"박일 아저씨? 박일 아저씨가 누구예요?"
"예연이 몰라?"
"나현이 언니 아빠?"
"아~~니~~"
"그럼 태훈이 아빠?"
"아~~니~~"
"그럼 누구예요~~~"
뭐라고 답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연이가 끼어들었다.
"아빠! 나는 알것같아요. 예연아! 이따가 보면 알아."
그러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전번에 나도 새소식반에 간식이 뭔지 몰랐거든? 근데 나중에 보니까 피자였어.. 그러니 보면 알아..."
"응~~"
하연이가 언니답게 '보면 안다'는 것을 나름대로의 경험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그 예가 상황에 적절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쨋든 예연이는 나름 대로 언니의 설명이 충분해 보였다. 이제는 알았다는 듯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사실관계와 인과관계의 한계 속에서 적절한 설명을 찾지 못하고 헤메는 나보다는 비록 그런 면에서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의 설명력이 있는 하연이의 대답이 더 유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06.02.21에 쓴 글)
지난 주 토요일...
매주 토요일이면 저녁에 목장모임이 있다. 목장모임은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에서 모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 날이 목장모임하는 날인 것을 안다.
애들이랑 놀고 있었는데 예연이가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이 물었다.
"아빠! 오늘 목장모임 어디서해요?"
"응~~~ 박일 아저씨 집에서 할꺼야..."
"박일 아저씨? 박일 아저씨가 누구예요?"
"예연이 몰라?"
"나현이 언니 아빠?"
"아~~니~~"
"그럼 태훈이 아빠?"
"아~~니~~"
"그럼 누구예요~~~"
뭐라고 답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연이가 끼어들었다.
"아빠! 나는 알것같아요. 예연아! 이따가 보면 알아."
그러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전번에 나도 새소식반에 간식이 뭔지 몰랐거든? 근데 나중에 보니까 피자였어.. 그러니 보면 알아..."
"응~~"
하연이가 언니답게 '보면 안다'는 것을 나름대로의 경험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그 예가 상황에 적절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쨋든 예연이는 나름 대로 언니의 설명이 충분해 보였다. 이제는 알았다는 듯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사실관계와 인과관계의 한계 속에서 적절한 설명을 찾지 못하고 헤메는 나보다는 비록 그런 면에서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의 설명력이 있는 하연이의 대답이 더 유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Posted at
오전 12:53:00
UT의 종소리...
어제... Grading이 모두 끝난 기말고사 시험지를 과 사무실에 두고 오는 길이었다.
UT Tower에서 종소리가 울려 나고 있었다. 평소에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만 났었는데, 음악 소리가 나고 있었다.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송가가 연주되고 있었다.
맑고 밝은 날... 방학 중이라 텅빈 캠퍼스에 인적이 드문 가운데 울려 퍼지는 찬송가는 내 가슴을 울렸다. 온 캠퍼스에, 그리고 온 세상에 주님이 오심을 선포하는 천상의 음악처럼 들렸다.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감격하며 길을 걸었다.
지나 다니는 사람들... 일부는 신기한 듯이 Tower를 바라다보고, 일부는 대화하느라 전혀 관심도 없었고, 일부는 이어폰 끼고 바쁘게 걸어가느라 음악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그렇다... 창세 이후 온 우주는 하나님을 선포해 왔고, 천상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고,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는 복음이 음악이 되어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너무나 적었다. 복음은 늘 있어 왔지만, 천상의 찬양은 늘 있어 왔지만, 그것을 듣고 감동하며 은혜 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제 UT Tower에서 울려나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탄생을 참으로 기뻐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온 피조세계를 볼 수 있었다.
UT Tower에서 종소리가 울려 나고 있었다. 평소에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만 났었는데, 음악 소리가 나고 있었다.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송가가 연주되고 있었다.
맑고 밝은 날... 방학 중이라 텅빈 캠퍼스에 인적이 드문 가운데 울려 퍼지는 찬송가는 내 가슴을 울렸다. 온 캠퍼스에, 그리고 온 세상에 주님이 오심을 선포하는 천상의 음악처럼 들렸다.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감격하며 길을 걸었다.
지나 다니는 사람들... 일부는 신기한 듯이 Tower를 바라다보고, 일부는 대화하느라 전혀 관심도 없었고, 일부는 이어폰 끼고 바쁘게 걸어가느라 음악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그렇다... 창세 이후 온 우주는 하나님을 선포해 왔고, 천상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고,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는 복음이 음악이 되어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너무나 적었다. 복음은 늘 있어 왔지만, 천상의 찬양은 늘 있어 왔지만, 그것을 듣고 감동하며 은혜 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제 UT Tower에서 울려나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탄생을 참으로 기뻐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온 피조세계를 볼 수 있었다.
