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4장 1절-10절 묵상

오늘 아침 예레미야서를 묵상했다. 24장 1절부터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두 광주리에 담긴 무화과를 보여 주신다. 한 광주리에는 지극히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좋지 못한 무화과가 담겨 있었다.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듯이 이번에도 한 쪽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을 다른 한쪽은 유다에 남아 있거나 이집트로 망명한 유다인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을 좋은 무화과로, 다른 부류를 악한 무화과로 평가하신다. 과연 그 평가는 맞는 것인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 그들은 바벨론으로 곱게 모셔져간 자들이 아니다. 유다를 침공한 강력한 군대인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비참하게 끌려간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민족과 고향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전쟁포로로서 쇠사슬에 매인 상태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다로부터 바벨론까지 그 먼거리를 걸어서 끌려간 자들이었다. 바벨론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은 삶이었다. 그것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약간 보여 준다.

시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시 137: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바벨론 강가에서 유다 포로들은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감시하는 자("우리를 사로잡은 자")들은 그들을 조롱했으며, 고단한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유대 전통 노래를 한 곡조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을 위해 노래하는 가운데, 그들은 고국을 떠난 자신들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게 되고, 사무치는 고향생각에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반면, 유대에 남아 있는 자들은 아직 조국 회복의 소망, 전에 앗수르를 물리쳤던 것과 같은 극적인 생존을 희망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정통 강대국인 애굽의 도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각오하는 가운데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고, 땅과 동포가 있었다. 그들이 의지할 애굽도 있었고, 그 애굽도 자신들을 돕기로 약속한 상태에 있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바벨론 포로들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었고, 자신들의 처지가 결코 선해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왜 그런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원망하며 따지고 들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은 비록 자신들도 힘든 처지에 있기는 했지만, 포로로 끌려간 불쌍한 동포들에 비하면 훨씬 더 나은 처지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지금 있는 그 상태로 독립을 유지하며 오랫 동안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분명히 달랐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이 "극히 좋은 무화과"였고,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은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과 악의 기준과 우리 인간의 기준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다시 말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평가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 자의든 타의든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이었던 바벨론 포로들은 생명을 유지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70년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하였고, 이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그들에 의해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반면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최후의 잔당은 애굽으로 망명한 뒤, 애굽이 바벨론에 의해 처절하게 유린당할 때 같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것을 볼 때 하나님의 평가가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당시의 무리들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그 평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평가였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나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입에서, 고백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판단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나에게 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 가족 중에 큰 병이 걸린 사람은 낫게 해 주시는 것이 좋은 것이고, 내가 기본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은 공급해 주셔야 좋은 것이고,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루어 주셔야 좋은 것이다. 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고, 내가 곤경에 처하는 것도 좋지 않은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기는 것도 좋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의 평가보다 더 위에 둔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내가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쉽게 원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간다.

유대민족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나오는 그 때는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때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기준을 의심해야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는 무화과가 그리 좋지 않게 보이고, 하나님께서 좋지 않다고 평가하시는 무화과가 좋아 보일 때, 그 때가 바로 내가 잘못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싸인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다. 따라서 내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좋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왜 좋은 것인지는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혹은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충분히 나눈 후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당신에 대한 신뢰이다. 믿음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는 사람은 설사 욥이 당하는 극한의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이라는 우상을 내려 놓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섬기는 자는 진실로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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