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인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는 스스로 자신의 생김새가 타조를 닮았다고 자주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잘 생각을 못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 타조처럼 생겼다는 생각에 웃음짓곤 했었다. 언젠가, 산안토니오의 동물원에 가서 타조를 보면서 그 후배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배는 타조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자주 타조가 맹수에게 쫓기거나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엄청난 빠른 스피드로 달려가다가 때로는 자기가 왜 도망가는지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도저히 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을 때는 갑자기 머리를 모래에 처박고는 이제는 자기 눈에 그 위험한 상황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위안을 갖는다며 타조에 대해서 설명하곤 했었다. 위험요소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위험에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는 만족하며 편안해 할지 모르지만, 얼마 후 타조는 맹수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 많은 상처들을 주고 받는다. 아무리 거듭난 자들이라 할지라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 상처는 피할 수가 없다. 상처가 없이 서로 사랑만하는 공동체를 꿈꾼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확고한 신념이다. 따라서 상처 때문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일단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는다.(사실... 내가 상처를 받기보다는 주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받은 상처로 아파하며 고통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다. 아픔이 있는 곳에 주님의 위로가 있고, 아픔이 있는 곳에 치유가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런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고, 그것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다른 어떤 공동체와 다르다. 상처가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 상처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내 스스로 공동체 안에서 절대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말해 왔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상처가 오고 갈 수 밖에 없는 공동체 내에서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앙 인격이 매우 성숙해서 성인 수준으로 인간의 죄를 소화해 내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모든 것을 완전히 처리해 주시는 것을 늘 경험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그런 존재였는가? 내가 그런 은혜를 진짜 누리는 사람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런 말들을 떠벌리고 다닐 수 있었을까?
최근에 와서야 내가 말한 그 "상처받지 않음"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상처를 막아 주시기 때문에 그 복을 누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악인" "안 믿는 자" "믿음에 문제가 있는 자" 등등의 꼬리표를 붙이고, 모든 것을 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순전히 피해자로서 주님의 위로를 받고, 그리고 나서 그 "문제 있는" 사람들을 그 자신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 버리고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람들과만 함께하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한 그 "상처받지 않음"의 비결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마치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
그것은 자기 합리화, 자기 방어일 뿐,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상처받지 않음"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의인이라는 고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타인을 무조건 악인으로 몰아버리는 매우 사악한 태도일 뿐이라는 것이 최근 내 생각이다.
차라리 그런식으로 상처받지 않고 공동체 생활을 하기보다는 상처 가운데 아파하면서도, 그 상처 때문에 나를 돌아보고, 문제 많은 것처럼 "보이는" 그 상대방을 품어 안는 것이 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늘 아파하지만, 늘 자신을 돌아보고, 더 아파지겠지만, 온 몸에 가시가 돋힌 것과 같은 한 인간을 가슴으로 품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깝다.
형편없는 믿음 가운데 있던 제자들, 아무리 가르쳐도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는 그들,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크냐는 권력다툼에 정신이 없던 그들을 주님께서는 품으셨다. 인내하셨다. 예수님이라고 제자들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상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을 그 가슴에 품으셨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는 바로 그 "품으심"의 결과였다.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상처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느끼고, 주님께서 손을 내미셔서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 주시는 것을 경험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상처 없이 교회생활을 하는 비결이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다른 이들에게 죄인의 꼬리표를 붙이고, 내가 의롭다며 스스로 상처-proof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상처를 그 가슴으로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영혼들을 사랑으로 더 깊이 품으며, 그로인해 만신창이가 된 상처투성이의 가슴을 주님께 들고 나아가 온전히 치유함을 받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치유에는 완전한 용서가 있다. 이 블로그의 어디엔가 기록했던 것과 같은 그 용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거기에는 상처의 원인이 되었던 모든 허물과 죄와 실수에 대해서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언급하거나 기억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 일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진정한 치유이고, 그것이 성경적인 상처 대처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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