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

한 여름 새벽... 그 새벽에 뼈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떠는 homeless의 그 추움...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 저녁... 모두가 집을 향하여 바쁘게 가고 있는 그 때에, 갈 집이 없는 homeless의 스산하고 우울한 가슴... 그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있을까?
한 여름 대낮에도 두꺼운 옷을 몇 겹으로 껴입은 Homeless들... 그들의 추위는 뚝 떨어진 기온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 심령의 외로움과 싸늘함에서 느껴지는 추움일 것이리라...

모든 인간은 어차피 갈 바를 알지못하고, 쉴 집을 얻지 못하고 떠도는 Hobo의 인생인 것...
절망과 고통의 바다 한 가운데서 쉴 곳을 찾지 못해 늘 방황하는 그 영혼 깊숙이 느끼는 존재의 추움으로 인해, 외로움으로 인해 모든 영혼은 떨고 있는 것...
비록 어떤 이들은 많은 소유와 명예와 친구와 다른 것들로 그것을 해소해 보려고 하지만, 그 영혼의 존재적인 외로움과 추움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 인생의 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오셨다.
그리고 그 Hobo적 인생의 한 중심에서 그 모든 인간의 아픔과 외로움과 고통을 온 몸으로 받으셨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예수님께서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허무의 썰렁함을 몸소 체험하심에서 나오는 탄식이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것은,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영접하였다는 것은 바로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존재적 Hobo로서 인생의 바다를 방향도 없이 고난 가운데 떠도는 자가 아니라 집이 있는 자로, 그것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가 계시고 나를 위해 방을 마련하시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시는 그 집을 가진 자로, 그 집을 향하여 갈 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4)

가서 쉴 집이 있는 자는, 날씨가 춥더라도, 비가 오더라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 집을 생각하며, 집에 깨끗이 씻고 가서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 나를 맞아 주실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지금의 추위를 눈녹듯이 없애버리고, 내 영혼 한 중심을 따뜻함으로 채워 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요즘...
나에게 불어닥치는 견디기 힘든 이 찬 바람...
그 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집에서 내 아버지께서 나를 기다리시고, 내 눈에 눈물을 씻어 주시며, 나를 품에 안아 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기 때문이다.

이런 묵상을 한 오늘 아침... 찬송가 406장이 내 마음을 울리며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내 영혼의 비상을 돕는 것을 느낀다.

내 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때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가는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주께서 함께하며 네짐을 지시네
희망이 사라지고 친구 날 버릴때 주 내게 속삭이며 새희망 주시네 싸움이 맹렬하여 두려워 떨때에 승리의 왕이 되신 주 음성 들리네
번민이 가득차고 눈물이 흐를때 주 나의 곁에 오사 용기를 주시네 환난이 닥쳐와서 슬픔에 잠길때 주님의 능력입어 원수를 이기네

[후렴]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론 세상 나 지날때 그 은혜가 족하네

American Indian의 한(恨)

19세기 말 Sioux 인디언으로 미국식 현대 교육을 받았던 Zitkala-Sa (Gertrude Bonnin)의 자서전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서양화 되어 돌아온 그녀에게 한 말...

"My daughter, beware of the paleface. It was the cruel paleface who caused the death of your sister and your uncle, my brave brother. It is this same paleface who offers in one palm the holy papers, and with the other gives a holy baptism of firewater. He is the hypocrite who reads with one eye, 'Thou shalt not kill,' and with the other gloats upon the sufferings of the Indian race." (참고, paleface: the white, the holy paper: the Bible, firewater: arms (무기))
She sprang to her feet, and standing firm beside her wigwam, she sent a curse upon those who sat around the hated white man's light. Raising her right arm forcibly into line with her eye, she threw her whole might into her doubled fist as she shot it vehemently at the strangers. Long she held her outstretched fingers toward the settler's lodge, as if an invisible power passed from them to the evil at which she aimed.

백인들의 오랜 침략의 역사... 그 가운데 끊임없는 배신과 학살과 위선 속에서 살아온 미국 인디언의 아픔... 모든 미국 인디언들이 공유하는 한과 아픔...

