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4장 1절-10절 묵상

오늘 아침 예레미야서를 묵상했다. 24장 1절부터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두 광주리에 담긴 무화과를 보여 주신다. 한 광주리에는 지극히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좋지 못한 무화과가 담겨 있었다.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듯이 이번에도 한 쪽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을 다른 한쪽은 유다에 남아 있거나 이집트로 망명한 유다인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을 좋은 무화과로, 다른 부류를 악한 무화과로 평가하신다. 과연 그 평가는 맞는 것인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 그들은 바벨론으로 곱게 모셔져간 자들이 아니다. 유다를 침공한 강력한 군대인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비참하게 끌려간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민족과 고향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전쟁포로로서 쇠사슬에 매인 상태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다로부터 바벨론까지 그 먼거리를 걸어서 끌려간 자들이었다. 바벨론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은 삶이었다. 그것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약간 보여 준다.

시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시 137: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바벨론 강가에서 유다 포로들은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감시하는 자("우리를 사로잡은 자")들은 그들을 조롱했으며, 고단한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유대 전통 노래를 한 곡조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을 위해 노래하는 가운데, 그들은 고국을 떠난 자신들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게 되고, 사무치는 고향생각에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반면, 유대에 남아 있는 자들은 아직 조국 회복의 소망, 전에 앗수르를 물리쳤던 것과 같은 극적인 생존을 희망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정통 강대국인 애굽의 도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각오하는 가운데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고, 땅과 동포가 있었다. 그들이 의지할 애굽도 있었고, 그 애굽도 자신들을 돕기로 약속한 상태에 있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바벨론 포로들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었고, 자신들의 처지가 결코 선해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왜 그런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원망하며 따지고 들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은 비록 자신들도 힘든 처지에 있기는 했지만, 포로로 끌려간 불쌍한 동포들에 비하면 훨씬 더 나은 처지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지금 있는 그 상태로 독립을 유지하며 오랫 동안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분명히 달랐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이 "극히 좋은 무화과"였고,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은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과 악의 기준과 우리 인간의 기준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다시 말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평가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 자의든 타의든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이었던 바벨론 포로들은 생명을 유지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70년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하였고, 이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그들에 의해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반면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최후의 잔당은 애굽으로 망명한 뒤, 애굽이 바벨론에 의해 처절하게 유린당할 때 같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것을 볼 때 하나님의 평가가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당시의 무리들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그 평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평가였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나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입에서, 고백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판단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나에게 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 가족 중에 큰 병이 걸린 사람은 낫게 해 주시는 것이 좋은 것이고, 내가 기본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은 공급해 주셔야 좋은 것이고,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루어 주셔야 좋은 것이다. 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고, 내가 곤경에 처하는 것도 좋지 않은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기는 것도 좋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의 평가보다 더 위에 둔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내가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쉽게 원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간다.

유대민족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나오는 그 때는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때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기준을 의심해야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는 무화과가 그리 좋지 않게 보이고, 하나님께서 좋지 않다고 평가하시는 무화과가 좋아 보일 때, 그 때가 바로 내가 잘못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싸인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다. 따라서 내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좋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왜 좋은 것인지는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혹은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충분히 나눈 후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당신에 대한 신뢰이다. 믿음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는 사람은 설사 욥이 당하는 극한의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이라는 우상을 내려 놓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섬기는 자는 진실로 복되다.

아빠 이거 알아요?

(2005.12.30에 쓴 글)

늘 그렇듯이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눈을 부비면서 허겁지겁 아침을 먹고 있었다. 급한 대로 혼자 밥을 먹은 것이다...
하연이가 뭘 들고 와서 열심히 적고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뭔가 하는 호기심에 들여다 봤더니 영어로 단어를 적는 작은 책이었다. 그 책에서 하연이가 적어야 할 내용은 각 동물들의 새끼 이름을 적는 것이었다.

하연이가 물었다.

"아빠! 아기 sheep은 뭐라고 불러요?"
(자신있게...) "그건 Lamb이지.. L-A-M-B!"

하연이는 불러주는 철자를 열심히 받아 적는다... 그리고 나서 묻는다.

"아빠! 아기 cow는 뭐라고 불러요?"
(역시 자신있게...)"그건 Calf라고 불러.. C-A-L-F!"

'아빠는 역시 대단해...'라고 생각하는 듯 이번에도 열심히 받아 적는다... 그리고 나서 묻는다.

