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기 전, 나는 팝송을 매우 좋아했다. 그 중 특별히 저음 비트가 강하면서도 느리고, 느리면서도 인상적인 음악을 참 좋아했다. 예를 들어 UFO의 Belladonna나 King Crimson의 Epitaph 같은 노래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믿음을 가지고 난 후에도, 음악적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물론 모든 찬양이 좋았지만, 가슴을 울리는 것은 항상 조용하면서도 진지한 고백적 찬양이었다.
최근 하나님께서 내 심각한 죄들을 지적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동안에도, 찬송가와 찬양 중에서 느리면서도 가슴의 모든 것들을 토로하는 속죄의 찬양에 많은 은혜를 받았고, 그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게 되었다.
회개의 작업은 지금도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번 주부터, 내 안에 기쁨의 찬양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 죄악에 대한 회개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광채를 조금씩 맛보기 시작한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그분 안에서의 기쁨을 찬양하는 빠르고 경쾌한 찬양이 내 가슴에서 우러 나오면서 교회 청년부의 찬양팀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찬양 중 기쁨의 찬양을 모두 찾아서 불렀다.
그렇다. 나는 형편없는 죄인이지만, 주님은 나의 기쁨이 되신다. 그분은 나의 감사가 되시고, 그분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거기에 감격이 있고,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시 104:33-34)
.
.
보물 17
하연이의 생일
(2006.03.01에 쓴 글)
하연이가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 2000년 2월 광명시 철산동에 있는 광명성애병원에서 오랜 진통 끝에 얼굴을 보인 조그만 갓난 아기가 벌써 여섯 살(한국나이 일곱살)이 된 것이다.
아내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가족끼리, 혹은 가까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축하하던 지난 생일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하연이 반 아이들과 동네 친구들을 많이 초대했다.
그리고...
(아내의) 고생은 시작되었다..
며칠 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준비한 음식들... 여기저기 다니면서 모으고 만든 장식... 그리고 생일파티를 위한 이벤트와 그에 따르는 상품들... 엄마가 아니라면, 참 해내기 힘든 많은 것들을 준비하는 것은 하연이를 낳을 때 고통 가운데서도 아기에 대한 기대가 교차되는 복합 감정의 재연이라 할 수 있었다.
많은 준비물들을 들고 전에 예약해 둔 아파트의 커뮤티니 룸을 향했다. 장식하고, 음식을 진열하고 상품을 준비하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하나씩 엄마 손을 잡고 나타나는 아이들.. 동네 한국 애들, 학교 같은 반 미국 아이들, 일본 아이.. 하나씩 둘씩 나타난 아이들은 예상했던 수를 훨씬 뛰어넘어 방 안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만큼 하연이에게 쏟아지는 선물들... 기쁨...
음식으로 시작한 생일 파티는 엄마들과 아이들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파티"였다. 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하고 나서 우리 목장 식구 한 분이 사준 근사한 케익에 불을 붙이며 하연이의 생일을 축하했다.
멍석을 깔아주면 뒤로 빼는 하연.. 역시나 촛불 끄기를 거부... 당황한 엄마와 아빠는 주위에서 불을 끄고 싶어하는 아이들과 함께 "후~~~~"하고 불을 모두 껐다.
이에 이어지는 순서... 종이 비행기 만들기... 한국아이들은 신나게 접기를 시작한 반면 미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듯 엄마들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기색... 이를 대비한 하연 엄마의 철저한 준비정신!! 한글과 영어가 같이 있는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설명하는 유인물을 나누어 줘서 그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었다.
종이 접기가 끝나자 모두들 밖으로 나가서 비행기를 신나게 날리는 동안 나는 캔디가 들어 있는 별 모양의 상자를 나무에 달았다.. (이름이 뭐라더라...피녜타?) 비행기 날리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상자를 향하여 출발!! 미국아이들 생일파티하면 자주 하는 것이라고는 하는데 우리에게는 낯선 이것은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서 깨뜨려 사탕을 줍는 게임이다.
