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름이 한 껏 더해진 하나님의 동산...
주위에는 먹을 음식으로 넘쳐나고,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그곳...
하나님의 돌보심과 따뜻한 사랑, 기쁨의 교제가 넘쳐나는 그 상황...
하나님의 지켜보심이 있는 그곳...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 줄 사랑의 동역자가 있는 그곳.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기에 완벽한 조건을 가진 그곳...
척박한 광야...
독거미와 독사와 전갈과 몇몇 죽음의 새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광야...
40일을 다녔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도대체 찾아 볼 수 없는 굶주림의 땅... 실로 아무 것도 갖춰져 있지 않은 그 땅...
거기에는 타락을 감시하는 어떤 시선도 없었다...
그리고 그 타락으로부터 도울 어떤 동역자도 없는 절대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그 곳...
하나님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완벽한 조건을 가진 그곳...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 에덴 동산에서, 한갖 피조물로 하나님께 순종했어야 마땅한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께 죄를 지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 당신이 되시기 때문에, 굳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예수님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함으로 죄를 거부했다.
Irony...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 두 사람을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반대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이다.
(뱀의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 하시더냐? (하와의 말) 하나님의 말씀에 ... 하셨느니라(창 3:2-3)
인간인 하와와 뱀의 대화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대화였다. 그 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말하면, 단어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기를 원하시는 무게를 가지고 다가오지 않았다. 그 무게는 매우 줄어들어 있었으며, 자신히 불순종할, 죄를 지을 그 상황에서 원래의 무게를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말씀을 쉽게 저버릴 수 있었다.
예수님은 어떤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 4:7)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예수님께서 단순히 사탄에게 시험문제 3개를 받고, 거기에 적절한 답을 말씀에서 찾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규정되며,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으로 하나님 차원에서의 말씀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순종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 한 단어 한 단어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거는 순종을 마귀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분은 말씀을 인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 그대로 사실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셨기 때문에, 결코 배고파서 자신의 1차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돌을 떡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하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마귀는 지속적으로 그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했을 것이다. 마귀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마음과 그 삶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 이상 시험해 봐야 헛수고라는 것을 알고 미리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차이이다.
그 첫째 아담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다. 나는 최적의 환경, 최고의 환경에서도 언제든지 불순종할 수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예수님처럼 완전한 순종을 드리는 것은, 나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아무리 달달 외우고, 상황마다 적절한 말씀을 떠 올리고 적용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나는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만 가능하다. 그분이 내 안에 사셔서, 그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긴 그 순종으로 나를 인도하실 때에만 예수님의 순종이 내 안에서 나타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죽고 그분이 내 안에 사실 때에만 참된 순종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순종은 척박한 광야에서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결국 예수님께 무릎꿇고 죄를 멀리하는 그런 결과를 내 삶 가운데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신 분이시다.
주님에 내 안에 살아 계시는 한, 나도 그런 위대한 순종을 드릴 수 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요 복이다.
도대체.. 무슨 빽으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재산을 가진 부모도...
내세울만한 지능도, 지식도...
인간 관계를 자산으로 만들 만큼 영리하지도, 싹싹하지도 않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이 나이가 되도록, "미래"를 바라보면 "준비"하고 있는 불쌍한 신세...
세상에 내 세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바로... 나.
그런데 도대체 무슨 빽이 있길래, 그렇게 자신 만만한가? 왜 그리 태평한가?
터키에 있는 후배가 어제 말했다. "세상 살아보니 너무 힘드네요..."
버젓한 직장이 있고, 거기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데...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동화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걱정을 모르는 아이들과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방금...
지난 월요일에 내가 이끌었던 discussion section에 observer로 참석했던 학교의 staff과 미팅을 하고 왔다.
그의 결론은 "No problem. Excellent!"
그가 정리해서 보고한 내용을 나에게도 한 카피를 줬다.
나는 나에게 strength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아닌데...'
그의 반응을 보면서, 그리고 그 보고서를 보면서 내 마음에 든 생각이다. 그것은 내가 아닌데... 그 때, 정말 엉망으로 했었는데...
그 수업을 위해 기도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임하셔서 나를 도우시도록, 아니, 그 수업을 이끄시도록 기도했었다.
Observer가 본 것은... 내가 아니라, 내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 자리에 함께하신 하나님을 본 것이었다. 그분이 일하시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렇다...
가진 것 없는 나에게, 하나님은 내 빽이 되신다. 내 능력이 되시고, 내 재산이 되시고, 내 지혜가 되시고, 내 자랑이 되신다.
세상을 향한 내 자신감은 바로 거기에 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이 암담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내일 굶어 죽을 수 있다는 절박감 속에서도 여유있게 살 수 있는 것,
남들은 모두 신음 가운데서 두려워 하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때문이다.
오늘도 감사드린다...
재산을 가진 부모도...
내세울만한 지능도, 지식도...
인간 관계를 자산으로 만들 만큼 영리하지도, 싹싹하지도 않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이 나이가 되도록, "미래"를 바라보면 "준비"하고 있는 불쌍한 신세...
세상에 내 세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바로... 나.
그런데 도대체 무슨 빽이 있길래, 그렇게 자신 만만한가? 왜 그리 태평한가?
터키에 있는 후배가 어제 말했다. "세상 살아보니 너무 힘드네요..."
버젓한 직장이 있고, 거기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데...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동화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걱정을 모르는 아이들과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방금...
지난 월요일에 내가 이끌었던 discussion section에 observer로 참석했던 학교의 staff과 미팅을 하고 왔다.
그의 결론은 "No problem. Excellent!"
그가 정리해서 보고한 내용을 나에게도 한 카피를 줬다.
나는 나에게 strength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아닌데...'
그의 반응을 보면서, 그리고 그 보고서를 보면서 내 마음에 든 생각이다. 그것은 내가 아닌데... 그 때, 정말 엉망으로 했었는데...