"아빠! 아기 horse는 뭐라고 불러요?"
"......"
"예? 뭐라고 불러요~~~?"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데..."

그 때 애 엄마가 하연이가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다른 교재를 들고 와서 보여준다. 하연이 왈..

"Foal이었지! F-O-A-L..."

일단 자존심이 구겨졌다.. 다음 번 것은 잘 하리라... 하연이가 또 묻는다..

"아기 Duck는 뭐예요?"
"응~~~ Duckling이지... D-U-C-K-L-I-N-G!"

여기서 자존심을 약간 회복... 이 여세로 몰고 가기로 작정..

"아빠! 아기 pig는 뭐예요?"

약간 멈칫... 생각.. 그리고 나서..

"Piglet이야.. P-I-G-L-E-T-T-E!"

말해 놓고 뭔가 좀 이상하다.. 그래서 밥먹다 말고 영어 사전을 찾았다.. 흐이구... 철자가 틀렸다..

"하연아! 아빠가 틀렸네... 맨 끝에 있는 T-E를 빼야겠다... 그리고 piggy도 같은 뜻이네..."

이제는 밥을 다 먹고 일하러 갈 생각도 않고 하연이가 들여다 보는 책을 같이 봤다. '한꺼번에 처리해 버리지 뭐..'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데... 거기 나온 그림들을 보내 기가 팍 죽었다... 토끼, 염소, 칠면조 등등...
'새끼 토끼를 영어로 뭐라더라? 새끼 칠면조는?'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빠는 영어를 잘한다고 항상 생각해온 하연이 앞에서 끝내 버벅대면서 "아빠도 모르겠다... 나중에 사전 찾아서 알려줄께!"하고 항복을 선언하고 서둘러서 일하러 나갔다.

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영어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했고, 지금까지 원어민을 제외하고는 영어로 누구에게 주눅들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하연이가 보는 작은 책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하연이에게서 영어를 배울 날이 그리 멀지 않았나보다...

나는 철저히 현실주의자가 되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어온 나에 대한 말은 "융통성이 없다"와 "현실을 잘 모른다"는 말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 평가는 정확히 맞다. 나는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융통성이 적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 소망은 내가 철저하게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평생을 남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 '융통성'이란 너무나 많은 경우 정도를 벗어나는 것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뇌물을 받고 정직하지 못하게 일을 처리해 주는 것도 융통성이고, 법과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도 융통성에 포함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라고 적당히 잘 봐주는 것도 융통성에 해당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융통성이 없는, 법과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현실주의도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실주의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그 현실을 전부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전부인 세계관이 바로 현실주의이다. 예를 들어 현실주의적으로 볼 때, 내가 청년부를 섬기면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미국에 박사학위를 위해서 왔고,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도 8년 정도 걸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시간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보내는 그 많은 시간은 사치이고, 이상주의자의 허영에 불과하다. 경제적인 부분을 봐도 그렇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한 학기, 혹은 일 년을 생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돈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벌어야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벌 궁리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현실주의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내 유학 생활은 반드시 공부와 돈벌이에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이 투자되어야 한다. 그래도 그 현실을 감당하기 버겁다.

내 삶은 그 현실주의적인 판단과 거리가 멀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공부 외의 것, 돈버는 것 외의 것에 사용되고 있다. 유학생으로서 불필요한 사치에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내가 내 눈으로보고 내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하는 그 세계만이 현실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정의한 현실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리스도는 모든 판단에서 제외된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나의 주인이시다. 그런데 그 분, 그 살아계시는 분이 모든 판단에서 제외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현실주의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인 관점인 것이다.

진정한 현실주의는 진리에 기반을 두는 인식론이다. 진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 기반을 둔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이 진리되신다. 내 삶의 인식이 그 예수님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가른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들과, 내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실 인식을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변의 것들이다.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분의 뜻이 있다. 그분께서 내 삶에 원하시는 그 뜻을 내 실제 삶의 중심에 두고 그것에 기반해서 현실을 인식해 나갈 때, 그것은 진리에 기반을 둔 현실 인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현실주의자의 삶이다. 따라서 현실주의는 물리적인 세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까지도 아우르는 폭넓은 현실 인식이다.

