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01에 다른 곳에 작성한 글)
저녁식사를 하러 집에 갔다.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중에 돈문제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을 형편이다보니 통장의 잔고와 신용카드 사용이 항상 체크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내로부터 나 몰래 현금 잔금을 모은 것이 500불 가량 된다는 말을 들었다. 가난한 남편과 살아가는 아내로서 아이들이 아프거나 하는 비상 시에 대비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내로부터 500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오래전 아내와 만나서 데이트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우리였지만 캠퍼스의 다른 지체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는 "밖"에서 주로 만났다. 그러다 보니 데이트 자금이 좀 필요했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한 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정을 너무 잘 아는 아내였기 때문에 데이트 비용을 분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내도 특별히 돈을 벌고 있지 않고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타서 쓰는 상황이라 그리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그녀가 통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나가는 말로... 초등학교때부터 한푼 두푼 모았다던 그 통장. 그 때까지 쓰지 않고 있었던 고사리 손으로 모아 왔던 그 통장. 이제 그 돈이 아내의 데이트 자금으로 조금씩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함. 고마움. 서운함. 안타까움. 사랑스러움. 등등의 감정이 당시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하는 아내로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의 모습이 겹쳐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 고마움... 그리고 그 소중한 추억이 담긴 통장을 나 때문에 써야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
전에 학교 다닐 때 김소운씨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집이 있었다. 당시에는 참 욕도 많이 얻어 먹었던 내용이었다. 진짜 가난이 담겨있지 않는 동화같은 내용이라는 둥. 김소운씨의 아들이 사기죄로 감옥살이를 하는 것을 빗대어 가난에 대한 교육을 못시켰다는 둥...
하지만 여러 비판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가난을 이겨내는 부부의 사랑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하나같이 아내를 가난으로 이끈 남편들의 미안함과 죄스러움, 그리고 그 가난 속에서도 남편을 존중하과 의지하는 아내들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내에 대해서 수년전 데이트 하던 시절에 느꼈던 그 감정, 그리고 김소운씨의 글에 등장하는 가난한 남편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아내... 항상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존재다.
.
보물찾기...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면 자주 하는 것이 보물찾기였다. 여기저기 숨겨놓은 쪽지를 찾아내서 가져오면, 거기에 맞는 상을 주는 보물찾기... 어떤 친구들은 네 개, 혹은 다섯 개도 찾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나 혹은 둘을 찾아서 신나게 선생님께 가면, 선생님이 준비한 상을 주셨다.
나는... 거의 항상... 단 한 개도 찾지 못했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나에게는 그 "보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내 눈 앞에 있는데도 나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옆에서 친구가 손으로 가리켜 보여 줘야 그제서야 보인다는 사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내가 보물찾기 게임에서 상을 탄 적이 있다면, 그것은 친구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 줬거나, 아니면 여러개를 찾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하나 건네 준 것을 받은 것으로 상을 탄 경우이다. 불쌍한 내 인생...
나는 뭔가를 찾는 것을 잘 못한다. 집에서의 서열이 맨 끝에서 두번째였던 나는 아버지, 어머니, 두 형의 심부름을 많이 해야 했다.(물론 내 유일한 동생인 막내 녀석처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 심부름이 어디 가서 뭘 찾아오라는 심부름이라면, 나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너무 잘 아는 가족들은 "찾는" 심부름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
결혼 한 뒤, 아내는 그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 뭔가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자주 했다. 그리고 물건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때로는 비난도 하고, 때로는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다.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그것을 못 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요즘... 아내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포기를 한 것 같다. 아내가 바쁜 일로 정신없을 때, 가끔씩 나에게 뭔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대부분 잘 찾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고 체념했기 때문이다.