그 수업을 위해 기도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임하셔서 나를 도우시도록, 아니, 그 수업을 이끄시도록 기도했었다.
Observer가 본 것은... 내가 아니라, 내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 자리에 함께하신 하나님을 본 것이었다. 그분이 일하시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렇다...
가진 것 없는 나에게, 하나님은 내 빽이 되신다. 내 능력이 되시고, 내 재산이 되시고, 내 지혜가 되시고, 내 자랑이 되신다.
세상을 향한 내 자신감은 바로 거기에 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이 암담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내일 굶어 죽을 수 있다는 절박감 속에서도 여유있게 살 수 있는 것,
남들은 모두 신음 가운데서 두려워 하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때문이다.
오늘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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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00:00
믿음...
믿음은 신비한 것이다.
뭔가 분명한 것이 내 안에서, 내 존재의 근원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습관의 변화도, 신념의 변화도, 삶의 목적의 변화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현상들일 따름이다.
믿음은 신비한 능력이 내 안에 형성되는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되고, 또한 나로서는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하지 않게 되는 그 능력이 내 안에 생기는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지혜가 내 안에서 솟아나고, 내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이 나로부터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것은 내가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성령께서 사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분명하다. 그것은 절대 오해할 수 없다.
그분 때문에 죄를 이기게 되고, 그분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된다.
그분이 이 죄악된 나를 사로잡기 때문에 악이, 그리고 죄가 나를 절대로 정복하지 못한다.
내가 죄 아래로 팔려가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그분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다.
그리고 그것을 일상에서 경험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뭔가 분명한 것이 내 안에서, 내 존재의 근원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습관의 변화도, 신념의 변화도, 삶의 목적의 변화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현상들일 따름이다.
믿음은 신비한 능력이 내 안에 형성되는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되고, 또한 나로서는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하지 않게 되는 그 능력이 내 안에 생기는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지혜가 내 안에서 솟아나고, 내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이 나로부터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것은 내가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성령께서 사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분명하다. 그것은 절대 오해할 수 없다.
그분 때문에 죄를 이기게 되고, 그분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된다.
그분이 이 죄악된 나를 사로잡기 때문에 악이, 그리고 죄가 나를 절대로 정복하지 못한다.
내가 죄 아래로 팔려가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그분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다.
그리고 그것을 일상에서 경험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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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09:00
[시]여행을 가고싶다
여행을 가고싶다 - 김정한
이름도 모르는 어느 한적한 마을에
세상 속 묻은 때 다아 벗어버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첫 모습으로 그렇게 살다 오고 싶다
비가 오면 둑길을 거닐어보고 꿋꿋하게 버티는 삶의 저항을 배우고
바람이 불면 언덕위로 올라 끄덕하지 않는 삶의 도전도 배우고
구수한 사투리와 검게 탄 얼굴을 보며
힘들게 살아온 지난날을 파헤쳐 정겨운 입담 속에 다아 흘려 버리고 싶다
여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얻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빼앗으려고 서로들 발버둥치고 발이 있어도 옳은 길로 가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사랑으로 안지 못하는 그런 인간 세상이 서글프다
이제는 하늘을 보며 무작정 기다리지 않는
삶의 모질고 끈질긴 인내심도 누구처럼 배우고 싶다
내가 누군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넉넉한 인심과 때 묻지 않은 그런 사람들 틈에서 며칠을 살다가
내가 사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
이름도 모르는 어느 한적한 마을에
세상 속 묻은 때 다아 벗어버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첫 모습으로 그렇게 살다 오고 싶다
비가 오면 둑길을 거닐어보고 꿋꿋하게 버티는 삶의 저항을 배우고
바람이 불면 언덕위로 올라 끄덕하지 않는 삶의 도전도 배우고
구수한 사투리와 검게 탄 얼굴을 보며
힘들게 살아온 지난날을 파헤쳐 정겨운 입담 속에 다아 흘려 버리고 싶다
여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얻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빼앗으려고 서로들 발버둥치고 발이 있어도 옳은 길로 가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사랑으로 안지 못하는 그런 인간 세상이 서글프다
이제는 하늘을 보며 무작정 기다리지 않는
삶의 모질고 끈질긴 인내심도 누구처럼 배우고 싶다
내가 누군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넉넉한 인심과 때 묻지 않은 그런 사람들 틈에서 며칠을 살다가
내가 사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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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09:00
I really hate...
I really really really really really really really really hate grading papers...
It's time consuming and exhausting.
Correcting the grammatical errors, bad word choices, ambiguous expressions, problematic sentences, unthinkably messy paragraphs, and sloppy organization is awful...
Unrelated ideas, useless imaginations, insignificant chores, and illogical assertions are unforgivable...
Still... I HAVE TO grade...
It's time consuming and exhaus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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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31:00
[시] 내가 가난할 때
내가 가난할 때
김현승
내가 가난할 때......
저 별들의 더욱 맑음을 보올 때.
내가 가난할 때......
당신의 얼굴을 다시금 대할 때.
내가 가난할 때......
내가 肉身(육신)일 때.
은밀한 곳에 풍성한 생명을 기르시려고,
작은 꽃씨 하나를 두루 찾아
나의 마음 저 보라빛 노을 속에 고이 묻으시는
당신은 오늘 내 집에 오시어,
金銀(금은) 기명과 내 평생의 값진 道具(도구)들을
짐짓 門(문)밖에 내어 놓으시다!
김현승
내가 가난할 때......
저 별들의 더욱 맑음을 보올 때.
내가 가난할 때......
당신의 얼굴을 다시금 대할 때.
내가 가난할 때......
내가 肉身(육신)일 때.
은밀한 곳에 풍성한 생명을 기르시려고,
작은 꽃씨 하나를 두루 찾아
나의 마음 저 보라빛 노을 속에 고이 묻으시는
당신은 오늘 내 집에 오시어,
金銀(금은) 기명과 내 평생의 값진 道具(도구)들을
짐짓 門(문)밖에 내어 놓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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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58:00
상념...