한 명씩 차례대로 돌아가며 두드리기 시작.. 마치 소풍 때 박을 터뜨리는 것처럼 사탕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두드리는 열심은 시작되고... 한참... '으잉? 왜이리 안터지냐?' 오랫동안 터지지 않는 상자를 보면서 내심 걱정... 겸연쩍은 미소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살짝 상자를 찢는다.. '그래도 안 터지네..;--;" 결국 룰을 바꾸어서 아이들이 달려들어 상자를 찢게 하고... 쏟아지는 사탕위로 우르르 몰리는 아이들... '무섭군...'
이어서 Donkey Tail. 이 게임은 벽에 붙여 놓은 종이에 눈을 가리고 받은 스티커를 제자리에 붙이는 게임... 정확하게 붙이는 아이들... 어딘지 모르고 헤메는 아이들... 어쨋든 몰려드는 아이들...
정신없다...
마지막 순서.. 보물찾기... 내가 "It's time for treasture..."라고 말하는 도중에 아이들은 벌써 "와~~~~"하면서 보물이 있는 곳으로 출발.. (나중에 알고 보니 하연이가 주도했더만... 그리고 그 전에 친구들에게 미리 귀뜸을 해준 모양...) 아이들이 찾기 쉽게 잘 보이는데다 놓은 관계로 거의 모든 아이들이 보물을 찾아들고 아내에게로 달려갔다. 아내는 준비한 상품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줬다.
흐뭇 & 행복해하는 아이들.. 저마다 상품을 자랑하면서 즐거워함으로 생일파티는 끝났다.
아내의 과감한 도전... 그리고 철저한 준비로 힘든 과정이었지만 나름대로 즐겁고 좋은 생일파티였다...
하루가 지난 오늘 저녁.. 하연이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물었다.
"하연아! 어제 왜 촛불을 안불었어?"
"왜냐면요... 입에 음식이 있었는데 음식이 튀어나올까봐..."
.
.
(2006.03.01에 쓴 글)
하연이가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 2000년 2월 광명시 철산동에 있는 광명성애병원에서 오랜 진통 끝에 얼굴을 보인 조그만 갓난 아기가 벌써 여섯 살(한국나이 일곱살)이 된 것이다.
아내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가족끼리, 혹은 가까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축하하던 지난 생일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하연이 반 아이들과 동네 친구들을 많이 초대했다.
그리고...
(아내의) 고생은 시작되었다..
며칠 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준비한 음식들... 여기저기 다니면서 모으고 만든 장식... 그리고 생일파티를 위한 이벤트와 그에 따르는 상품들... 엄마가 아니라면, 참 해내기 힘든 많은 것들을 준비하는 것은 하연이를 낳을 때 고통 가운데서도 아기에 대한 기대가 교차되는 복합 감정의 재연이라 할 수 있었다.
많은 준비물들을 들고 전에 예약해 둔 아파트의 커뮤티니 룸을 향했다. 장식하고, 음식을 진열하고 상품을 준비하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하나씩 엄마 손을 잡고 나타나는 아이들.. 동네 한국 애들, 학교 같은 반 미국 아이들, 일본 아이.. 하나씩 둘씩 나타난 아이들은 예상했던 수를 훨씬 뛰어넘어 방 안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만큼 하연이에게 쏟아지는 선물들... 기쁨...
음식으로 시작한 생일 파티는 엄마들과 아이들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파티"였다. 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하고 나서 우리 목장 식구 한 분이 사준 근사한 케익에 불을 붙이며 하연이의 생일을 축하했다.
멍석을 깔아주면 뒤로 빼는 하연.. 역시나 촛불 끄기를 거부... 당황한 엄마와 아빠는 주위에서 불을 끄고 싶어하는 아이들과 함께 "후~~~~"하고 불을 모두 껐다.
이에 이어지는 순서... 종이 비행기 만들기... 한국아이들은 신나게 접기를 시작한 반면 미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듯 엄마들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기색... 이를 대비한 하연 엄마의 철저한 준비정신!! 한글과 영어가 같이 있는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설명하는 유인물을 나누어 줘서 그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었다.