왜 내 눈에는 그런 것들이 잘 안 보이는 것일까?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가 딱 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말씀을 볼 때... 성경말씀을 읽을 때는 성경에 담겨있는 보물들, 맨눈으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깊은 뜻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쉽게 발견이 된다. 책을 펼치면, 보화로 깔려 있는 땅, 금 광맥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넘쳐나는 것을 본다. 때로는 일별(一瞥)하여 보이지 않는 것도,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보물을 보게 된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만지게 되고, 이 세상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을 진리가 내 눈에 들어와 박힌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잘 포착하고, 세상적인 보물들을 그렇게 잘 발견하면서도, 성경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세상적으로는 부요한 자가 되었겠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난한 자가 되었을까?
세상의 보물을 향한 나의 눈을 멀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의 보물을 발견하는 눈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Spiritual treasure hunter로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가, 주님 앞에 보물을 들고 나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
나는... 거의 항상... 단 한 개도 찾지 못했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나에게는 그 "보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내 눈 앞에 있는데도 나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옆에서 친구가 손으로 가리켜 보여 줘야 그제서야 보인다는 사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내가 보물찾기 게임에서 상을 탄 적이 있다면, 그것은 친구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 줬거나, 아니면 여러개를 찾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하나 건네 준 것을 받은 것으로 상을 탄 경우이다. 불쌍한 내 인생...
나는 뭔가를 찾는 것을 잘 못한다. 집에서의 서열이 맨 끝에서 두번째였던 나는 아버지, 어머니, 두 형의 심부름을 많이 해야 했다.(물론 내 유일한 동생인 막내 녀석처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 심부름이 어디 가서 뭘 찾아오라는 심부름이라면, 나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너무 잘 아는 가족들은 "찾는" 심부름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
결혼 한 뒤, 아내는 그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 뭔가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자주 했다. 그리고 물건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때로는 비난도 하고, 때로는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다.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그것을 못 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요즘... 아내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포기를 한 것 같다. 아내가 바쁜 일로 정신없을 때, 가끔씩 나에게 뭔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대부분 잘 찾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고 체념했기 때문이다.
왜 내 눈에는 그런 것들이 잘 안 보이는 것일까?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가 딱 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말씀을 볼 때... 성경말씀을 읽을 때는 성경에 담겨있는 보물들, 맨눈으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깊은 뜻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쉽게 발견이 된다. 책을 펼치면, 보화로 깔려 있는 땅, 금 광맥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넘쳐나는 것을 본다. 때로는 일별(一瞥)하여 보이지 않는 것도,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보물을 보게 된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만지게 되고, 이 세상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을 진리가 내 눈에 들어와 박힌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잘 포착하고, 세상적인 보물들을 그렇게 잘 발견하면서도, 성경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세상적으로는 부요한 자가 되었겠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난한 자가 되었을까?
세상의 보물을 향한 나의 눈을 멀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의 보물을 발견하는 눈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Spiritual treasure hunter로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가, 주님 앞에 보물을 들고 나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
Posted at
오전 3:28:00
갈대 지팡이
애굽의 모든 거민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로 흔들리게 하였느니라.(겔 29:6-7)
비록 바벨론이 세력을 얻던 시대에 애굽은 예전과 같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용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큰 나라였다.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유다로서는 의지할 바가 애굽밖에는 없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애굽을 의지하려는 유다백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였다.
"바벨론은 너희와 너희 조상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 징계를 받아라. 70년 후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이 땅으로 돌리실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최후의 순간, 위기의 순간에 자신들의 조상신 야웨가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었다. 자신들이 그분을 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분의 약속만은 믿었다. 그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
물론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지켜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바로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음란하게 우상들을 섬기면, 그들은 분명히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유다통치자들과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축복가운데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겠다는 말씀만 기억했다... 아니, 그것만 듣고 싶어 했다. 심지어 그 조건문 조차도 기억하지 않고, 그냥 보호하시고 지키시겠다는 말씀만 주워 담아 기억한 것이다.
그런 그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할 수 없었다. 만일 야웨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실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면, 그들은 애굽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소위 "믿음"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데 쓰였을 뿐,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는 전혀 쓰임받지 못했다.