오랫만에 아는 사람을 만났다.
7년 전 영어수업에서 만난 중국 여학생... 영어수업에서는 보기 드물게 인문학을 하는 학생이라서 쉽게 가까와졌다. 중국에서 영문학을 했었고 여기서는 비교문학을 하면서 중국문학 쪽에 좀 더 비중을 두고 공부하는 학생이다.
인문학과 문화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졌다. 다른 중국학생들과는 다르게(?) 착하기도 하고 순진하기도 한 사람이라서 더 마음에 들었다. 나이가 어려서 여동생처럼 지냈었고, 학교에서 자주 만났었고, 우리 집에도 한 번 초대 받아서 와서 식사를 했었다.
하지만 청년부를 섬기면서부터 내가 시간이 거의 없다보니, 그 동안 오가면서 우연히 만났을 때 인사하는 정도였을 뿐, 만나지는 못했다. 청년부 사역을 그만두고 나니, 이제는 그 동안 관계를 맺지 못하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매년 중국을 다녀오는 그 학생... 얼마 전에 또 중국에 다녀 왔다면서 이메일로 연락을 해 왔다. 그래서 약속을 잡았고, 오늘 참으로 오랫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영어로 대화하는 부담스러운 시간이지만, 두 시간의 시간이 언제 갔는지 모를 정도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눴다. 논문 쓰는 어려움과 팀... 각자의 논문 주제를 서로 나누고, 거기에 자신이 아는 것들을 좀 더 보태주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동안 남자친구가 없었던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것, 하지만 졸업 아후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의견차를 보이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7년 동안 알아왔지만,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니.. 그럴 기회는 있었지만, 이 여학생은 이미 복음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접하고 가까이 했던 중국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들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기독교를 (복음이 아니라) 접했던 그녀는 나중에 내가 복음에 대해서 나누기를 원했을 때,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예 듣기를 거부했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예수님의 엄중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물론 그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을 무턱대고 비판할 수는 없다. 그들이 최선을 다했는데도 이 여학생이 오해를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들은 몇 경우는 바로 이 말씀에 해당하는 행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로 인해서 그 영혼이 복음의 가능성으로부터 돌아서 버린 것이다.
앞으로 좀 더 자주 만나기로 했다. 도서관의 같은 층에 방이 있으니 자주 만나서 논문과 진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정말 기도하기는, 그 만남들 속에서 내가 복음을 설명할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부정적인 경험과 인식을 버리고 진지하게 복음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생명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한다.
7년 전 영어수업에서 만난 중국 여학생... 영어수업에서는 보기 드물게 인문학을 하는 학생이라서 쉽게 가까와졌다. 중국에서 영문학을 했었고 여기서는 비교문학을 하면서 중국문학 쪽에 좀 더 비중을 두고 공부하는 학생이다.
인문학과 문화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졌다. 다른 중국학생들과는 다르게(?) 착하기도 하고 순진하기도 한 사람이라서 더 마음에 들었다. 나이가 어려서 여동생처럼 지냈었고, 학교에서 자주 만났었고, 우리 집에도 한 번 초대 받아서 와서 식사를 했었다.
하지만 청년부를 섬기면서부터 내가 시간이 거의 없다보니, 그 동안 오가면서 우연히 만났을 때 인사하는 정도였을 뿐, 만나지는 못했다. 청년부 사역을 그만두고 나니, 이제는 그 동안 관계를 맺지 못하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매년 중국을 다녀오는 그 학생... 얼마 전에 또 중국에 다녀 왔다면서 이메일로 연락을 해 왔다. 그래서 약속을 잡았고, 오늘 참으로 오랫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영어로 대화하는 부담스러운 시간이지만, 두 시간의 시간이 언제 갔는지 모를 정도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눴다. 논문 쓰는 어려움과 팀... 각자의 논문 주제를 서로 나누고, 거기에 자신이 아는 것들을 좀 더 보태주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동안 남자친구가 없었던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것, 하지만 졸업 아후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의견차를 보이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7년 동안 알아왔지만,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니.. 그럴 기회는 있었지만, 이 여학생은 이미 복음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접하고 가까이 했던 중국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들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기독교를 (복음이 아니라) 접했던 그녀는 나중에 내가 복음에 대해서 나누기를 원했을 때,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예 듣기를 거부했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예수님의 엄중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물론 그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을 무턱대고 비판할 수는 없다. 그들이 최선을 다했는데도 이 여학생이 오해를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들은 몇 경우는 바로 이 말씀에 해당하는 행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로 인해서 그 영혼이 복음의 가능성으로부터 돌아서 버린 것이다.
앞으로 좀 더 자주 만나기로 했다. 도서관의 같은 층에 방이 있으니 자주 만나서 논문과 진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정말 기도하기는, 그 만남들 속에서 내가 복음을 설명할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부정적인 경험과 인식을 버리고 진지하게 복음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생명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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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00:00
경고를 받아들이는 마음...
몇 주 전에 타이어 rotation을 하러 늘 가는 타이어 전문점에 갔다. 그 곳의 서비스가 빠르기도 하지만(예약하고 가면 20분 이내에 모두 완료), 싸기도 하고, 또 친절하고 적극적인 종업원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타이어에 관련된 일이 있으면 늘 거기로 간다. 그 가게에서 타이어를 한 개라도 샀다면 6천마일마다 공짜로 rotate해 주고, 공기압을 체크하며, wheel balance도 무료로 해 주기 때문에 부담없이 갔다.
