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이란...

거룩한 삶은 그리스도인의 지상과제이다.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거룩에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들은 반드시 거룩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의 거룩 지수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 어떤 것이 거룩한 삶일까? 어떤 행위들이 거룩할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언젠가 갖 결혼을 한 형제가 나에게 부부간의 성관계에 대해서 고민을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 아내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뭔가 거룩하지 못하고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 느껴져서 거리껴진다는 것이다.
비단 그 형제 뿐만 아니라, 소위 "믿음이 좋은" 형제 자매들은 분명히 성적인 것에 대해 거리끼는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부부 사이에 성적인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는 경우의 많은 경우가 성 자체를 터부시하는 자매들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부부간의 성관계... 그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셨다. 그리고 최초의 커플인 아담과 하와에에게 명령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
For this reason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be joined to his wife; and they shall become one flesh.(NASB)

하나님께서 최초의 부부에게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 의미는 다중적이다. 하지만 그 여러 의미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부부간의 육체적 관계를 제외할 수는 없다.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남편과 아내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 둘에게 "원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육체적인 결합이다.

이 후 성경 전반에 걸쳐서 부부간의 성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너무 분명하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의 관계로 맺어짐에 있어서 성관계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수 많은 성경의 본문 중의 하나가 바로 아래 말씀이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1-5)
이 본문은 부부관계에서 성관계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어떤 원리에 의해서 성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지도 명시하고 있다. 그것은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의 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주장하도록, 즉 상대방이 성적 욕구가 있을 때 그것을 해소시켜 주는 것이 부부간의 도리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그 요구가 폭력적이거나 강제적이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 성경전체에서 말씀하시는 부부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 원리인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어쨋든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시고, 그 안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권장하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일" 중의 하나인 것이다. 부부간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런 관계를 터부시하며 거부하는 것이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성행위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벗어나 있거나, 그 제도 안에 있어도, 성경적 원리에 따르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든 것은 죄이다.
결국 성행위 자체가 거룩과 거룩하지 못함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합치하느냐가 구별의 기준이 된다.

같은 원리로 본다면, 기도하는 것, 말씀보는 것, 예배드리는 것 등등 그 행위 자체로 매우 거룩해 보이는 행위들도 그것이 어떤 원리에 따라서 드려지느냐에 따라 거룩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매우 사악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만, 그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간절한 마음이 없이, 냉랭한 마음으로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는다면, 그 예배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이고, 그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드려지는 행위이다. 그 행위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드려지는 것만을 기쁘게 받으신다.(레위기 제사제도 참조)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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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1-6)

믿는 자들이 믿음 안에서 굳게 설 수 있는 한 가지 힘은 "주의 날"에 관한 약속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다시 오실 그 날, 심판의 날이자 동시에 기쁨의 날인 그 날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제자들, 특히 바울도 역시 그 날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으로 힘들고 지칠 때, "주의 날"을 기억하며,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인내로 견딜 수 있다.
죄악이 나를 유혹할 때, 혹은 죄 가운데 넘어져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주의 날"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주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게 한다. 어두움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거하며 내 자신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드리기를 힘쓰게 된다.
"주의 날"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긴박성을 가지고 임하여 더 열심으로 전할 수 있게 된다.
"주의 날"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뭔가 이루어 보려고 하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주의 날"에 나를 평가하실 주님의 평가에 더 신경을 씀으로,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더 열심을 낼 수 있다.
"주의 날"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많은 달란트를 맡겨 주시고 떠나신 나의 주인이 돌아오시는 "주인의 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 하루를 충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심과 열망 가운데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그분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주의 날"의 긴박성이 빠진다면, 그 믿음은 쉽게 흔들리고,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주의 날"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이 강한 사람은 바울의 권면 대로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하는 가운데, 홀연히 임하시는 주님을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를 하는 지혜로운 자가 된다.

나는 오늘 이 시간, "주의 날"을 준비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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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고통...

주일인 어제 저녁, 한 지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을 때부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죄의 유혹 가운데서 승리하지 못하고 늘 패배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한탄을 듣게 되었다.
급기야 그는 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울어대는 그 지체... 그 통곡은 절규였고, 그것은 반복되는 죄에 의 끈질긴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의 탄성이었다. 그만큼 죄의 관성이 그를 힘 있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깨끗하고 싶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죄의 종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회한이었다. 엉엉 울어 대는 그 울음소리를 통해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아픔을 볼 수 있었다.