종이 접기가 끝나자 모두들 밖으로 나가서 비행기를 신나게 날리는 동안 나는 캔디가 들어 있는 별 모양의 상자를 나무에 달았다.. (이름이 뭐라더라...피녜타?) 비행기 날리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상자를 향하여 출발!! 미국아이들 생일파티하면 자주 하는 것이라고는 하는데 우리에게는 낯선 이것은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서 깨뜨려 사탕을 줍는 게임이다.
한 명씩 차례대로 돌아가며 두드리기 시작.. 마치 소풍 때 박을 터뜨리는 것처럼 사탕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두드리는 열심은 시작되고... 한참... '으잉? 왜이리 안터지냐?' 오랫동안 터지지 않는 상자를 보면서 내심 걱정... 겸연쩍은 미소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살짝 상자를 찢는다.. '그래도 안 터지네..;--;" 결국 룰을 바꾸어서 아이들이 달려들어 상자를 찢게 하고... 쏟아지는 사탕위로 우르르 몰리는 아이들... '무섭군...'
이어서 Donkey Tail. 이 게임은 벽에 붙여 놓은 종이에 눈을 가리고 받은 스티커를 제자리에 붙이는 게임... 정확하게 붙이는 아이들... 어딘지 모르고 헤메는 아이들... 어쨋든 몰려드는 아이들...
정신없다...
마지막 순서.. 보물찾기... 내가 "It's time for treasture..."라고 말하는 도중에 아이들은 벌써 "와~~~~"하면서 보물이 있는 곳으로 출발.. (나중에 알고 보니 하연이가 주도했더만... 그리고 그 전에 친구들에게 미리 귀뜸을 해준 모양...) 아이들이 찾기 쉽게 잘 보이는데다 놓은 관계로 거의 모든 아이들이 보물을 찾아들고 아내에게로 달려갔다. 아내는 준비한 상품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줬다.
흐뭇 & 행복해하는 아이들.. 저마다 상품을 자랑하면서 즐거워함으로 생일파티는 끝났다.
아내의 과감한 도전... 그리고 철저한 준비로 힘든 과정이었지만 나름대로 즐겁고 좋은 생일파티였다...
하루가 지난 오늘 저녁.. 하연이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물었다.
"하연아! 어제 왜 촛불을 안불었어?"
"왜냐면요... 입에 음식이 있었는데 음식이 튀어나올까봐..."
.
.
Posted at
오전 5:15:00
아이들의 요구...
아이들이 크면서 아빠 엄마에게 요구하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커진다. 애들은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같고 싶어한다. 닌텐도, iTouch, Wii 등등... 친구 집에서 본 것이나, 친구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에 사달라고 조른다.
"하영이 집에 Wii가 있어요... 우리도 사요... 예?"
"나영이와 진수는 iPhone이 있는데... 나도 하나 사줘요..."
이런식이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 아이들이 사달라고 조르는 것들, 특히 technology와 관련된 것들은 아이들보다도 내가 더 좋아 하는 것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게임기와 컴퓨터에 관해서는 광적으로 몰두하고 빠져들었던 나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사준다면, 아이들보다도 내가 더 즐길 것이 뻔하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하영이는 집에 있는 Wii를 얼마나 자주 사용한다냐?"
"Wii의 가격이 250불에서 350불 정도 하는데,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해서 그 기계를 사는 것이 적합 하다고 생각하냐?"
"iTouch를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말해 볼래?"
그리고 아이들에게 요구한다. 왜 그런 것들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유들을 가지고 아빠를 설득하라.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투자 비용 대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라.