그날도 미리 예약하고 일찍 가게에 갔다. 가게에 들어 서기도 전에, 직원이 나와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나를 맞이하고는 같이 내 차로 가서 타이어를 체크했다. 타이어 rotation과 핸들의 떨림 때문에 wheel balance를 다시 체크하고 싶다고 말하니 문제 없단다. 그러면서 타이어 하나가 거의 다 닳아서 당장 교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소에 타이어를 가끔씩 체크하는 나로서는 좀 의아했다. 직접 손으로 깊이 파인 홈을 만져보고, 거기에 있는 gauge로 늘 체크하는데, 타이어 네 개 모두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있었더니, 더 협박을 한다. 길가다가 터지면 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조금 생각한 후 나중에 교체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0분 후... 모든 작업는 끝났고, 돈 한 푼 안내고, 차를 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기분이 참 좋았다.
집에 도착한 후 타이어를 다시 점검해 보았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네 개의 타이어 모두 정상이었다. 다른 타이어보다 좀 더 마모가 심한 타이어가 하나 있었지만, 앞으로도 한참을 탈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직원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타이어를 교체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었다.
내 차의 타이어의 상태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할 때는, 아무래도 흠칫하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돌아보며, 아무리 확실한 것이라도 다시 점검하게 된다. 그것이 전문가의 말의 위력이다.
하지만 세상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 그의 경고는 내 차를 진지하게 다시 돌아보는 데까지 나를 인도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경고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나에게 주는 경고라면 어떨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그 무게만큼 받지 않는다. 그 경고에 흠칫하거나, 약간 마음의 거리낌을 느끼긴 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무서운 말씀으로 받지 않는다. 타이어 전문가가 타이어가 문제가 생겨 달리는 도중에 터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해도, 그렇게 말한 동기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말의 나에 대한 impact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은 여과 없이, 그 말씀 그대로를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도, 내 마음은 어느새 그것을 tone down해서 듣는다. 그 경고가 경고로 들리지 않는다. 그 경고의 말씀에 즉시 무릎꿇고 회개하거나 돌이키는 action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교훈 정도로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내 생각과 내 처지와 내 감정을 섞어 넣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더 흐리게 만든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들어가고, 진노의 불길을 더욱 더 거세게 함으로 화를 자초한다.
아! 끊임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이여... 완악함이여...
그날도 미리 예약하고 일찍 가게에 갔다. 가게에 들어 서기도 전에, 직원이 나와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나를 맞이하고는 같이 내 차로 가서 타이어를 체크했다. 타이어 rotation과 핸들의 떨림 때문에 wheel balance를 다시 체크하고 싶다고 말하니 문제 없단다. 그러면서 타이어 하나가 거의 다 닳아서 당장 교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소에 타이어를 가끔씩 체크하는 나로서는 좀 의아했다. 직접 손으로 깊이 파인 홈을 만져보고, 거기에 있는 gauge로 늘 체크하는데, 타이어 네 개 모두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있었더니, 더 협박을 한다. 길가다가 터지면 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조금 생각한 후 나중에 교체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0분 후... 모든 작업는 끝났고, 돈 한 푼 안내고, 차를 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기분이 참 좋았다.
집에 도착한 후 타이어를 다시 점검해 보았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네 개의 타이어 모두 정상이었다. 다른 타이어보다 좀 더 마모가 심한 타이어가 하나 있었지만, 앞으로도 한참을 탈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직원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타이어를 교체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었다.
내 차의 타이어의 상태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할 때는, 아무래도 흠칫하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돌아보며, 아무리 확실한 것이라도 다시 점검하게 된다. 그것이 전문가의 말의 위력이다.
하지만 세상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 그의 경고는 내 차를 진지하게 다시 돌아보는 데까지 나를 인도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경고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나에게 주는 경고라면 어떨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그 무게만큼 받지 않는다. 그 경고에 흠칫하거나, 약간 마음의 거리낌을 느끼긴 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무서운 말씀으로 받지 않는다. 타이어 전문가가 타이어가 문제가 생겨 달리는 도중에 터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해도, 그렇게 말한 동기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말의 나에 대한 impact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은 여과 없이, 그 말씀 그대로를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도, 내 마음은 어느새 그것을 tone down해서 듣는다. 그 경고가 경고로 들리지 않는다. 그 경고의 말씀에 즉시 무릎꿇고 회개하거나 돌이키는 action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교훈 정도로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내 생각과 내 처지와 내 감정을 섞어 넣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더 흐리게 만든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들어가고, 진노의 불길을 더욱 더 거세게 함으로 화를 자초한다.
아! 끊임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이여... 완악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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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54:00
[펌] 절망을 이기는 자...
김회권 목사님의 "청년설교" 중에서...
==============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그런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남의 것을 좀 빼앗아 내가 행복해지려는 제로섬 게임을 즐기는 어설프고 속좁은 지성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참 구겨진 휴지조각 같다'고 느낄 때 하늘의 열림을 맛볼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어느 순간에 '내가 구겨진 휴지조각이 아니다'라는 각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호주머니에 감춰진 누렇게 바랜 휴지조각처럼 살아 가는 내 인생의 심각함을 하나님이 아실까? 이렇게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아둥바둥 살아가는 나 같은 것을 신경이나 쓰실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자존감이 무너지고 스스로를 존중하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늘이 열리기를 간구합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생각하고 절망의 수용소 같은 현실 속에서도 오늘 하루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은 하늘의 열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을 경험하면서, 조국 유다가 망한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아예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안에서 부활하고 갱생될 것을 깨달았습니다. 민족적 대갱생에 걸맞게 더 신령한 성전이 지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불확실성 속에 우리를 집어 던지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늘이 열리기를 기대하도록 인도하신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여기서 우리의 살 길을 찾아 내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확실성 속에 집어 던진 순간, 그때부터 우리가 꿈틀거리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짐짝처럼 집어 던져 놓고 찾지도 않는 그런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억장 무너지는 절망의 강에 집어 던져지는 순간에, 하늘의 열림을 갈망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그런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남의 것을 좀 빼앗아 내가 행복해지려는 제로섬 게임을 즐기는 어설프고 속좁은 지성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참 구겨진 휴지조각 같다'고 느낄 때 하늘의 열림을 맛볼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어느 순간에 '내가 구겨진 휴지조각이 아니다'라는 각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호주머니에 감춰진 누렇게 바랜 휴지조각처럼 살아 가는 내 인생의 심각함을 하나님이 아실까? 이렇게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아둥바둥 살아가는 나 같은 것을 신경이나 쓰실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자존감이 무너지고 스스로를 존중하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늘이 열리기를 간구합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생각하고 절망의 수용소 같은 현실 속에서도 오늘 하루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은 하늘의 열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을 경험하면서, 조국 유다가 망한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아예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안에서 부활하고 갱생될 것을 깨달았습니다. 민족적 대갱생에 걸맞게 더 신령한 성전이 지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불확실성 속에 우리를 집어 던지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늘이 열리기를 기대하도록 인도하신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여기서 우리의 살 길을 찾아 내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확실성 속에 집어 던진 순간, 그때부터 우리가 꿈틀거리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짐짝처럼 집어 던져 놓고 찾지도 않는 그런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억장 무너지는 절망의 강에 집어 던져지는 순간에, 하늘의 열림을 갈망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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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04:00
나를 사랑하는 것...