내 주인이신 그분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내 삶을 꾸려 나가야 할 것인지 분명해진다. 내가 비록 가난한 유학생이지만, 비록 내 능력에 넘치는 공부량과 해야할 일들에 허덕이는 자이지만, 그것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 삶을 드리는 것이 지극히 현실적인 삶인 이유가 그것이다. 그것은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마지막이 있고, 그 마지막 날에 내 주인이신 그분 앞에서 내 인생을 계수하는 그날이 있음을 인지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오는 결론인 것이다.

나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고 싶다.

아빠의 역할

지난 두 주는 하연이와 예연이가 차례대로 아파서 학교에 못가고 집에 누워 있었다. 열때문에 벌개진 얼굴로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아빠로서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럴 때면 나는 바로 아빠로서의 장난을 시작한다. 표정으로, 혹은 말로 광대 노릇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한참 정신 없이 누워서 힘들어 하다가 아빠의 장난이 시작된 것을 보면서 그 벌건 얼굴로 웃음을 그치지 못한다. 나는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더우기 아파 힘들어 할 때에는...

집 밖에서는 사실 유머 감각도 없고, 늘 진지하기만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집에서, 특히 아이들에게 나는 많은 경우 코미디언이고 장난꾸러기다. 그런 나를 아이들이 좋아한다. 나는 그것이 좋다.

어렸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탈무드라는 책에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엄하지만 무섭지 않은 존재여야 한다."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은 인자와 사랑을 공급하는 역할이어야 하고, 아빠의 역할은 엄마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엄한 아버지가 무섭지 않을 수 있을까? 무섭지 않으면 어떻게 엄한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내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다. 엄하셨는지는 그렇지 않으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무서운 분이셨다. 우리 네 형제가 되도록이면 피하고 도망가기를 원했던 존재,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버지셨다. 그래서 나는 무서운 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그렇지 않고 무섭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아빠가 된 지금, 그 말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하다"는 것은 아이들의 잘못과 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따끔하게 질책하여 바로 잡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엄한" 아버지가 맡아야 할 역할이다. "무서운" 아버지가 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평소의 상태에 있을 때 언제든지 접근 가능하고 친숙하게 느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해서 야단을 쳐야 하는 때에도 아이들과 아이들의 죄/잘못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서 그 아이들의 인격에 상처를 주지 않는 그런 아빠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격언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코미디언, 장난꾸러기 아빠가 갑자기 엄해 지는 것을 보는 아이들은 때로는 많이 혼란스러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빠가 엄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도와 준다면, 아이들은 아빠의 자신들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빠가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싫어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될 때, 아이는 그 잘못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진다. 아빠와 함께 그 죄/잘못을 싫어하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내 자신이 부족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신앙 안에서 성숙해 갈수록 아빠의 역할도 점차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것을 경험한다. 결국 아빠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주님 안에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

하연이와 예연이의 아빠로서의 나... 아이들을 대하면서 "엄하지만 무섭지 않은 아빠"라는 탈무드의 지혜가 항상 내 가슴을 울린다.

아... 자본주의여...(2)

(... 앞에 이어서 계속)

그가 링에 공을 밀어 넣는 기술을 가지고 6천만불을 벌게 된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수요가 있고 공급이 있으면 거기에는 시장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시장의 수요량과 공급량의 상관관계가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면서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의 가격을 결정한다. 그 가격이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희소성이 있으면 가치는 높아질 수 밖에 없고, 희소성이 없으면 가치는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희소한 것이라도 찾는 사람이 없으면 가격은 높아질 수 없다.

