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ding을 하며...

지난 주 목요일부터 지금까지 Grading을 하고 있다. 유독히도 알아볼 수 없게 글씨를 쓰는 학생들이 많은 이번 클래스에서 거의 암호를 해독하는 기분으로 답안지를 읽으니 참 힘들다...
오늘까지는 끝내야 하는데... 아직 한 시간 정도를 더 채점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귀중한 영혼들인데, 답안지로 만나는 그들은 그저 글씨일 뿐이고 문장일 뿐이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제시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들의 개인적인 고민과 문제, 어려움은 아무런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들 중에는 참으로 힘든 여건 속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시험 전날 피치못할 사정으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텐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들어 주면, 내가 이렇게 매몰차게 채점하지는 못할텐데...
참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주님은 내 사정을 훤히 아시는 분이시다. 내 모든 행위로 심판을 하시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으로 심판하시지는 않으신다. 그 행위가 내 속 깊이 자리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신다. 내 행위가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일지라도, 그 믿음과 연결되어 그것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신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매우 훌륭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주님께서는 결코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싫어하신다.

주님은 내 깊은 사정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참으로 위로가 된다.

지난 학기까지만 하더라다도 채점을 할 때는 그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채점했는데... 이번학기는 그것도 잊어버렸다. 돌려 주기 전에 이름들을 부르며 기도해야지... 그리고 힘내서 마무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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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8)

무질서한 은사들이 난무하고, 도덕적 타락이 깊숙하게 침투해왔던 고린도 교회. 갈등과 분열 가운데 서로를 무시하며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며 갈등을 일으키는 교회에게 사도 바울은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 교회에서 많은 이슈들이 있었지만, 사랑은 그 이슈 중 하나가 아니었고, 그 어느 누구도 누가 더 사랑했느냐는 것으로 따지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13 장은 12장과 14장 가운데 끼어든 삽입문입니다. 그 문제 많은 교회에 바울은 모든 것을 정리하는 중요한 가르침을 13장에서 강조하여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편지의 흐름을 끊으며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1. 오래 참습니다. 이 단어는 "오래"라는 단어와 "열정, 노여움"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것은 상대의 나쁜 감정이나 노여움에 대해 오래 견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온유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크레스토스"(유용한, 친절한)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것은 부드럽고 인자하며 친절하면서도 상대에게 유익이 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3.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는 "끓는다"는 뜻의 원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기서는 상대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끓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과장해서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5.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자랑과 비슷하지만 주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 말입니다.
6.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오만불손하다" "예를 갖추지 않는다"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에 온당한 태도로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7.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8. 성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마르고 쉽게 예민해지는 기질을 가리킵니다. 쉽게 격분하게 되고 자신을 격정으로부터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9.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해를 복수하기 위해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하듯이 헤아리면서 원망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10.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진리에 기반을 둡니다.
11. 모든 것을 참습니다. 참는다는 말의 어원은 "지붕"입니다. 따라서 참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모든 허물을 덮고 가리워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죄악을 묵과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해를 입힌 자에게까지 관용으로 용서하고 변함없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12. 모든 것을 믿습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치 않고 상대를 신뢰해 주는 것입니다.
13. 모든 것을 바랍니다. 소망을 잃지 않고 밝은 마음으로 끝까지 바라는 것입니다.
14. 모든 것을 견딥니다. "휘포메네이"는 단순히 참는 것을 넘어 용감한 군인처럼 담대한 마음으로 인내하며 미래를 향해 진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놀랍도록 아름답고도 부담스러운 이 사랑에 대한 정의...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런 사랑을 하셨고,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랑의 정의에 참는 것과 관련한 것이 14개 중 6개나 됩니다. (오래참음, 투기하지 않음, 무례히 행치 않음, 성내지 않음, 모든 것을 참음, 모든 것을 견딤).  그만큼 사랑에 있어서 참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바울은 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13장의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그렇게 중요한 사랑인데...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의 정의인데, 그것을 묵상할수록, 솔직히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란 내가 성취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기 때문이지요.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인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사랑의 정의에 정반대되는 성향이 저에게 있는 것을 발견할 뿐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내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차원의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하나님만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너무나 감사한 희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거듭난 모든 영혼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인해서, 인간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내 안에서 그 사랑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신 것이지요. 그 성령께서 형편없는 내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완전히 변화시키시겠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기쁜 일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이 제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고, 이미 이루어 가고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아니,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지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의 열매라는 것... 그것에 감사드리며, 그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내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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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에서의 상처... 대처방법은?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인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는 스스로 자신의 생김새가 타조를 닮았다고 자주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잘 생각을 못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 타조처럼 생겼다는 생각에 웃음짓곤 했었다. 언젠가, 산안토니오의 동물원에 가서 타조를 보면서 그 후배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배는 타조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자주 타조가 맹수에게 쫓기거나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엄청난 빠른 스피드로 달려가다가 때로는 자기가 왜 도망가는지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도저히 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을 때는 갑자기 머리를 모래에 처박고는 이제는 자기 눈에 그 위험한 상황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위안을 갖는다며 타조에 대해서 설명하곤 했었다. 위험요소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위험에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는 만족하며 편안해 할지 모르지만, 얼마 후 타조는 맹수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 많은 상처들을 주고 받는다. 아무리 거듭난 자들이라 할지라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 상처는 피할 수가 없다. 상처가 없이 서로 사랑만하는 공동체를 꿈꾼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확고한 신념이다. 따라서 상처 때문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일단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는다.(사실... 내가 상처를 받기보다는 주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받은 상처로 아파하며 고통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다. 아픔이 있는 곳에 주님의 위로가 있고, 아픔이 있는 곳에 치유가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런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고, 그것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다른 어떤 공동체와 다르다. 상처가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 상처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내 스스로 공동체 안에서 절대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말해 왔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상처가 오고 갈 수 밖에 없는 공동체 내에서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앙 인격이 매우 성숙해서 성인 수준으로 인간의 죄를 소화해 내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모든 것을 완전히 처리해 주시는 것을 늘 경험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그런 존재였는가? 내가 그런 은혜를 진짜 누리는 사람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런 말들을 떠벌리고 다닐 수 있었을까?