요즘 수염을 기르면서 생긴 버릇이 있다.
아랫턱을 쓰다듬는 것과 거울을 보는 것.
남자라서 그런가...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거울을 보는 것이 고작일 뿐, 거울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평생... 내 얼굴을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멋내는 것도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냥 생긴대로 살기 때문에 거울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 부쩍 거울을 많이 본다. 수염이 자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수염... 어제도 어떤 나이든 자매님이 내 수염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수염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수염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흘러간 세월의 길이에 대한 객관적인 지표를 볼 수 있고, 그것을 보면서 나에 대해서, 내 믿음에 대해서, 내 순종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염은 꾸준히 자라지만, 내 안에서 내려 놓음은 그에 비례하지 않는 것을 느끼며, 주님 앞에 겸손해진다.
토요일... 욕실 세면대에서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참으로 오랫만에 힐끗 내 몸(웃통을 벗은 몸)을 보게 되었다. 얼마만에 본 내 몸인가? 몸을 보면서 세월의 흔적을 많이 느꼈다. 밋밋해져버린 몸. 축 쳐진 살. 여기저기 보이는 주름살.. 젊은 시절 그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이든 아저씨의 몸이 거기 있었다. 슬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하나님께...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무책임하게 방치한 것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인데... 그토록 오래 방치해 놓으니 이모양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조차도 내것이라고 생각하니 함부로 다루고 가꿀 생각을 하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내 영혼을... 내 육체를... 내것으로 여기고 마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위해 가꾸고 관리하고, 그분께서 받으실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분의 것을 소중이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주님의 것을 아름답게 가꾸기로 했다. 청년의 때에 가졌던 그 아름다운 몸을 회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가꾸는 목표를 가지고 운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로 했다.
이를 통해서 몸의 운동 뿐만 아니라, 영혼도 말갛게 씻어내고, 군살이 없이 탄탄한 몸을 가진 영혼으로 가꿔나가는 작업을 해야겠다. 내 욕심과 내 죄로 말미암아 쌓여 있는 영혼의 군살들을 없애고, 순전한 근육으로 하나님의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영적 순발력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가야겠다.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나를 가장 아름답게 가꿔가는 것이다.
아랫턱을 쓰다듬는 것과 거울을 보는 것.
남자라서 그런가...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거울을 보는 것이 고작일 뿐, 거울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평생... 내 얼굴을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멋내는 것도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냥 생긴대로 살기 때문에 거울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 부쩍 거울을 많이 본다. 수염이 자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수염... 어제도 어떤 나이든 자매님이 내 수염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수염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수염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흘러간 세월의 길이에 대한 객관적인 지표를 볼 수 있고, 그것을 보면서 나에 대해서, 내 믿음에 대해서, 내 순종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염은 꾸준히 자라지만, 내 안에서 내려 놓음은 그에 비례하지 않는 것을 느끼며, 주님 앞에 겸손해진다.
토요일... 욕실 세면대에서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참으로 오랫만에 힐끗 내 몸(웃통을 벗은 몸)을 보게 되었다. 얼마만에 본 내 몸인가? 몸을 보면서 세월의 흔적을 많이 느꼈다. 밋밋해져버린 몸. 축 쳐진 살. 여기저기 보이는 주름살.. 젊은 시절 그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이든 아저씨의 몸이 거기 있었다. 슬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하나님께...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무책임하게 방치한 것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인데... 그토록 오래 방치해 놓으니 이모양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조차도 내것이라고 생각하니 함부로 다루고 가꿀 생각을 하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내 영혼을... 내 육체를... 내것으로 여기고 마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위해 가꾸고 관리하고, 그분께서 받으실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분의 것을 소중이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주님의 것을 아름답게 가꾸기로 했다. 청년의 때에 가졌던 그 아름다운 몸을 회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가꾸는 목표를 가지고 운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로 했다.
이를 통해서 몸의 운동 뿐만 아니라, 영혼도 말갛게 씻어내고, 군살이 없이 탄탄한 몸을 가진 영혼으로 가꿔나가는 작업을 해야겠다. 내 욕심과 내 죄로 말미암아 쌓여 있는 영혼의 군살들을 없애고, 순전한 근육으로 하나님의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영적 순발력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가야겠다.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나를 가장 아름답게 가꿔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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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14:00
무식함
삶을 더 살아가면서, 그리고 공부를 해 나가면서 분명히 깨닫게 되는 한 가지는 내가 절대적으로 무식하다는 것이다. 마치 태평양 바다와 같이 넓은 지식의 세계에서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물 한 컵도 안되는 정도라고 할까?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TA인 나를 가리켜 Expert라고 소개하는 것 자체가 많이 부담스럽다.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인생을 통해서 배운 것은 내 지식을 뛰어넘는, 지식 밖의 세계가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알아 나가는 것보다 알아야 할 것들(다시 말해 내가 무지한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 정복할 수 없는 지식의 바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나는 진정으로 무식한 자이다. 무/식/한 자이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그런 자가 바로 나다.