마귀는 그렇게 한 인간을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죄의 유혹, 그리고 그 유혹에 너무나 쉽게 반응해서 끌려가버리는 자아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신앙의 모습, 믿는 자의 삶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간극의 거리 만큼 자신에 대해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자라 가려고 노력하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그를, 주기적으로, 일 주일에 꼭 한 번씩, 나락으로 빠뜨리며 꼼짝 못하게 하는 사탄... 그는 거봐란듯이 웃으며 또 한 번의 승리를 만끽하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으리라.

나도 할 말을 잃었다. 그로 하여금 계속 울도록 그냥 둘 수 밖에...

한참을 울게 그냥 둔 뒤에, 그의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어린시절, 성장기의 시절, 그리고 나중에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지금의 모습...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통곡하며 한탄스럽게 외쳤던 "변화 없이 죄의 유혹에 쉽게 너머지고 마는 자신의 모습"은 사실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죄인인 그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변화시켜 주셨는지, 그분의 인도하심과 변화를 불러오신 자비하신 능력의 역사를 같이 나누면서, 그는 결코 예전과 같이 않으며, 새로운 존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가 믿음으로 취한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그 안에서의 거룩한 성도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고 그분으로 인해 다시 살게 되었다는 그 믿음의 고백이 어떻게 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같이 나누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실패 가운데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라고 권면했다.
사람은 죄를 짓는 동안, 그리고 그 직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가장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죄의식" 때문에 쉽게 그 앞으로 나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귀가 노리는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안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면, 그 때가 바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에게 당장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리라고 권했다.

전화 통화를 통해서 서서히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말과,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죄의 유혹이 자신을 엄습할 때, 지체없이 나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하나님을 찾으면 좋지만, 그 일에 있어 지속적으로 실패한 그에게, 눈에 보이는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이 나라면, 내가 언제든지 전화를 받을테니, 그 때마다 연락해서 같이 기도하고 권면하기로 했다.

죄의 유혹과 그 유혹에 쓰러져서 고통하는 한 지체의 일이지만, 나 또한 그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누구나에게 죄의 유혹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언제나 유혹은 강하다. 강하지 않은 유혹은 이미 유혹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정결과 거룩을 향해 나아가려는 갈망 가운데 있는 나에게, 왜 죄의 유혹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유혹과 싸우는 치열한 싸움이 끊이지 않을까?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까? 나는 늘 왜 이 모양일까? 예수님께서 친히 시험을 당하신 분으로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나에게는 시험을 이기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다시 말해 나의 죄인됨으로 인해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면, 결코 그 전과 그 이후가 같을 수 없다. 그리고 날이 감에 따라 그 변화는 반드시 내 삶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시험을 이길 수 있도도록 도우시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험이 시험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죄의 유혹이 아예 유혹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전에는 세상의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이 나를 늘 유혹하였고, 내 자신을 드러내고, 내 자신이 영광을 받고자 하는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지는 자였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그분을 체험할수록, 세상의 것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너무나 귀한 그분임을 알게 되고, 모든 영광이 그분께 돌려져야 함을 충분히 깨닫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동일한 유혹을 "느끼지 조차" 못하는 자가 되어 버린다.
내 삶에 그런 변화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둘째, 특정한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그 안에 있는 깊은 상처 때문이다.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탐닉하는 형제들,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자매들 등등.. 그런 사람들의 내면에는 깊이 상처받은 자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성경적인 지식이 많고 체험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쉽게 유혹에 무너지고 만다. 주님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우리의 상처까지도 같이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분의 영이 사시고, 그분이 내 안의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하시고, 어두운 구석에 치유의 광선인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내 안의 상처들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완전한 치유를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써, 죄의 유혹이 나를 엄습할 때,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럼으로써 죄악의 습관에 물든 우리의 본성이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하시고, 적당한 말씀을 떠올리게 하심으로써 그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게 도우시는 것이다.

언제나, 죄의 유혹을 물리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가볍게 이기신 것이 아니다. 유혹이 유혹인 한에 있어서는 언제나 나를 무너뜨릴 파워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 한 가지는, 나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죄악의 권세와 파워보다도 훨씬 더 크신 분이시며, 넉넉히 이길 힘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죄와 싸워보려고 하지 말고, 주인되신 주님을 붙잡고 의지함으로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그늘 아래 숨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죄의 유혹은 반드시 우리를 고통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주님께 피하는 자는 기쁨과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내 지체가 주님으로 인해 동일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 그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을 그날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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