언뜻 보기에 매우 공정해 보이고, 객관적으로 한 물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잘 반영할 것 같은 시장 메커니즘은 사실 반드시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시장을 지배했던 거대 자본을 통한 독과점의 문제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수요의 창출을 조작 혹은 그 수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시장이 공정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농구의 예를 든다면, 앞에서 말했듯이, 농구는 하나의 공을 동그란 링 안에 넣는 게임이다. 그것이 게임이기 때문에 자체의 룰이 있고, 그 룰을 어기지 않는다면, 그 링 안에 공이 들어갈 때 점수를 얻는 것이 농구의 가장 기초적인 fact이다. 그렇다면 링 안에 공이 들어가는 것의 가치는 얼마인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링 안에 공을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진 그 능력의 가치는 얼마인가? 그리고 그것의 가치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누가 정하는가? 누가 그 능력을 소비하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마이클 조던이 공을 링에 집어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3천만불의 연봉을 받았다. 그의 능력은 1년간 시카고 불스라는 구단에 rent가 된 것이고, 그 구단은 그것을 위해 그 많은 액수를 지불한다. 그 구단이 그 액수를 지불할 수 있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막대한 이익을 그 능력으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관중 수입, 광고수입, 방송료, 구단관계 물품들(유니폼, 모자 등등)의 판매 등에서 그것이 나온다. 계산은 간단하다. 스타 플레이어가 있고, 승률이 높고, 박진감 있는 경기가 있으면 그 모든 수입은 올라가게 마련이다. 마이클 조던은 이를 위해 딱 맞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어마어마한 액수를 주고서라도 그 능력을 rent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농구를 매우 잘하는 마이클 조던이라는 사람과 그의 능력이 구단에서 원하는 수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농구를 탁월하게 잘하는 능력을 소유한 것과 막대한 돈을 버는 것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 많은 것들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마케팅이 그 하나이고, PR을 통한 이미지 관리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은 일종의 "신화화"이다. 다시 말하면, 마이클 조던에 대한 (반드시 fiction만은 아니지만..) 신화적 이야기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신화화는 "영웅화"와 일맥 상통한다. 마이클 조던이 단순히 공을 던져서 링 안에 그 공을 집어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한 인간이 아니라 위대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 신비적 존재, 신화적 존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한 게임에 불과한 농구는 이제 피튀기는 "전투"가 되고, 거기에서 일어난 동작들에 의미가 더해지기 시작하며(스포츠 해설) 뒷얘기들이 생성되어가고, 그것을 통해서 위대한 인물, 위대한 영웅 "마이클 조던"이 탄생한다. 옛날에는 위대한 장수들에게 갔던 존경과 찬사가, 전쟁이 사라지고, 컴퓨터 게임화되고, 일상에서부터는 멀어져버린 일부 선진 자본국가에서는 일종의 "싸움"인 스포츠와 스포츠 스타에게 돌아간다. 스포츠를 설명하고 기술할 때 쓰이는 많은 용어들이 전쟁 용어임을 기억한다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 인물이 영웅화 되어가고, 거기에 의미들이 더 덧붙여지고, 그것에 의해서 수요는 조작되어간다. 그런 작업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은 바로 거대자본이다. 거대자본은 그 자본들을 통해 manipulation작업에 들어가고, 그 수요를 조작하는 작업은 "항상" 자신의 몸집을 더 크게 불리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간다. 물론 모든 소비주체들이 아무런 생각이나 저항 없이 그 조작에 넘어가지는 않지만, 그들의 소비 패턴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대 자본의 "조작"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 조작들을 통해서 판이 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 먹고 살게 되기 때문이다. 농구라는 게임이 신화화 되고, 마이클 조던이 수퍼스타로 부상함에 따라서 소비가 증가하게 되고, 그 판에 뛰어든 모든 기업이나 개인들은 그것을 통해서 생활응 영위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크게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그리고 바로 이런 재미없는 글을 쓰게 된 것은) 그 가치가 정말로 정당한 가치인가이다. 마이클 조던이 공을 링에 넣는 기술을 가진 것이 6천만불의 가치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논리에서(자본주의적 시장 논리) 본다면 분명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논리가 항상 옳은지, 그리고 항상 최선인지를 묻는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아침 일찍 사람들이 드문 거리를 청소하고 있는 청소부의 일을 생각해 보자. 그의 청소하는 노동과 마이클 조던이 링에 공을 넣는 "노동"을 비교했을 때,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가? 밤새 지저분해진 그 거리를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리하기 위해서 흘리는 한 청소부의 땀방울과 농구대에 공을 밀어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흘리는 마이클 조던의 땀방울의 가치가 얼마나 차이가 날까? 청소부가 시간당 10불씩 받고 일주일에 40시간씩 일한다고 했을 때 버는 돈은 일년에 2만불 정도... 그렇다면 그들의 가치가 3천배의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논리를 떠나서, 아침을 깨끗하게 여는 청소부의 노동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과 농구 공을 동그란 rim에 집어 넣은 마이클 조던의 노동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3천배의 차이가 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분명 청소부의 노동이 사회에 더 큰 공헌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가치를 3배, 30십배 혹은 300배가 아닌 3천배의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 자본주의는 과연 올바른 것인가? 제로섬 게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유한한 자원을 가진 이 지구에서 소수가 그렇게 과도하게 자원을 독식하는 것을 허용하는 자본주의...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세상의 모습일까? 그것이 정당한 것일까?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일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지만, 뛰어나지 않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걱정없이 살만 한 그런 시스템은 없을까? 능력 없는 사람들도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것이 내가 평생 고민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고민만 하지 않을까?