다행인 것은... 그런 무식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문제이다. 아무리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나보다는 덜 무식하겠지만, 결론은 무식하다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하는 한 사람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가 아는 선배는 교회에서 리더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던 그가 어느날 소그룹 모임에서 고백했단다. "지식을 더 많이 쌓을수록, 더 많은 것을 알아 갈수록, 성경이 얼마나 형편 없는 책인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
과연 그럴까? 세상의 지식은 방대하다. 하지만 그 방대한 지식을 창출한 자들이 얼마나 무식한 자들인지, 그리고 그들이 쌓은 소위 학문 체계가 얼마나 오류 덩어리인지, 모순 덩어리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선배라는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들의 짧은 지식의 모음에 의해서 판단되고 제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무식하다는 깨달음도 얻지 못한 초보적인 인식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젠가 유명한 철학자인 Bertrand Russell이 Why I am not a Christian이라는 글을 썼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 그 사고의 엄밀성과 지식의 방대함으로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는 그 철학자의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비판은 한 마디로 천박하기 그지 없는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그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무화과를 마르게 하신 예수님에 대한 글은 학문을 하는 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인 텍스트의 바른 분석과 그 텍스트가 작성된 시대적 배경과 그 시대의 관점에서 텍스트를 해석해 내는 것을 배제하고 있다. 그 본문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과 주장만을 내세우며,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그의 모습은 뛰어난 철학자의 "무식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무식함... 나는 그 무식함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평생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뛰어난 사상가들이 그 무식함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나 또한 치가 떨리는 내 무식함을 평생 벗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 무식함 가운데 많은 오류를 생산해 내고,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세상의 광대한 그 지식의 세계, 내가 보기에 태평양 바다보다 더 넓어 보이는 그 세계는, 하나님 앞에는 한 방울의 물보다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식 그 자체이시며, 그분의 지식은 광대하여 측량할 수 없다. 그분 앞에서 나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절대 무식한 존재일 뿐이며, 지식을 조금이라도 자랑할 수 없다.
그분이 내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내 아버지이시다.
그 사실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나는 무식하지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이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지식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그 모든 지식을 동원하셔서 나를 인도하시며 나를 가르치신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도, 그분은 이해하시며, 내가 무식하여도 그분은 아신다.
그런 그분 앞에 내가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주장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고집 부릴 것이 무엇인가?
내 무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이길려고 하는 무모한 짓을 감행하는 어리석을 자가 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식 앞에, 그분의 지혜 앞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의 말씀 앞에 무조건 엎드려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분의 말씀이 무식한 나를 설득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내가 이해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나는 순종할 뿐이다.
내 무식함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복이 되는 것을 본다.
세상으로 볼 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고, 인정받지 못할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바로 복이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복받은 자이다. 부끄러운 내 무식함 때문에 그분께 복받은 자이다.
무식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TA인 나를 가리켜 Expert라고 소개하는 것 자체가 많이 부담스럽다.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인생을 통해서 배운 것은 내 지식을 뛰어넘는, 지식 밖의 세계가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알아 나가는 것보다 알아야 할 것들(다시 말해 내가 무지한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 정복할 수 없는 지식의 바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나는 진정으로 무식한 자이다. 무/식/한 자이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그런 자가 바로 나다.
다행인 것은... 그런 무식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문제이다. 아무리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나보다는 덜 무식하겠지만, 결론은 무식하다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하는 한 사람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가 아는 선배는 교회에서 리더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던 그가 어느날 소그룹 모임에서 고백했단다. "지식을 더 많이 쌓을수록, 더 많은 것을 알아 갈수록, 성경이 얼마나 형편 없는 책인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
과연 그럴까? 세상의 지식은 방대하다. 하지만 그 방대한 지식을 창출한 자들이 얼마나 무식한 자들인지, 그리고 그들이 쌓은 소위 학문 체계가 얼마나 오류 덩어리인지, 모순 덩어리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선배라는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들의 짧은 지식의 모음에 의해서 판단되고 제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무식하다는 깨달음도 얻지 못한 초보적인 인식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젠가 유명한 철학자인 Bertrand Russell이 Why I am not a Christian이라는 글을 썼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 그 사고의 엄밀성과 지식의 방대함으로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는 그 철학자의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비판은 한 마디로 천박하기 그지 없는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그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무화과를 마르게 하신 예수님에 대한 글은 학문을 하는 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인 텍스트의 바른 분석과 그 텍스트가 작성된 시대적 배경과 그 시대의 관점에서 텍스트를 해석해 내는 것을 배제하고 있다. 그 본문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과 주장만을 내세우며,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그의 모습은 뛰어난 철학자의 "무식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무식함... 나는 그 무식함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평생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뛰어난 사상가들이 그 무식함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나 또한 치가 떨리는 내 무식함을 평생 벗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 무식함 가운데 많은 오류를 생산해 내고,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세상의 광대한 그 지식의 세계, 내가 보기에 태평양 바다보다 더 넓어 보이는 그 세계는, 하나님 앞에는 한 방울의 물보다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식 그 자체이시며, 그분의 지식은 광대하여 측량할 수 없다. 그분 앞에서 나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절대 무식한 존재일 뿐이며, 지식을 조금이라도 자랑할 수 없다.
그분이 내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내 아버지이시다.
그 사실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나는 무식하지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이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지식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그 모든 지식을 동원하셔서 나를 인도하시며 나를 가르치신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도, 그분은 이해하시며, 내가 무식하여도 그분은 아신다.