Posted at
오전 12:59:00
속죄의 은혜...
지난 여름에 있었던 청년부 여름수련회가 나에게 남겨준 것은 새벽기도였다.
수련회가 끝난 직후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청년부의 일부 지체들에 대한 갑작스러운 염려를 주셔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이 새벽 네 시. 평소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이른 시간이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새벽 네 시를 내 기상시간으로 삼으셨다. 비록 늦잠을 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그 후 오늘까지 새벽 네 시는 내가 주로 일어 나는 시간이 되었고, 일어나서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의 장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고요한 새벽,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영적인 것이고, 즐거운 것이다.
말씀과 기도가 중심이 되었던 새벽의 삶에서 언제부터인가 그 중심이 조금씩 이동이 되었다. 그것은 찬송가를 부르는 것. 어느 때부터인가 아침에 찬송을 부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고, 매일의 QT 본문이 나오는 성서유니온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그날 본문에 해당하는 찬송가를 들으며 매일 찬양하게 되었다.
새벽이라 크게는 부르지 못하지만, 낮은 소리로 조용하게 따라 부르는 가운데, 기도와 말씀으로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와 충만함을 경험했다. 내 삶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찬양인데, 그 부분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어느새 새벽 시간에 찬송 부르는 것이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찬송가의 가사들을 통해서 나를 만져 주셨고, 때로는 책망하시기도 했다. 찬송가는 늘 은혜로운 것이었다.
오늘 새벽에는 또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 찬송가 한 곡을 부르고 난 후 더 찬양하고 싶은 생각에 찬송가 여기저기를 뒤지며 찬송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부흥회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과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내 안에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면서 발견 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찬송이 참으로 은혜로운 찬양이지만, 회개와 사죄를 주제로하는 찬송가를 부를 때, 내 가슴에 뜨거운 것이 올라 오면서, 감격, 또 감격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같이 보잘 것 없는 흉악한 죄인을 십자가에서 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마음 속 깊이 울리는 것을 경험했다. 어느새 나는 회개와 사죄를 주제로한 찬송 메들리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신앙 생활에 참으로 많은 감사할 것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제목이요, 소망이 된다. 하지만,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 그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순간보다 더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는 것 같다. 그 은혜는 아무리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감사의 눈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을 수 밖에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강권적인 은혜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다가, 구원자되신 나의 주님...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수련회가 끝난 직후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청년부의 일부 지체들에 대한 갑작스러운 염려를 주셔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이 새벽 네 시. 평소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이른 시간이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새벽 네 시를 내 기상시간으로 삼으셨다. 비록 늦잠을 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그 후 오늘까지 새벽 네 시는 내가 주로 일어 나는 시간이 되었고, 일어나서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의 장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고요한 새벽,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영적인 것이고, 즐거운 것이다.
말씀과 기도가 중심이 되었던 새벽의 삶에서 언제부터인가 그 중심이 조금씩 이동이 되었다. 그것은 찬송가를 부르는 것. 어느 때부터인가 아침에 찬송을 부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고, 매일의 QT 본문이 나오는 성서유니온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그날 본문에 해당하는 찬송가를 들으며 매일 찬양하게 되었다.
새벽이라 크게는 부르지 못하지만, 낮은 소리로 조용하게 따라 부르는 가운데, 기도와 말씀으로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와 충만함을 경험했다. 내 삶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찬양인데, 그 부분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어느새 새벽 시간에 찬송 부르는 것이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찬송가의 가사들을 통해서 나를 만져 주셨고, 때로는 책망하시기도 했다. 찬송가는 늘 은혜로운 것이었다.
오늘 새벽에는 또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 찬송가 한 곡을 부르고 난 후 더 찬양하고 싶은 생각에 찬송가 여기저기를 뒤지며 찬송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부흥회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과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내 안에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면서 발견 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찬송이 참으로 은혜로운 찬양이지만, 회개와 사죄를 주제로하는 찬송가를 부를 때, 내 가슴에 뜨거운 것이 올라 오면서, 감격, 또 감격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같이 보잘 것 없는 흉악한 죄인을 십자가에서 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마음 속 깊이 울리는 것을 경험했다. 어느새 나는 회개와 사죄를 주제로한 찬송 메들리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신앙 생활에 참으로 많은 감사할 것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제목이요, 소망이 된다. 하지만,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 그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순간보다 더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는 것 같다. 그 은혜는 아무리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감사의 눈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을 수 밖에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강권적인 은혜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다가, 구원자되신 나의 주님...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Posted at
오전 12:26:00
마지막 대표기도를 준비하며...
