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밥을 먹으며 참으로 오랫만에 TV를 켰다. CNN 뉴스를 보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Ray Comfort가 인터뷰에 나왔다. 뉴스 내용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기독교 단체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반박하는 긴 서문(Ray Comfort가 썼다)을 붙여서 책으로 발간했고, 그것을 대학가에서 무료로 나누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을 전혀 믿지 않는 나로서는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학을 가장한 신화와 허구에 불과한 이론을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는 현대의 세태에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인간과 만물의 존재를 주장하며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Ray Comfort의 서론이 학문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고 뉴스만 들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몇몇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서 볼 때, Comfort의 주장이 비판에 노출될만 한 것 같다.
뉴스에서 나오는 전문가들의 말로 판단해 볼 때, Comfort는 다윈의 진화론을 순수 과학적인 접근법으로만 비판한 것은 아닌 것같다. 그의 진화론이 사회, 정치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서 논하고 그것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과학적 진화론과 Social Darwinism을 혼동하고 있는 것을 보인다. 사실 현대 사상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Herbert Spencer의 Social Darwinism이다. 둘은 어느 정도는 관계가 있지만, 상당히 다른 것이며, 따라서 다른 접근법을 사용해야 한다. Comfort는 이 점을 간과한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요지는, 세상의 학문과 사상체계는 세속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비판받아야하고, 진리이신 말씀이 그 가운데서도 선포되어야 하지만, 그것들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칫 무모하게 비판을 하다가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은 꼴이 되어버리고 말고, 또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됨으로 기독교가 마치 천박하고 경박한 사상인 것처럼 인식되어버릴 수 있다.
어떤 주장과 사상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반박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그 주장과 사상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논리와 언어와 가정과 무엇보다도 그들 가운데서 오고가는 대화의 장(discourse)혹은 paradigm에 대해서 철저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는 새로운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비판이 "적절하고 설득력 있게" 가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가볍게 거부해 버리고 만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그들 중의 하나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철저히 그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적어도 학문에 있어서 그들 중 하나로 인정받고, 그들 가운데서 실력을 인정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씀에 근거한 주장과 비판을 가해도 그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만다.
지난 주일에 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한 지체와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누었다. 신앙과 학문(특히 인문학과 사화과학)이 언뜻 보기에는 별개의 것으로 보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세상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학문 속을 발을 담그지 말고 아예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영역조차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 되어야 함을 믿는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깃발을 꼽아야 하는 자들이 바로 그 학문에 종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그들과 대화가 되고, 그들의 인정을 받는 정도까지 학문적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그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학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성인의 목소리를 세상을 향하여 낼 수 있는 것이다.
유행을 보며...
나는 유행에 매우 둔감한 사람이다. 유행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한 번 입은 옷은 다 떨어지거나, 아내에 의해서 버려질 때까지 입는다. 나에게 편하면 그만이지, 남들이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그런데 올 해는 유난히 캠퍼스의 여학생들의 유행이 눈에 들어온다. 부츠차림에 몸에 딱 달라 붙는 바지를 입는 것(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하연이의 언니 뻘되는 어린 여학생들을 보면서 '내 딸들이 곧 저렇게 입고 다니겠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유행에 매우 민감한 것 같다. 그 유행을 주도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매년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는 것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유행은 순환하기 때문에 유행이 지난 몇 년 뒤에 약간 바뀐 스타일로 다시 유행하기도 하지만, 매년 지속되는 변화의 트렌드에 여성들은 매우 민감한 것 같다.
여성들의 옷차림처럼 인생과 환경은 늘 변화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늘 바뀐다. 작년에 나에게 원하셨던 것을 올해도 동일하게 원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시간과 관계없이 돌아가는 원리나 법칙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이시다. 작년에 내가 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더라도, 그 동일한 것을 그분을 오늘도 기쁘시게 할 수는 없다. 늘 그분의 마음과 뜻을 살피며, 그분이 "지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큰 틀에 있어서는 결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삶의 개별적인 일에 있어서는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신앙이 관성에 빠지고 제도화 되어가면서 타락하게 된다. 습관과 타성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가 사라지고, 자신의 욕심이라는 우상으로 가득차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늘 하던 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타성 가운데서 정작 그분을 놓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마치 젊은 여성들이 유행에 매우 민감하며, 그 유행이라는 바람결에 실려 가듯이, 변화되어가는 하나님의 뜻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믿음이고 싶다. 그곳에 나의 영적 안테나를 한 껏 치켜 세우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데 올 해는 유난히 캠퍼스의 여학생들의 유행이 눈에 들어온다. 부츠차림에 몸에 딱 달라 붙는 바지를 입는 것(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하연이의 언니 뻘되는 어린 여학생들을 보면서 '내 딸들이 곧 저렇게 입고 다니겠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유행에 매우 민감한 것 같다. 그 유행을 주도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매년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는 것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유행은 순환하기 때문에 유행이 지난 몇 년 뒤에 약간 바뀐 스타일로 다시 유행하기도 하지만, 매년 지속되는 변화의 트렌드에 여성들은 매우 민감한 것 같다.