그런 그분 앞에 내가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주장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고집 부릴 것이 무엇인가?
내 무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이길려고 하는 무모한 짓을 감행하는 어리석을 자가 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식 앞에, 그분의 지혜 앞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의 말씀 앞에 무조건 엎드려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분의 말씀이 무식한 나를 설득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내가 이해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나는 순종할 뿐이다.
내 무식함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복이 되는 것을 본다.
세상으로 볼 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고, 인정받지 못할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바로 복이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복받은 자이다. 부끄러운 내 무식함 때문에 그분께 복받은 자이다.
무식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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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05:00
그래도 음악이다...
좋은 스피커는...
음악의 저음을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울리도록 한다. 그 저음은 공간을 뒤흔드는 저음이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저음으로 만든다. 드럼의 낮으면서도 강한 비트가 은은하게 음악 전반의 페이스를 맞추어 가는 가운데, 베이스 기타의 리듬이 조화를 이룬다. 저음의 악기들이 개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음악의 활동 공간을 형성하도록 만들어 준다.
고음의 경우에는 음색을 그대로 살려준다. 어쿠스틱 기타의 리드미컬 하면서도 청아한 선율을 그대로 담아낸다. 보컬의 목소리가 악기에 묻히지 않으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잘 연결되어 혼연일체가 되도록 만들어 준다. 한국 고전음악의 경우 강렬한 고음의 피리 소리의 애절함이나, 영산회상의 상영산 첫부분을 장식하는 양금의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깨끗한 명정지수처럼 듣는 이의 귀를 맑게한다. 여러 고음의 악기들이 저음의 배경 위에서 개성있게 놀게 된다. 높은 음이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고, 저음에 흡수되면서도 고음의 색을 그대로 나타내도록 만들어 준다.
좋은 스피커는 각 음악이 추구하는 바를 그대로 담아내어 그 분위기와 감정을 증폭하여 전달해 준다. 좋은 스피커를 통해서 듣는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쾌감을 느끼게 하며 공연장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가난한 나로서는 한 세트에 최소 몇 천불, 많게는 몇 만불씩하는 좋은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듣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것은 음악 매장에서 우연히 만난 최고의 스피커 앞에서 잠깐 동안 즐기거나, 그 음향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집이나 장소를 방문했을 때, 귀동냥으로 즐기는 것 뿐이다.
현실적으로 나에게는 자동차의 스피커와 컴퓨터 음악이 거의 유일한 도구이다.
사실 그런 도구들을 통해서 듣는 음악은 감동이 현저히 반감된다. 저음은 거의 강조되지 않거나, 소리를 내더라도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는 가운데 고상함을 잃어버린다. 고음은 날카롭게 귀를 파고 들지만, 그 악기들의 개성은 사라져버린 후이고, 아무렇게나 뒤섞인 소리들은 잡음에 가까운 소리로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음악이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다.
볼륨을 있는 대로 높이고, 차를 달리는 가운데, 잡음에 가까운 음악이지만, 차 안을 가득히 채우는 음악은, 나름대로 감동을 선사한다. 내 공간이 음악으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 그 음악 가운데 내가 있고, 내가 그 음악에 잠겨 있다는 느낌은 나를 늘 행복하게 만든다.
귀는 괴롭지만, 마음은 즐거운,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 차안에서 일어난다.
오늘 저녁... 혼자 I-35를 오랫동안 달리며 나는 오랫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음 가운데 푹 잠겼다.
음악의 저음을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울리도록 한다. 그 저음은 공간을 뒤흔드는 저음이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저음으로 만든다. 드럼의 낮으면서도 강한 비트가 은은하게 음악 전반의 페이스를 맞추어 가는 가운데, 베이스 기타의 리듬이 조화를 이룬다. 저음의 악기들이 개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음악의 활동 공간을 형성하도록 만들어 준다.
고음의 경우에는 음색을 그대로 살려준다. 어쿠스틱 기타의 리드미컬 하면서도 청아한 선율을 그대로 담아낸다. 보컬의 목소리가 악기에 묻히지 않으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잘 연결되어 혼연일체가 되도록 만들어 준다. 한국 고전음악의 경우 강렬한 고음의 피리 소리의 애절함이나, 영산회상의 상영산 첫부분을 장식하는 양금의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깨끗한 명정지수처럼 듣는 이의 귀를 맑게한다. 여러 고음의 악기들이 저음의 배경 위에서 개성있게 놀게 된다. 높은 음이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고, 저음에 흡수되면서도 고음의 색을 그대로 나타내도록 만들어 준다.
좋은 스피커는 각 음악이 추구하는 바를 그대로 담아내어 그 분위기와 감정을 증폭하여 전달해 준다. 좋은 스피커를 통해서 듣는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쾌감을 느끼게 하며 공연장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가난한 나로서는 한 세트에 최소 몇 천불, 많게는 몇 만불씩하는 좋은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듣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것은 음악 매장에서 우연히 만난 최고의 스피커 앞에서 잠깐 동안 즐기거나, 그 음향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집이나 장소를 방문했을 때, 귀동냥으로 즐기는 것 뿐이다.
현실적으로 나에게는 자동차의 스피커와 컴퓨터 음악이 거의 유일한 도구이다.
사실 그런 도구들을 통해서 듣는 음악은 감동이 현저히 반감된다. 저음은 거의 강조되지 않거나, 소리를 내더라도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는 가운데 고상함을 잃어버린다. 고음은 날카롭게 귀를 파고 들지만, 그 악기들의 개성은 사라져버린 후이고, 아무렇게나 뒤섞인 소리들은 잡음에 가까운 소리로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음악이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다.
볼륨을 있는 대로 높이고, 차를 달리는 가운데, 잡음에 가까운 음악이지만, 차 안을 가득히 채우는 음악은, 나름대로 감동을 선사한다. 내 공간이 음악으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 그 음악 가운데 내가 있고, 내가 그 음악에 잠겨 있다는 느낌은 나를 늘 행복하게 만든다.
