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푸르름이 한 껏 더해진 하나님의 동산...
주위에는 먹을 음식으로 넘쳐나고,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그곳...
하나님의 돌보심과 따뜻한 사랑, 기쁨의 교제가 넘쳐나는 그 상황...
하나님의 지켜보심이 있는 그곳...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 줄 사랑의 동역자가 있는 그곳.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기에 완벽한 조건을 가진 그곳...


척박한 광야...
독거미와 독사와 전갈과 몇몇 죽음의 새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광야...
40일을 다녔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도대체 찾아 볼 수 없는 굶주림의 땅... 실로 아무 것도 갖춰져 있지 않은 그 땅...
거기에는 타락을 감시하는 어떤 시선도 없었다...
그리고 그 타락으로부터 도울 어떤 동역자도 없는 절대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그 곳...

하나님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완벽한 조건을 가진 그곳...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 에덴 동산에서, 한갖 피조물로 하나님께 순종했어야 마땅한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께 죄를 지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 당신이 되시기 때문에, 굳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예수님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함으로 죄를 거부했다.

Irony...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 두 사람을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반대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이다.

(뱀의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 하시더냐? (하와의 말) 하나님의 말씀에 ... 하셨느니라(창 3:2-3)
인간인 하와와 뱀의 대화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대화였다. 그 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말하면, 단어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기를 원하시는 무게를 가지고 다가오지 않았다. 그 무게는 매우 줄어들어 있었으며, 자신히 불순종할, 죄를 지을 그 상황에서 원래의 무게를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말씀을 쉽게 저버릴 수 있었다.

예수님은 어떤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 4:7)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예수님께서 단순히 사탄에게 시험문제 3개를 받고, 거기에 적절한 답을 말씀에서 찾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규정되며,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으로 하나님 차원에서의 말씀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순종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 한 단어 한 단어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거는 순종을 마귀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분은 말씀을 인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 그대로 사실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셨기 때문에, 결코 배고파서 자신의 1차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돌을 떡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하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마귀는 지속적으로 그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했을 것이다. 마귀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마음과 그 삶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 이상 시험해 봐야 헛수고라는 것을 알고 미리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차이이다.
그 첫째 아담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다. 나는 최적의 환경, 최고의 환경에서도 언제든지 불순종할 수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예수님처럼 완전한 순종을 드리는 것은, 나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아무리 달달 외우고, 상황마다 적절한 말씀을 떠 올리고 적용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나는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만 가능하다. 그분이 내 안에 사셔서, 그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긴 그 순종으로 나를 인도하실 때에만 예수님의 순종이 내 안에서 나타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죽고 그분이 내 안에 사실 때에만 참된 순종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순종은 척박한 광야에서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결국 예수님께 무릎꿇고 죄를 멀리하는 그런 결과를 내 삶 가운데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신 분이시다.
주님에 내 안에 살아 계시는 한, 나도 그런 위대한 순종을 드릴 수 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요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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