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원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고통과 불신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버린 그 인디언들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아니, 그들의 한 서린 저주가 이미 미국에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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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교회에서)

(2005.12.06에 다른 곳에 썼던 글)


내가 미국에 오기 전에 다녔던 교회는 작은 개척교회였다. 규모는 작았지만 큰 뜻을 품고 시작한 교회는 많은 아름다운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상의 대부분은 현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개선하고 성경의 원리에 보다 가까운 교회의 모습에 대한 것이었다.
그 이상 중의 하나가 공동목회였다. 대부분의 교회가 한 명의 담임목사를 두고 그 아래에 교역자들을 두고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동담임목사들을 두는 것을 그 교회의 원칙으로 세웠다. 사실 나로서는 한 명의 담임목회자를 두는 것이 무슨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공동목회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교회 개척 때부터 함께한 멤버들 간에는 매우 의미가 큰 것이었던 것같다.
교회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공동목회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면서 공동목회를 추진했던 목사님들 사이에 상당히 큰 상처를 남기고 단독목회로 선회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교회의 리더들인 집사들은 목회자들이 서로 상처를 받는 것을 보면서 참 많이 힘들어 했었다. 그 중에 특히 한 집사는 결국 그 문제로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그 집사는 성실했고 신실했으며, 교회의 중고등부를 담당해서 정말 잘 섬기는 교회의 큰 일꾼이었다. 그는 한국 교회의 부패에 대해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아픈 만큼 "바른" 교회에 대한 큰 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그분에게 공동목회는 그 "바른" 교회의 척도로 자리하고 있었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니 공동목회가 더 이상 불가능한 교회에 머문다는 것은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남은 빈자리는 오래도록 채워지지 않았다. 그 분이 있었을 때 점차 자리를 잡고 성장해 가고 있었던 중고등부는 그 후 한참 동안 힘들어졌고, 아이들은 돌봄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그분이 떠난 결과로 발생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교회차원에서 이들에 대해 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없었다. 사실 개척교회로서 너무나 많은 곳에 일꾼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분이 계셨더라면 중고등부가 활성화 되고 많은 어린 영혼들이 하나님 안에서 잘 자라는데 크게 쓰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 한 예를 생각한다. 내가 아는 다른 교회는 수 천 명이 모이는 그 동네에서는 가장 자리를 잘 잡고 성장한 교회였다. 그 교회는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가지는 이런저런 문제도 많은 그런 평범한 교회였다.
그 교회에 큰 분란이 일어났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담임 목사가 자신을 지지하는 교회 내의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아름답지 못한 방법으로 측근들을 장로로 세워가기 시작했다. 이는 교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젊은 집사들을 주축으로 해서 이에 대한 반대 및 시정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갈등이 생겨났다.
갈등의 상황은 점차 증폭되어 시정을 요구하는 측에 속해있던 젊은 집사에게 부목사가 공개적인 모임에서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나는 외부인으로서 교회 내부의 사정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 교회가 무엇 때문에 갈등을 겪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젊은 집사의 태도였다.
"나 같으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 상황 속에서 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나 같은면, 그런 폭언을 들으면서까지 교회에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널린 것이 교회고, 너무나 좋은 교회들이 많은 상황에서 왜 내가 이런 소리를 듣고 여기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교회를 조용히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아픈 가슴을 달레고 새롭게 출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말 나 같으면...
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그 젊은 집사의 반응은 달랐다.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그 집사는 그 교회를 떠나지도 않았고, 그 교회에 머물러 계속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들었다. 그는 바르지 못한 교회에서 바르게 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기를 택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은 항상 이상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고, 하나님 안에서 세상을 개혁하며 교회를 개혁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진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 그것을 말씀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수 많은 선배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을 품는 것과 현실 교회에서 섬기는 것과의 상관관계는 잘 연결되지 않으면 문제를 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두 가지의 예를 들었지만 사실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낫다는 말을 함부로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두번째의 경우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상은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신다. 하지만, 그 길은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와 함께 가야할 길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그 이상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그 공동체와 나의 관계를 끊고 더 가까이 있는 다른 공동체로 옮겨가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든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이단이 아닌 이상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그 공동체에 한 몸이 되어 머물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시는 이상을 향해 함께 가기를 권하는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불려갔을 때, 하나님은 내가 이상을 품고 얼마나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는지를 더 중요시 여기실까 아니면 나에게 맞겨진 영혼들을 돌보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왔는지를 더 중요시 여기실까? 한 번 생각해 볼만한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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