귀는 괴롭지만, 마음은 즐거운,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 차안에서 일어난다.
오늘 저녁... 혼자 I-35를 오랫동안 달리며 나는 오랫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음 가운데 푹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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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21:00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딤후 4:6)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장에 있는 이 말...
사도 바울의 삶과 인생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구절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며, 너무나 부러운 고백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바울. 그는 그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관제라고 표현한다. 이제 얼마 후면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로마 황제 네로의 그 광기의 희생이 되어야 할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머리가 잘려 나간 후, 자신의 목에서 치솟을 피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그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하나님 앞에 부어드리는 제사로 드리기를 갈망한다. 관제...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드린 그의 섬김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다.
평생 동안 매 순간을 자신을 관제로 드리는 자세로 살아왔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 분께 모든 것을 드리고, 그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갈망해 왔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바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바로 그런 고백을 드리는 삶, 그리고 그것을 매 순간 이루어내는 삶을 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론 그렇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은 그의 삶을 완전히 사로 잡았고, 그분께 사로잡힌 그 삶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고난 받고, 외로운 삶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그 삶을 갈망하며, 복을 누리는 삶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분께 미쳐 있었기 때문에... 그분께 사로 잡혀 살았기 때문에...
하지만 여기서 다시 그가 예수님께 사로잡힌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은 어찌보면 죽음에 그가 가졌던 관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는 그의 죽음을 "떠남"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떠나다는 의미의 원어는 "아날뤼시스"이다. 이 단어는 나중에 영어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analyze" 혹은 "analysis"가 된다. 아날뤼시스는 "해산하다"라는 뜻을 가진 다른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는 "출발하다" 혹은 "항해를 시작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단어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분리이고, 하나는 어디론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바울의 관점을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목이 잘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순간일 뿐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죽음은 몸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치 신생아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그리고 항해를 떠나는 배가 항구와 분리되어 목적지를 향해 긴 길을 떠나는 것처럼...
바울은 평생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이다. 현실을 떠나 영원으로 나아가는 삶. 그리고 그 영원 가운데서 함께할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이 바로 그의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준비를 누구보다도 철저히 하기를 원했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관제로 부어드리는 것을 기뻐했던 것이다.
위대한 사도 바울...
그의 삶을 돌아보며 내 자신을 본다. 주님께 내 삶을 관제로 부어드리기는 커녕, 죄 가운데서, 혹은 연약함 가운데서 내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을 본다. 내 영혼이 육신을 떠나 주님께로 항해할 그 순간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과 현실에서의 필요를 채우느라 급급해 하는 어리석은 내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나도 바울과 동일한 고백을 드리고 싶다. 그가 오늘 본문을 그 삶의 목표로 삶고 살았던 것처럼, 나도 동일한 고백을 내 삶가운데 구체적으로 이루며 살기를 원한다.
주님! 사도 바울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기를 원합니다. 그와 같이 지혜롭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을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 저를 완전히 사로잡아 주시고, 진정으로 복된 자로, 지혜로운 자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도록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장에 있는 이 말...
사도 바울의 삶과 인생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구절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며, 너무나 부러운 고백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바울. 그는 그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관제라고 표현한다. 이제 얼마 후면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로마 황제 네로의 그 광기의 희생이 되어야 할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머리가 잘려 나간 후, 자신의 목에서 치솟을 피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그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하나님 앞에 부어드리는 제사로 드리기를 갈망한다. 관제...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드린 그의 섬김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다.
평생 동안 매 순간을 자신을 관제로 드리는 자세로 살아왔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 분께 모든 것을 드리고, 그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갈망해 왔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바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바로 그런 고백을 드리는 삶, 그리고 그것을 매 순간 이루어내는 삶을 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론 그렇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은 그의 삶을 완전히 사로 잡았고, 그분께 사로잡힌 그 삶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고난 받고, 외로운 삶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그 삶을 갈망하며, 복을 누리는 삶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분께 미쳐 있었기 때문에... 그분께 사로 잡혀 살았기 때문에...
하지만 여기서 다시 그가 예수님께 사로잡힌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은 어찌보면 죽음에 그가 가졌던 관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는 그의 죽음을 "떠남"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떠나다는 의미의 원어는 "아날뤼시스"이다. 이 단어는 나중에 영어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analyze" 혹은 "analysis"가 된다. 아날뤼시스는 "해산하다"라는 뜻을 가진 다른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는 "출발하다" 혹은 "항해를 시작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단어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분리이고, 하나는 어디론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바울의 관점을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목이 잘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순간일 뿐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죽음은 몸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치 신생아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그리고 항해를 떠나는 배가 항구와 분리되어 목적지를 향해 긴 길을 떠나는 것처럼...
바울은 평생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이다. 현실을 떠나 영원으로 나아가는 삶. 그리고 그 영원 가운데서 함께할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이 바로 그의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준비를 누구보다도 철저히 하기를 원했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관제로 부어드리는 것을 기뻐했던 것이다.
위대한 사도 바울...
그의 삶을 돌아보며 내 자신을 본다. 주님께 내 삶을 관제로 부어드리기는 커녕, 죄 가운데서, 혹은 연약함 가운데서 내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을 본다. 내 영혼이 육신을 떠나 주님께로 항해할 그 순간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과 현실에서의 필요를 채우느라 급급해 하는 어리석은 내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나도 바울과 동일한 고백을 드리고 싶다. 그가 오늘 본문을 그 삶의 목표로 삶고 살았던 것처럼, 나도 동일한 고백을 내 삶가운데 구체적으로 이루며 살기를 원한다.
주님! 사도 바울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기를 원합니다. 그와 같이 지혜롭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을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 저를 완전히 사로잡아 주시고, 진정으로 복된 자로, 지혜로운 자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도록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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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