최근에 와서야 내가 말한 그 "상처받지 않음"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상처를 막아 주시기 때문에 그 복을 누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악인" "안 믿는 자" "믿음에 문제가 있는 자" 등등의 꼬리표를 붙이고, 모든 것을 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순전히 피해자로서 주님의 위로를 받고, 그리고 나서 그 "문제 있는" 사람들을 그 자신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 버리고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람들과만 함께하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한 그 "상처받지 않음"의 비결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마치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
그것은 자기 합리화, 자기 방어일 뿐,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상처받지 않음"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의인이라는 고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타인을 무조건 악인으로 몰아버리는 매우 사악한 태도일 뿐이라는 것이 최근 내 생각이다.

차라리 그런식으로 상처받지 않고 공동체 생활을 하기보다는 상처 가운데 아파하면서도, 그 상처 때문에 나를 돌아보고, 문제 많은 것처럼 "보이는" 그 상대방을 품어 안는 것이 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늘 아파하지만, 늘 자신을 돌아보고, 더 아파지겠지만, 온 몸에 가시가 돋힌 것과 같은 한 인간을 가슴으로 품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깝다.
형편없는 믿음 가운데 있던 제자들, 아무리 가르쳐도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는 그들,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크냐는 권력다툼에 정신이 없던 그들을 주님께서는 품으셨다. 인내하셨다. 예수님이라고 제자들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상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을 그 가슴에 품으셨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는 바로 그 "품으심"의 결과였다.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상처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느끼고, 주님께서 손을 내미셔서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 주시는 것을 경험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상처 없이 교회생활을 하는 비결이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다른 이들에게 죄인의 꼬리표를 붙이고, 내가 의롭다며 스스로 상처-proof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상처를 그 가슴으로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영혼들을 사랑으로 더 깊이 품으며, 그로인해 만신창이가 된 상처투성이의 가슴을 주님께 들고 나아가 온전히 치유함을 받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치유에는 완전한 용서가 있다. 이 블로그의 어디엔가 기록했던 것과 같은 그 용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거기에는 상처의 원인이 되었던 모든 허물과 죄와 실수에 대해서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언급하거나 기억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 일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진정한 치유이고, 그것이 성경적인 상처 대처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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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 37:5-8)