아이들에게 너무 심한 요구일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만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싶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히 자신(혹은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가져야 하는 그런 심리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교육시키고 싶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인가로,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로 평가하는 것을 심어주고 싶다. 나는 그것이 아이들에게 큰 유산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다. 소비는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며, 그것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살아간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그 핵심이 광고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를 소유하지 않으면 그만큼 뭔가 부족하다고, 뒤떨어진 존재라고 느끼도록 조장한다. 대부분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도록 한다. 그것을 통해서 소유욕구를 부추기고, 소유했을 때 만족을, 그렇지 못했을 때 불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터무니 없이 값비싼 명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의 부모들이 그런 값비싼 물건들을 사주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 아이가 기죽는 것이 싫어서... 남들이 다 가진 것을 자기만 못 가졌기 때문에 소외되는 것이 싫어서...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끝없는 필요를 부모가 끝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소비행태는 과소비를 부추긴다. 단순히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는 내 스스로의 자존감을 위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인해서 자신과 남을 평가하는 자가 되어 간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물신주의의 한 형태인 것이다.
남들이 가지고 즐기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불편이나 손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자존감과 연결시키지 않는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건을 사 줌으로써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자신의 자존감의 연결고리를 끊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딸들이 그런 훈련을 제대로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닌텐도, Wii, iTouch를 사는 것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끈질기게 논쟁할 것이다.
.
.
"하영이 집에 Wii가 있어요... 우리도 사요... 예?"
"나영이와 진수는 iPhone이 있는데... 나도 하나 사줘요..."
이런식이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 아이들이 사달라고 조르는 것들, 특히 technology와 관련된 것들은 아이들보다도 내가 더 좋아 하는 것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게임기와 컴퓨터에 관해서는 광적으로 몰두하고 빠져들었던 나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사준다면, 아이들보다도 내가 더 즐길 것이 뻔하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하영이는 집에 있는 Wii를 얼마나 자주 사용한다냐?"
"Wii의 가격이 250불에서 350불 정도 하는데,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해서 그 기계를 사는 것이 적합 하다고 생각하냐?"
"iTouch를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말해 볼래?"
그리고 아이들에게 요구한다. 왜 그런 것들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유들을 가지고 아빠를 설득하라.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투자 비용 대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라.
아이들에게 너무 심한 요구일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만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싶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히 자신(혹은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가져야 하는 그런 심리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교육시키고 싶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인가로,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로 평가하는 것을 심어주고 싶다. 나는 그것이 아이들에게 큰 유산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다. 소비는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며, 그것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살아간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그 핵심이 광고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를 소유하지 않으면 그만큼 뭔가 부족하다고, 뒤떨어진 존재라고 느끼도록 조장한다. 대부분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도록 한다. 그것을 통해서 소유욕구를 부추기고, 소유했을 때 만족을, 그렇지 못했을 때 불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터무니 없이 값비싼 명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의 부모들이 그런 값비싼 물건들을 사주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 아이가 기죽는 것이 싫어서... 남들이 다 가진 것을 자기만 못 가졌기 때문에 소외되는 것이 싫어서...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끝없는 필요를 부모가 끝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소비행태는 과소비를 부추긴다. 단순히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는 내 스스로의 자존감을 위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인해서 자신과 남을 평가하는 자가 되어 간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물신주의의 한 형태인 것이다.
남들이 가지고 즐기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불편이나 손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자존감과 연결시키지 않는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건을 사 줌으로써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자신의 자존감의 연결고리를 끊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딸들이 그런 훈련을 제대로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닌텐도, Wii, iTouch를 사는 것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끈질기게 논쟁할 것이다.
.
.
Posted at
오전 1:53:00
성결을 향한 갈망...
목자수련회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 아침 5시... 몸은 피곤했지만 눈이 떠졌다. 한 시간 정도 더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는데, 자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내 몸도 일어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모두들 잠들어 있는 중에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간 밤에 애찬식과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어지러워진 거실과 부엌이 보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청소를 원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하나씩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목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끝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잠들어 있는 목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을 청소로 표현했다.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 일부러 천천히 정리했지만, 한 시간 반 정도 지나고 나니 더 이상 청소할 것이 없게 되었다. 참 아쉬웠다... 생각 같아서는 목자들이 자고 있는 방과 2층 거실도 청소하고 싶었지만, 어제 밤 늦게 잠들었을 그들을 깨우는 것이 미안해서 그냥 두었다.
