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대하 5:13-14)
역대하 4장과 5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짓고, 거기에 언약궤를 모시고 하나님께 제사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그 장엄한 광경을 상상해 본다. 아론계열의 제사장들이 수 많은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가운데, 레위인들은 성전의 여러 곳에서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 등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는 하나님을 소리높여 높인다.
죽어가는 짐승의 울부짖음, 찬양, 분주한 섬김, 성전 안에 들어와 있는 이스라엘 남자들의 설렘과 기대, 성전 밖에서 이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고 호기심 가운데 소리로만 듣고 있는 여성들의 기도.
이 모든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의 중심은 속죄소이며, 하나님께서는 상징적으로 그 속죄소에 거하신다. 즉,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인 것이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 모든 것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 내 모든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 그리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분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성전신앙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은혜의 세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성전은 바로 내 자신이며, 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는 것. 따라서 그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그분께 경배드리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신약시대의 성전 신앙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좌정하신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길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을 가지신 그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분을 마치 옆집 마음씨 좋은 아저씨나 형님, 혹은 손자가 무슨 버릇없는 행동을 해도 "허허!" 웃으며 그냥 봐 념겨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큰 오산이다. 그분의 위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며, 그분은 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정도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누리긴 하지만, 그래서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맞지만, 함부로 대할 대상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 내 하나님은 내가 늘 그러는 것처럼 쉽게 무시를 받아서는 안되는 분이시다. 귀찮은 존재로 여김을 받아서는 절대 안되는 분인 것이다. 내 편의를 위해 내 욕망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은 결코 감정의 특정한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그 경외감에서 나오는 복종.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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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b-27)
존 파이퍼 목사님은 바로 이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이런 바울의 삶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상황에서 살아 날 수가 없다는 것.
같은 현상을 바라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부정을 확신하는 증거가 되었을텐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 그리고 나와 함께하심의 증거라니...
결국 믿음이 모든 해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예수 믿으면 복받고, 모든 것이 잘 되고, 위로 받고, 어려움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것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정말,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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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 목사님은 바로 이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이런 바울의 삶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상황에서 살아 날 수가 없다는 것.
같은 현상을 바라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부정을 확신하는 증거가 되었을텐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 그리고 나와 함께하심의 증거라니...
결국 믿음이 모든 해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예수 믿으면 복받고, 모든 것이 잘 되고, 위로 받고, 어려움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것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정말,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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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3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