야웨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던 그들은, 그들의 심령에서 진정으로 의지할 만하다고 판단한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들이 진정으로 의지한 것은 애굽이었다. 애굽이 그들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애굽은 "갈대지팡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연약하여 힘이 없어서,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져 버리는... 그 자신도 똑바로 설 수 없는 그런 지팡이... 하나님의 말씀 대로, 애굽은 힘없이 바벨론에 무너져 내리고, 거기로 망명했던 유다의 잔당들, 예레미야를 끌고 갔던 잔당들은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면, 그 믿음은 나를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든다. 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갈대지팡이에 불과하지만,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애굽'에 의지할 수 밖에 없도록 나를 이끈다. 결코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그분만을 붙잡고 의지하며 나아가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그런 소위 "신앙"의 끝은 파멸이고 멸망일 뿐이다.
현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나 또한 그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인지...
오늘도 겸손히 내 '믿음'을 돌아본다. 그 믿음이 얼마나 성경적 진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지... 주님께 간구하며, 통애하는 마음으로 갈대지팡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반석 위에 내 믿음을 세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
.
비록 바벨론이 세력을 얻던 시대에 애굽은 예전과 같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용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큰 나라였다.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유다로서는 의지할 바가 애굽밖에는 없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애굽을 의지하려는 유다백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였다.
"바벨론은 너희와 너희 조상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 징계를 받아라. 70년 후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이 땅으로 돌리실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최후의 순간, 위기의 순간에 자신들의 조상신 야웨가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었다. 자신들이 그분을 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분의 약속만은 믿었다. 그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
물론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지켜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바로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음란하게 우상들을 섬기면, 그들은 분명히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유다통치자들과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축복가운데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겠다는 말씀만 기억했다... 아니, 그것만 듣고 싶어 했다. 심지어 그 조건문 조차도 기억하지 않고, 그냥 보호하시고 지키시겠다는 말씀만 주워 담아 기억한 것이다.
그런 그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할 수 없었다. 만일 야웨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실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면, 그들은 애굽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소위 "믿음"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데 쓰였을 뿐,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는 전혀 쓰임받지 못했다.
야웨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던 그들은, 그들의 심령에서 진정으로 의지할 만하다고 판단한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들이 진정으로 의지한 것은 애굽이었다. 애굽이 그들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애굽은 "갈대지팡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연약하여 힘이 없어서,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져 버리는... 그 자신도 똑바로 설 수 없는 그런 지팡이... 하나님의 말씀 대로, 애굽은 힘없이 바벨론에 무너져 내리고, 거기로 망명했던 유다의 잔당들, 예레미야를 끌고 갔던 잔당들은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면, 그 믿음은 나를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든다. 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갈대지팡이에 불과하지만,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애굽'에 의지할 수 밖에 없도록 나를 이끈다. 결코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그분만을 붙잡고 의지하며 나아가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그런 소위 "신앙"의 끝은 파멸이고 멸망일 뿐이다.
현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나 또한 그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인지...
오늘도 겸손히 내 '믿음'을 돌아본다. 그 믿음이 얼마나 성경적 진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지... 주님께 간구하며, 통애하는 마음으로 갈대지팡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반석 위에 내 믿음을 세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
.
Posted at
오전 4:16:00
휴식..
학교 휴일인 어제, 도서관이 문을 안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왔다. 책 한 권을 읽어 해 치워야 했기 때문에... 이 건물 저 건물을 오가며 앉아서 책을 읽는데, 몸이 많이 피곤함을 느꼈다. 책에 집중도 되지 않고, 졸음이 오고... 겨우 50페이지 정도를 읽고 나서는 포기하고 학교를 나섰다.
차를 몰고 학교를 떠나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교회로 가서 읽을까? 아니면 스타벅스나 모짜르트? 편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내 몸은 자동적으로 차를 집으로 몰고 있었다. 거의 기계적으로...