그리고 주님과의 시간을 가졌다. 말씀 묵상을 통해 나의 죄들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진노였다. 하지만 그 진노는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서 나오는 진노였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죄들을 하나씩 지적하시면서 그 죄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을 닮아 가기를 그토록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511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과 512장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를 반복해서 부르며 혼자서 부흥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죄악에서 떠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더욱 사랑함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가슴 절절히 느껴졌다.
그리고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은 단 한 가지. 거룩과 성결.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드러나는 내 외면이 아니라, 내 내면에서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주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영적 갱신과 부흥이 일어나도록, 그래서 주님과 나만이 공유하는 기적의 비밀이 충만해 지도록 기도했다. 그 기도는 목자수련회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어제 저녁, 빨래를 하러 세탁소를 여러번 걸어서 오가면서, 어두운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주님과 대화의 기도를 나누었다. 그 내용도, 하나님께서 너무 잘 아시는 내 안의 죄악들을 고백하며, 이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간구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거룩함, 성결함이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소망이 되었다.
오늘 아침... 묵상을 하기 전에 부른 찬송가 212장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 하나님을 느끼며, 감사하며 또 감사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내 마음의 소원과 간절함을 담아 주님께 드린 나의 제사였다.
올해 주님의 말씀 대로 살기를 원한다. 아니 반드시 살아 낼 것이다. 주님께서 내 간절한 기도를 결코 멸시치 않으실 것을 믿는다.
.
.
모두들 잠들어 있는 중에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간 밤에 애찬식과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어지러워진 거실과 부엌이 보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청소를 원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하나씩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목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끝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잠들어 있는 목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을 청소로 표현했다.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 일부러 천천히 정리했지만, 한 시간 반 정도 지나고 나니 더 이상 청소할 것이 없게 되었다. 참 아쉬웠다... 생각 같아서는 목자들이 자고 있는 방과 2층 거실도 청소하고 싶었지만, 어제 밤 늦게 잠들었을 그들을 깨우는 것이 미안해서 그냥 두었다.
그리고 주님과의 시간을 가졌다. 말씀 묵상을 통해 나의 죄들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진노였다. 하지만 그 진노는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서 나오는 진노였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죄들을 하나씩 지적하시면서 그 죄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을 닮아 가기를 그토록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511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과 512장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를 반복해서 부르며 혼자서 부흥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죄악에서 떠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더욱 사랑함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가슴 절절히 느껴졌다.
그리고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은 단 한 가지. 거룩과 성결.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드러나는 내 외면이 아니라, 내 내면에서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주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영적 갱신과 부흥이 일어나도록, 그래서 주님과 나만이 공유하는 기적의 비밀이 충만해 지도록 기도했다. 그 기도는 목자수련회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어제 저녁, 빨래를 하러 세탁소를 여러번 걸어서 오가면서, 어두운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주님과 대화의 기도를 나누었다. 그 내용도, 하나님께서 너무 잘 아시는 내 안의 죄악들을 고백하며, 이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간구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거룩함, 성결함이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소망이 되었다.
오늘 아침... 묵상을 하기 전에 부른 찬송가 212장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 하나님을 느끼며, 감사하며 또 감사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내 마음의 소원과 간절함을 담아 주님께 드린 나의 제사였다.
너 성결키위해 늘기도하며 너주안에있어 늘 성경보고 온형제들 함께 늘 사귀면서 일하기 전마다 너 기도하라
너 성결키위해 네머리숙여 저 은밀히 계신 네 주께 빌라 주사귀어 살면 주닮으리니 널보는이 마다 주 생각하리
너 성결키위해 주따라가고 일다급하여도 당황치말고 참 즐거울때나 또 슬플때나 너주님만 믿고 늘 따라가라
너 성결키위해 늘안심하며 네소원을 주께 다 맡기어라 너 성령을 받아 주 섬겨살면 저천국에가서 더 잘섬기리
올해 주님의 말씀 대로 살기를 원한다. 아니 반드시 살아 낼 것이다. 주님께서 내 간절한 기도를 결코 멸시치 않으실 것을 믿는다.
.
.