여성들의 옷차림처럼 인생과 환경은 늘 변화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늘 바뀐다. 작년에 나에게 원하셨던 것을 올해도 동일하게 원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시간과 관계없이 돌아가는 원리나 법칙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이시다. 작년에 내가 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더라도, 그 동일한 것을 그분을 오늘도 기쁘시게 할 수는 없다. 늘 그분의 마음과 뜻을 살피며, 그분이 "지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큰 틀에 있어서는 결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삶의 개별적인 일에 있어서는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신앙이 관성에 빠지고 제도화 되어가면서 타락하게 된다. 습관과 타성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가 사라지고, 자신의 욕심이라는 우상으로 가득차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늘 하던 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타성 가운데서 정작 그분을 놓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마치 젊은 여성들이 유행에 매우 민감하며, 그 유행이라는 바람결에 실려 가듯이, 변화되어가는 하나님의 뜻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믿음이고 싶다. 그곳에 나의 영적 안테나를 한 껏 치켜 세우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Posted at
오전 5:01:00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매일 아침.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도서관의 내 방으로 들어 와서 가장 처음하는 것은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이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곳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종된 자로서의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뜻에서 신발을 벗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내가 청년부 부장으로 섬기면서 처음으로 전했던 말씀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종된 자세로 있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고, 각오였다.
요즘은 기도를 한 뒤에 컴퓨터를 켜면 바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라는 찬양이 나온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내 삶의 가장 큰 화두는 "종됨"이다. 그분께 완전한 종이 되고 싶은 열망이 나에게 가득하다. 무엇을 명하시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만 하다면, 군소리 없이, 두 말 없이, 순종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소망이 나에게 있다.
그런데...
최근 언제부터인가 그 종됨의 바른 자세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청년부의 부장으로 섬기는 것을 분명히 잘 앎에도 불구하고, 나 같이 부족하고 자격없는 자를 굳이 그 자리로 부르신 하나님께 대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원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내 믿음의 동역자들,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신뢰하는 동역자들을 하나씩 둘씩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것을 보면서, 내 속 깊은 곳에서 외로와 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것에 명백하게 항거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
종이라고 감정이 없겠는가? 종이라고 자신의 생각과 소망이 없겠는가? 하지만, 진정한 종이라면, 주인의 마음과 주인의 계획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하고, 완전히 따르는 자이다.
요즘... 몇 가지 다른 것들과 함께, 내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흔들리게 하고 힘들게 하는 그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내가 어떤 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말과 수사와 스스로의 생각이 어떻든지간에,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여전히 범죄하고 있는 자인 것이다.
사실 그것 또한 스스로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 힘든 것을 느낀다. 아예 모른다면, 원망하고 말텐데...
오늘 아침. 이렇게 완악하고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QT 찬송을 통해서 위로하신다.
363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란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주시네
[후렴]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때 불쌍히여겨 구원해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완악한 종과 자비로우신 주인... 나에게 다가 오셔서 토닥거리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나는 그 자비로우신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종의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
매일 아침.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도서관의 내 방으로 들어 와서 가장 처음하는 것은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이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곳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종된 자로서의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뜻에서 신발을 벗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내가 청년부 부장으로 섬기면서 처음으로 전했던 말씀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종된 자세로 있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고, 각오였다.
요즘은 기도를 한 뒤에 컴퓨터를 켜면 바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라는 찬양이 나온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내 삶의 가장 큰 화두는 "종됨"이다. 그분께 완전한 종이 되고 싶은 열망이 나에게 가득하다. 무엇을 명하시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만 하다면, 군소리 없이, 두 말 없이, 순종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소망이 나에게 있다.
그런데...