지난 4년 동안 교회에서 집사로 섬겼다. 집사로서 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매우 중요한 일은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를 하는 것이다.
4년 동안 한 두달에 한 번씩 대표기도를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약 4-5분간의 기도문을 준비하기 위해 평균 3시간 정도의 준비시간을 갖는다. 기도문을 준비하면서, 진정으로 교회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기도가 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성도들을 향한 나의 훈시나 설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때 그때의 교회의 필요 뿐만 아니라 영적 상황까지도 민감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모두가 기도의 제목이 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집사를 휴무하기로 했다. 물론 청년부를 섬기는 부장으로서는 그대로 섬기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인 집사직은 내려 놓는다.
내년에 졸업할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집사로 섬기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고, 따라서 올해의 마지막 대표기도인 오늘의 기도가 이 교회에서의 마지막 기도가 될 것이다.
기도를 준비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부분에서 깨달았다. 그런데 내 스스로 놀랐던 것은, 담임목사님을 위해 기도문을 작성할 때였다. 오히려 교회를 기도할 때보다 더 간절한 마음과 눈물이 나왔다.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은 진정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다. 복음을 향한 그분의 열정, 그리고 말씀을 그 모든 삶에 순수하게 적용시키시는 그 삶, 그리고 그분의 겸손 때문이다. 나는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우리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가까와 질 수 있는 분은 아니다. 그분의 성격이 원래 그리 다정다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사로 있는 나이고, 목사님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오랫 동안 섬겨온 나였지만, 목사님과 가까와지지는 못했다.
마지막 기도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교회를 생각할 때 많은 눈물이 나오고 내 마음이 교회에 쏟아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주님의 몸인 이 교회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을 간절하게 하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느낀 것은 물론 교회도 사랑하지만, 오히려 목사님이었다.
그분을 위해 기도문을 준비하는 동안, 그분을 향한 간절함, 그분의 수고와 어려움, 고통과 외로움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그것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문을 쓰면서, 내가 목사님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된 자에 대한 주님 안에서의 사랑이었다.
내 안에 있던 그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 교회에서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남아 있는 모든 날 동안, 나의 영적 리더로서 그분을 존경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더욱 사랑하는 가운데, 복음 안에서 영적 새생명을 낳는 일에 동역하기를 기도한다.
오늘 기도할 때 눈물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데... 오늘 아침에 이미 많이 울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기도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걱정이다...
4년 동안 한 두달에 한 번씩 대표기도를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약 4-5분간의 기도문을 준비하기 위해 평균 3시간 정도의 준비시간을 갖는다. 기도문을 준비하면서, 진정으로 교회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기도가 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성도들을 향한 나의 훈시나 설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때 그때의 교회의 필요 뿐만 아니라 영적 상황까지도 민감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모두가 기도의 제목이 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집사를 휴무하기로 했다. 물론 청년부를 섬기는 부장으로서는 그대로 섬기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인 집사직은 내려 놓는다.
내년에 졸업할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집사로 섬기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고, 따라서 올해의 마지막 대표기도인 오늘의 기도가 이 교회에서의 마지막 기도가 될 것이다.
기도를 준비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부분에서 깨달았다. 그런데 내 스스로 놀랐던 것은, 담임목사님을 위해 기도문을 작성할 때였다. 오히려 교회를 기도할 때보다 더 간절한 마음과 눈물이 나왔다.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은 진정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다. 복음을 향한 그분의 열정, 그리고 말씀을 그 모든 삶에 순수하게 적용시키시는 그 삶, 그리고 그분의 겸손 때문이다. 나는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우리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가까와 질 수 있는 분은 아니다. 그분의 성격이 원래 그리 다정다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사로 있는 나이고, 목사님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오랫 동안 섬겨온 나였지만, 목사님과 가까와지지는 못했다.
마지막 기도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교회를 생각할 때 많은 눈물이 나오고 내 마음이 교회에 쏟아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주님의 몸인 이 교회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을 간절하게 하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느낀 것은 물론 교회도 사랑하지만, 오히려 목사님이었다.
그분을 위해 기도문을 준비하는 동안, 그분을 향한 간절함, 그분의 수고와 어려움, 고통과 외로움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그것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문을 쓰면서, 내가 목사님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된 자에 대한 주님 안에서의 사랑이었다.
내 안에 있던 그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 교회에서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남아 있는 모든 날 동안, 나의 영적 리더로서 그분을 존경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더욱 사랑하는 가운데, 복음 안에서 영적 새생명을 낳는 일에 동역하기를 기도한다.
오늘 기도할 때 눈물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데... 오늘 아침에 이미 많이 울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기도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걱정이다...
Posted at
오후 9:4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