집에 도착하니 휴일이라 집에 있던 하연이와 예연이가 나를 반긴다. 역시 집이 최고지... 공부하기에는 최악이지만... 몸이 안 좋을 것 같아서 잠깐 동안 잠을 자기로 했다. 평소에는 낮잠 자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 아무래도 몸은 잠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집에 오니 약간 더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오후 4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4시에 휴대폰 알람이 울릴 때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20분 정도 잘거라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무려 11시간 30분을 잔 것이었다. 식사도, 화장실도 가지 않고, 계속 잠만 잤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평소같으면, 그렇게 오래 잔 것에 대해서 매우 기분이 언짢았을 것이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원래 낮잠을 20분 이상 자고 나면 기분이 매우 나빠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사했다. 휴식을 주신 하나님께...
금요일 저녁에 밤 늦게까지 교회에서 목장모임을 하고, 토요일 아침 일찍 교회목자모임에 참석하고, 그 후에 긴장된 시간 속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저녁에 말씀을 전하고, 주일 아침 1부예배 시간에 실행위원회 미팅을 갖고, 예배드린 다음, 청년부 목자모임을 갖고, 그 직후 집에서 팀장들과 식사를 하고, 조금 일찍 잠들었지만, 새벽 두 시부터 깨는 바람에 잠을 거의 못잔 주말을 보냈기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할 일은 많았지만, 그래도 휴식을 깊게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밀린 일들을 생각하면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내가 최선을 다해 수고해야만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모든 것을 주님께 맞기는 자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게으르게 사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다 해보려고 하는 그런 노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신앙생활의 또 하나의 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누리는 자는 바쁜 삶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여유"를 갖는 사람이 된다. 집착과 성취와 결과에 대한 것을 내려 놓고, 순간순간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 삶은 풍요로와 진다.
모처럼 가진 긴 잠, 깊은 휴식을 통해 주님께 감사하게 된다.
차를 몰고 학교를 떠나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교회로 가서 읽을까? 아니면 스타벅스나 모짜르트? 편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내 몸은 자동적으로 차를 집으로 몰고 있었다. 거의 기계적으로...
집에 도착하니 휴일이라 집에 있던 하연이와 예연이가 나를 반긴다. 역시 집이 최고지... 공부하기에는 최악이지만... 몸이 안 좋을 것 같아서 잠깐 동안 잠을 자기로 했다. 평소에는 낮잠 자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 아무래도 몸은 잠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집에 오니 약간 더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오후 4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4시에 휴대폰 알람이 울릴 때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20분 정도 잘거라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무려 11시간 30분을 잔 것이었다. 식사도, 화장실도 가지 않고, 계속 잠만 잤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평소같으면, 그렇게 오래 잔 것에 대해서 매우 기분이 언짢았을 것이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원래 낮잠을 20분 이상 자고 나면 기분이 매우 나빠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사했다. 휴식을 주신 하나님께...
금요일 저녁에 밤 늦게까지 교회에서 목장모임을 하고, 토요일 아침 일찍 교회목자모임에 참석하고, 그 후에 긴장된 시간 속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저녁에 말씀을 전하고, 주일 아침 1부예배 시간에 실행위원회 미팅을 갖고, 예배드린 다음, 청년부 목자모임을 갖고, 그 직후 집에서 팀장들과 식사를 하고, 조금 일찍 잠들었지만, 새벽 두 시부터 깨는 바람에 잠을 거의 못잔 주말을 보냈기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할 일은 많았지만, 그래도 휴식을 깊게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밀린 일들을 생각하면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내가 최선을 다해 수고해야만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모든 것을 주님께 맞기는 자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게으르게 사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다 해보려고 하는 그런 노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신앙생활의 또 하나의 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누리는 자는 바쁜 삶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여유"를 갖는 사람이 된다. 집착과 성취와 결과에 대한 것을 내려 놓고, 순간순간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 삶은 풍요로와 진다.
모처럼 가진 긴 잠, 깊은 휴식을 통해 주님께 감사하게 된다.
Posted at
오전 2: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