Posted at
오후 11:50:00
初心
오늘... 예배시간에 그 동안 같이 교회를 섬기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리고 오스틴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된 집사 한 분의 간증을 들었다. 젊은 집사이지만, 그가 주님 앞에서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모습을 지켜 봐왔던 나는, 그의 간증을 들으며,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그의 사역을 볼 수 있었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다는 결론이 결코 겉치례의 형식적 인사 정도로 들리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삶과 섬김이 분명한 증거로 뒷받침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간증을 들으면서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깨끗한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이 더 선명히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변질되어 버리고, 부족한 나의 모습. 그의 간증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간증을 할 수 있는 그가 참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내가 이 교회를 떠날 때는, 결코 간증을 하지 않고, 그냥 떠나는 것이 모든 분들에게 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에는 참으로 많은 간증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그 동안의 사역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떠날 때,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 같다고...
오늘 주일예배 설교 말씀을 통해 내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것을 확증하셨다.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 복음이 변질되어버리는 교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내가 초심을 잃어버리고 가야할 바른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왔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을 들었다. 어찌보면 너무 멀리 와 버려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마음에 낙심이 많이 되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라는 회한이 가슴에 몰려왔고 그 집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던 그 집사를 보내야만 하는 것에 대한 가슴 아픔 절반, 그리고 그의 모습을 통해서 비친 나의 한심한 모습에 대한 아픔이 절반 섞인 눈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좌절을 경험한다. 얼마나 내가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더 깊이 깨달아 간다. 내 자신에 대해 좌절할 때마다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아픔이 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주님의 은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좌절할 때, 나는 십자가를 붙잡는 것 외에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만 매달리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절박함이 더 해지기 때문이다. 믿는 자로서 그것처럼 복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먼 곳으로 이주하는 주님의 충실한 종인 그 집사와 그 가정에 주님의 동행과 역사가 늘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
그의 간증을 들으면서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깨끗한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이 더 선명히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변질되어 버리고, 부족한 나의 모습. 그의 간증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간증을 할 수 있는 그가 참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내가 이 교회를 떠날 때는, 결코 간증을 하지 않고, 그냥 떠나는 것이 모든 분들에게 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에는 참으로 많은 간증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그 동안의 사역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떠날 때,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 같다고...
오늘 주일예배 설교 말씀을 통해 내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것을 확증하셨다.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 복음이 변질되어버리는 교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내가 초심을 잃어버리고 가야할 바른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왔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을 들었다. 어찌보면 너무 멀리 와 버려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마음에 낙심이 많이 되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라는 회한이 가슴에 몰려왔고 그 집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던 그 집사를 보내야만 하는 것에 대한 가슴 아픔 절반, 그리고 그의 모습을 통해서 비친 나의 한심한 모습에 대한 아픔이 절반 섞인 눈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좌절을 경험한다. 얼마나 내가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더 깊이 깨달아 간다. 내 자신에 대해 좌절할 때마다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아픔이 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주님의 은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좌절할 때, 나는 십자가를 붙잡는 것 외에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만 매달리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절박함이 더 해지기 때문이다. 믿는 자로서 그것처럼 복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먼 곳으로 이주하는 주님의 충실한 종인 그 집사와 그 가정에 주님의 동행과 역사가 늘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
Posted at
오전 8:05:00
결혼기념일.
1월 9일은 결혼기념일이다.
1999년 1월 9일 토요일... 영하 13도의 날씨에 우리는 아내의 교회였던 서울 대방동의 대방교회에서 결혼했다. 충청 이남 지방에서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고속도록가 폐쇄되어서 광주에서 올라오기로 했던 내 친척들과 여러 분들은 참석하지도 못했고, 급히 입석 열차를 탄 부모님과 형제들만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이후 11년간의 결혼생활...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첫눈에 반했고, 처음 만났을 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좋아했고,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여자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내 눈을 멀게 했던 바로 그녀와 결혼했는데...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더라도, 이 여자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행복할 것 같았고, 그런 그녀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라는 사람이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님을 결혼 생활을 통해 분명히 보게 되었다.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용서할줄 모르고, 얼마나 자기 잘못에 대해서 뻔뻔스러운지...