(참고로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두지만, 나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둘은 낭만주의의 소산이며, 그 시스템들은 근본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 두 시스템의 기본 가정이 "인간은 선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인간은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낭만적인 이상주의로 접근했을 때 자본주의보다 더 처절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제도들이다.)

아... 자본주의여...(1)

예전에 마이클 조던을 무척 좋아 했었다. 그의 농구 실력은 가히 그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예술이었고, 그의 사람됨에서 풍겨나오는 카리스마가 매력적이었다. NBA의 최고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정말 보기 드문 스타였다.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창 때 그가 받았던 연봉은 3천만불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광고나 기타 수익까지 합치면 1년에 6천만불을 벌어 들였다는 이야기도 기억난다. 만불이나 십만불 정도면 그 돈이 얼마나 큰지 감이 잡히는데, 백만불 이상을 넘어가면, 그건 "엄청나게 많다" 혹은 "매우 크다" 정도의 느낌을 주는 숫자로만 인식되기 때문에 잘 감이 안 온다. 6천만불이면 나처럼 가난한 유학생의 (마이클 조던이 활약했던 당시로 볼 때) 일년 생활비인 (많게 잡아서) 2만불의 3천배 정도 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지금처럼 생활한다면 3천년을 살아갈 수 있는 액수라고 환산을 하고난 뒤에야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조금은 깨닫게 되는 정도다.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액수를 단 일년에 벌어들이는 놀라운 능력의 사람... 그가 마이클 조던이다.

시카고 불스가 우승을 하느냐 아니면 2등에 머무느냐는 절대절명의 순간. 점수는 엎치락 뒤치락 몇 초 남은 순간까지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모두들 긴장하고 있는 그 때, 가장 확실하게 점수를 내서 끝을 맺을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 순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조던에게 기대를 걸고, 그가 농구공을 농구대의 링 가운데로 통과시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지켜보고 있다. 그 중압감 속에서 경기는 다시 시작하고, 몇 초 남지 않은 순간, 팀은 최선을 다해서 슛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작전과 노력 끝에 기회는 왔고, 바로 그 때 공은 조던의 손을 떠나 링으로 향한다. 마치 슬로 모션으로 보는 것과 같은 클라이맥스의 순간, 공은 링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불스는 NBA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시카고는 축제의 분위기가 되고,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은 조던의 기술과 과감함에 찬사를 보내며 그를 칭송한다.

이것이 바로 조던으로 하여금 1년 동안 6천만불을 벌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에게나 찾을 수 없는 재능이 있다. 그것은 농구 공을 링에 꽂아 넣어서 통과 시킬 가능성이 그 누구보다도 높게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가 속한 팀이 공 넣기 작업을 가장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 같은 이 한편의 장면 뒤에는 자본주의와 그의 핵심인 시장경쟁의 논리가 그대로 깔려 있다. 마이클 조던은 농구라고 하는 스포츠의 시장에서 희소성을 가진 능력과 인격의 소유자이다. 그에 대한 수요는 너무 많고,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는 극히 드물다(아니 그 혼자일 뿐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그의 "값"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게 책정이 되고, 그 높은 몸값에도 불구하고, 그를 고용하는 자가 생겨난다. 그는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한 승자이다. 그는 희소한 재능을 타고났고, 그 재능이 최대한으로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한 자였고, 노력과 재능이 최대한으로 꽃 핀 결과로 모든 경쟁에서 최고의 승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승자에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이 마땅하며 그 대우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6천만불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연봉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어차피 세상은 경쟁이고 부정한 수단을 쓰지 않는다면 그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삶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매우 단순화 해서 볼 때, 농구라는 게임은 작은 공 하나를 동그란 링 가운데로 통과시키는 게임이다. 복잡한 규칙이 있지만, 그 규칙 내에서 공을 원에 통과 시키면 점수를 얻는 게임이다. 그것을 최고의 기술로 성공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6천만불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기술 자체가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인가? 무슨 기술이든지 조던 급의 기술이 있다면, 그 정도의 재능과 노력이 있다면, 같은 액수를 벌 수 있을까?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