최근 언제부터인가 그 종됨의 바른 자세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청년부의 부장으로 섬기는 것을 분명히 잘 앎에도 불구하고, 나 같이 부족하고 자격없는 자를 굳이 그 자리로 부르신 하나님께 대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원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내 믿음의 동역자들,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신뢰하는 동역자들을 하나씩 둘씩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것을 보면서, 내 속 깊은 곳에서 외로와 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것에 명백하게 항거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
종이라고 감정이 없겠는가? 종이라고 자신의 생각과 소망이 없겠는가? 하지만, 진정한 종이라면, 주인의 마음과 주인의 계획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하고, 완전히 따르는 자이다.
요즘... 몇 가지 다른 것들과 함께, 내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흔들리게 하고 힘들게 하는 그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내가 어떤 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말과 수사와 스스로의 생각이 어떻든지간에,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여전히 범죄하고 있는 자인 것이다.
사실 그것 또한 스스로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 힘든 것을 느낀다. 아예 모른다면, 원망하고 말텐데...
오늘 아침. 이렇게 완악하고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QT 찬송을 통해서 위로하신다.
363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란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주시네
[후렴]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때 불쌍히여겨 구원해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완악한 종과 자비로우신 주인... 나에게 다가 오셔서 토닥거리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나는 그 자비로우신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종의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
Posted at
오후 11:35:00
仰不愧於天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이락야)
"맹자"라는 책에 있는 君子三樂(군자삼락) 중 한 구절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군자가 누리는 세 가지의 즐거움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었던 윤동주의 서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김용의 선교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처럼 "죄의 짱아치"였던 나를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사해 주시고, 이제는 죄에서 깨끗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죄와 상관 없는 자로, 죄를 이기는 자로 불러 주신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맹자의 이 구절은 나에게 참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거룩을 향한 소망이 있고, 거룩을 향한 변화는 있지만, 아직도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죄성과 죄의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자신을 본다. 주님을 따라 살고 싶고, 주님을 향한 열망이 있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 한 구석에, 소돔성을 못내 아쉬워하며 힐끗 뒤돌아보는 롯의 아내의 아쉬움이 있다.
죄를 짓는 것이 끔찍이 싫지만, 죄와 지속적으로 싸우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기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본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내 안을 모두 다 아시는데...
그리고 내 안에서 탄식하시는데...
仰不愧於天이 아니라 仰愧於天이다. 하나님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주님을 향한 열망, 경건의 연습, 기도, 말씀, 거룩, 그분을 향한 사랑과 헌신, 나의 십자가, 나의 죽음...
이 모든 것이 헛된 관념이나 구호가 되지 않게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자신이 완전히 주님께 드려지는 것 뿐이라는 것, 그것이 잠시라도 되지 않으면, 마귀는 나를 향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든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내가 주님 안에서 완전히 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죽어 있는 것이다.
주님으로 24시간을, 단 일 초의 공백도 없이 완전히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
주여!!!
"맹자"라는 책에 있는 君子三樂(군자삼락) 중 한 구절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군자가 누리는 세 가지의 즐거움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었던 윤동주의 서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김용의 선교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처럼 "죄의 짱아치"였던 나를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사해 주시고, 이제는 죄에서 깨끗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죄와 상관 없는 자로, 죄를 이기는 자로 불러 주신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맹자의 이 구절은 나에게 참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거룩을 향한 소망이 있고, 거룩을 향한 변화는 있지만, 아직도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죄성과 죄의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자신을 본다. 주님을 따라 살고 싶고, 주님을 향한 열망이 있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 한 구석에, 소돔성을 못내 아쉬워하며 힐끗 뒤돌아보는 롯의 아내의 아쉬움이 있다.
죄를 짓는 것이 끔찍이 싫지만, 죄와 지속적으로 싸우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기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본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내 안을 모두 다 아시는데...
그리고 내 안에서 탄식하시는데...
仰不愧於天이 아니라 仰愧於天이다. 하나님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주님을 향한 열망, 경건의 연습, 기도, 말씀, 거룩, 그분을 향한 사랑과 헌신, 나의 십자가, 나의 죽음...
이 모든 것이 헛된 관념이나 구호가 되지 않게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자신이 완전히 주님께 드려지는 것 뿐이라는 것, 그것이 잠시라도 되지 않으면, 마귀는 나를 향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든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내가 주님 안에서 완전히 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죽어 있는 것이다.
주님으로 24시간을, 단 일 초의 공백도 없이 완전히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
주여!!!
Posted at
오전 4:5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