길... 그것은 내 인생의 모든 여정을 가리킨다. 그것은 삶의 모든 계획, 목표, 방법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여기서 "맡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돌을 굴려버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돌을 비탈 아래로 굴려버리고 난 후, 그 돌이 굴러가는 것은 내 손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께 맡긴다는 것은,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으로써 전적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제는 내 인생의 길에 대해서 내 자신은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다. 내 인생의 모든 계획과 목표와 방법을 주님께서 결정하시도록, 주님께서 내 인생의 중요한 일들과 그 결과를 책임져 주시도록 맡기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하는 삶, 또한 성경 말씀의 원리에 내 삶을 온전히 의탁하는 삶이 이루어질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께 그 인생의 길을 맡긴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신다. 마치 햇볕이 가장 강한 정오의 강렬한 빛처럼, 내 의를 그렇게 높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찾으시는 최고의 의는 온전한 신뢰함으로 자신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다. 그런 자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영광스러운 도구로 사용하신다. 가장 선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신 뜻을 따라서 가장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인생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성취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 그 길을 맡긴 자는 이제 하나님 앞에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악한 자들이 그들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을 볼 때에도,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악한 꾀로 인해서 내 인생에 손해가 있거나, 나에게 피해가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잠잠하고 참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잠잠하다는 것은 단순히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과 조급함에 성급히 나서거나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참으며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눈 앞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조급해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기다린다"는 것은 원어의 의미가 "시선을 집중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이루신 전능자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인이 활개를 치고 그들의 행사가 모두 형통해 보이일 때에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신뢰 때문에 그분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의 행사를 믿음으로 잠잠하게 기다리는 것... 그것이 믿음 안에서 성숙한 자의 바른 자세이다.

인생의 모든 여정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 앞에서 잠잠하며, 참고 기다리는 자는, 악이 횡행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분노와 불평가운데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 또 다른 악을 행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신다. 비록 그것이 먼저 행해진 악을 징벌하기 위한 악이라 할지라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사도 바울이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명령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분노하는 가운데 행하는 행동들과 말, 생각들은 악에 치우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경계하신다.

결국 인생의 복은 그 길을 주님께 맡긴 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만 그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결국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깨닫게 된다. 결국 복음이고, 결국 십자가이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그것이 답이다.

지난 얼마 동안 분노 가운데서 힘들어 했었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공동체에 관련된 일들이 처음에는 나를 힘들게 했고, 나중에는 그것으로 겉잡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다. 내 안에서 불길처럼 솟아나는 분노 가운데서 죄와 싸우면서 참으로 힘들었다. 그 가운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분노하는 나를 보면서, 내가 내 길을 하나님께 의탁하지 않고, 잠잠하며 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믿음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길을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그 "부당함"을 해결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내 의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의 죄악과 연약함에 대해서 분노하며 정죄했다.
이것이 바로 내 모습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 분께 맡기지 못하는 믿음 없는 내 모습... 하나님 앞에 한 없이 부끄러운 모습...

하지만 나에게는 십자가가 있다. 바로 이런 내 모습 때문에 돌아가셔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로 그런 나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그 고통의 죄값을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 내가 오늘 내 완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나는 형편없는 자이지만, 그분은 위대하신 분이시다. 나는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짓는 자이지만, 그분은 강한 분이시고 완전히 정결하신 분이시다. 그 분이 나를 초대하신다. 그분의 품으로... 그분의 사랑으로... 그분의 온유함으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함으로... 나로 하여금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 죄책감에 빠져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다시 정결하게 설 수 있도록 하신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분이 능력이 나를 잠잠케 한다. 사나운 파도와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던 예수님께서 내 안에 불타오르던 분노를 잠잠케 하셨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한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가운데, 평강으로 주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길 마음을 주셨다.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막으시고, 나를 붙들어 주셨다.

죄 가운데서도 감사가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 나의 선한 목자 그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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