얼마나 포용력이 없는지...
얼마나 이해심이 없는지...
얼마나 무능력한지...
얼마나 무관심한지...
얼마나 사랑이 없는지...
얼마나 이중인격적인지...
얼마나 가식적인지...
내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는지 알 수 없다. 11년을 회상하면서, 남는 것은 후회와 미안함 뿐... 앞으로는 잘 해 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것 또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자신이 없다.
회한의 11년... 하지만 내 무능력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에게 두 딸을 낳아주었고, 아내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충실하게 자리를 지켜 주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내와 나 사이에 늘 함께 하셔서, 내가 부족하고 악할 때에도, 우리를 하나로 묶는 끈이 되어 주셨고, 무엇보다도 가망이 없을 것같던 나, 그리고 우리 관계를 조금씩 바꾸어 주셨다. 우리 부부관계를 진정으로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지탱이 가능한 것이었다. 믿음의 능력, 믿음 안에서의 결혼의 중요성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분명히 체험했다.
작년 1월 9일은 청년부 목자수련회 기간 중이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이다. 작년에 결혼 10주년 기념이라고 특별히 아내에게 해 준 것이 없었는데, 올해도 그렇다. 결혼기념일보다 목자수련회 준비로 바쁘게 지낸 한 주가 되어버렸다. 아내에게 정말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목자수련회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여자로서, 결혼기념일에 대한 기대와 생각이 왜 없겠는가만...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에 더 가치를 두고 나를 도와 동역하는 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결혼 11주년... 아내와 하나님께 감사한다.
.
.
1999년 1월 9일 토요일... 영하 13도의 날씨에 우리는 아내의 교회였던 서울 대방동의 대방교회에서 결혼했다. 충청 이남 지방에서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고속도록가 폐쇄되어서 광주에서 올라오기로 했던 내 친척들과 여러 분들은 참석하지도 못했고, 급히 입석 열차를 탄 부모님과 형제들만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이후 11년간의 결혼생활...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첫눈에 반했고, 처음 만났을 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좋아했고,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여자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내 눈을 멀게 했던 바로 그녀와 결혼했는데...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더라도, 이 여자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행복할 것 같았고, 그런 그녀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라는 사람이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님을 결혼 생활을 통해 분명히 보게 되었다.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용서할줄 모르고, 얼마나 자기 잘못에 대해서 뻔뻔스러운지...
얼마나 포용력이 없는지...
얼마나 이해심이 없는지...
얼마나 무능력한지...
얼마나 무관심한지...
얼마나 사랑이 없는지...
얼마나 이중인격적인지...
얼마나 가식적인지...
내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는지 알 수 없다. 11년을 회상하면서, 남는 것은 후회와 미안함 뿐... 앞으로는 잘 해 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것 또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자신이 없다.
회한의 11년... 하지만 내 무능력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에게 두 딸을 낳아주었고, 아내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충실하게 자리를 지켜 주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내와 나 사이에 늘 함께 하셔서, 내가 부족하고 악할 때에도, 우리를 하나로 묶는 끈이 되어 주셨고, 무엇보다도 가망이 없을 것같던 나, 그리고 우리 관계를 조금씩 바꾸어 주셨다. 우리 부부관계를 진정으로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지탱이 가능한 것이었다. 믿음의 능력, 믿음 안에서의 결혼의 중요성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분명히 체험했다.
작년 1월 9일은 청년부 목자수련회 기간 중이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이다. 작년에 결혼 10주년 기념이라고 특별히 아내에게 해 준 것이 없었는데, 올해도 그렇다. 결혼기념일보다 목자수련회 준비로 바쁘게 지낸 한 주가 되어버렸다. 아내에게 정말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목자수련회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여자로서, 결혼기념일에 대한 기대와 생각이 왜 없겠는가만...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에 더 가치를 두고 나를 도와 동역하는 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결혼 11주년... 아내와 하나님께 감사한다.
.
.
Posted at
오전 12: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