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왜 엄마 것은 없어요?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오시면
동생과 나는 오로지 장바구니에만 관심이 있었다.
"엄마 내 운동화 사왔어요?"
"다음에 꼭 사올게."
"운동화 다 떨어져서 창피하단 말이예요."
엄마의 장바구니엔 우리가 쓸 칫솔과 아버지 속옷
그리고 우리 식구가 먹을 찬거리뿐이었다.

내 나이 서른이 넘어 이제야 물어본다.
"엄마, 엄마가 쓸 것은 왜 하나도 없어요?"


- 심승현의 《파페포포 투게더》중에서 -

미국에서 동양인으로 사는 것...

(2005.06.14. 작성)

어제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단골 손님이신 분이 찾아왔다. 해병대 하사관 출신으로 월남전에도 참전했던 분으로서 30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와 여러 사업을 하시면서 산전수전 다 겪으신 분이다.
늘 그렇듯이 가게에 와서 해병대 후배인 가게 주인아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미국에 온지 2년이 채 안되었기 때문에, 그 분은 올 때마다 미국에 정착하고 살아가는 여러 다른 한인들 이야기를 해주면서,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간접적으로 조언을 주곤 한다.
어제는 한국인으로서 미국에 와서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주로 도너스 가게, 샌드위치 가게, 세탁소, 청소업 등을 하면서 일부는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다. 주로 미국인들이 힘들어서 하고 싶어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많은 돈을 벌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한국인은 역시 한국인... 많은 돈을 벌게된 그들은 그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다고 한다. 건물을 몇 채를 사거나 아니면 아파트 단지를 구입해서 월세를 받아서 편히 살아보고자 하는 욕심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분의 말이, 그런 투자를 한 사람들은 (적어도 내가 있는 오스틴과 텍사스에서) 거의 다 망하고 많은 돈을 잃었다.
그 이유인 즉슨, 바로 세입자들이 월세를 안내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란다. 정확하게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분은 동양인을 무시하는 풍조 때문이라고 해석했지만..) 백인이 주인으로 있을 때는 월세를 밀리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꼬박꼬박 월세를 잘 내던 사람들이 주인이 동양인으로 바뀌면, 그 때부터 태도를 달리해서 심한 경우에는 1년치 월세를 밀리고도 아주 당당하게 버틸 정도라고 했다. 그럴 경우 강제로 끌어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재판을 하게 되는데, 그 막대한 소송비용과 시간을 낭비해야하며, 설령 재판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그 동안의 밀린 월세는 받지도 못할 뿐더러, 강제 퇴거 당하는 세입자에게 나가서 1개월간 살 돈을 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월세를 밀려서 강제로 퇴거 당하는 경우 집안 시설물들을 아주 교묘하게 모두 파괴해 놓고 떠난다는 것이다...
동양인들이 주인이 될 경우 이런 일들이 너무 빈번히 발생해서 도저히 운영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 결국은 막대한 손해를 보고 손들고 나올 수 밖에 없단다... 이렇게 해서 손해를 본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이 이야기를 하던 그 손님도 역시 같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란다.
이런 일은 심지어 대학 기숙사에도 적용되어서, 한 번은 UT 법대와 연계해서 운영하는 기숙사가 있는데, 그 동안 백인이 주인으로 운영되어 오선 기숙사였던 모양이다. 이 기숙사는 법대 학생 한 명에게 공짜로 방을 제공하고 그로 하여금 다른 후배들을 들어오게 하고 관리를 맡기는 그런 식으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주인은 월 한번씩 가서 월세만 받아오면 되는 그런 아주 좋은 조건의 사업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런 식으로 쉽게 운영되어 오던 기숙사를 한국인 한 사람이 그 운영을 넘겨 받았는데, 그 이후로 월세가 걷히지 않고, 그 동안 운영되어 오던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저히 운영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까지 되어 결국 그 사람도 이 사업을 포기했다는 소문이다...

이와 관련한 또 한 가지.. 오스틴 몇 년 전 수도국 국장은 필리핀 출신의 젊은 사람이었단다. 그 사람은 아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여서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그 능력이 탁월하여 오스틴의 수도국 총책임자로 발탁이 되었는데... 아시아계가 총책임자로 임명이 되자 그 아래 사람들(거의 대부분이 백인인)이 그를 완전히 왕따를 시키기 시작했다고... 어느 누구도 국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말도 건네지 않고, 말도 듣지도 않아서 도저히 업무를 할 수가 없었던 그는, 결국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 거기서 성공을 거두자 국장 일을 그만 두게 되고 사업가로 변신한 모양이다.

이 두가지의 작은 에피소드로 인해서 미국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내가 아는 한 한인 목사님은 그 젊은 시절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미국이 자신의 조국이고 자신은 분명히 미국인이라는 확신한 자아 정체성 가운데 대학까지 마쳤다. 하지만 그가 대학을 나와 접한 미국 사회에서 그는 철저히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인으로 인정되고 있느 것을 발견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벽들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고 많은 좌절을 경험한 끝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좌절을 극복하고 목회의 길로 나섰다.
2차 대전 시절, 미국에서는 일본인들을 위한 캠프를 설치해서 일본인 이민자들을 모두 (1세대는 물론 4-5세대까지) 그 캠프에 몰아 넣었다. 그것은 그들이 일본 본국에 협력하며 미국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일본인들은 아무리 그들이 미국에서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이방인일 뿐이었다. 반면 독일계는 아무런 조치가 취해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미국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면 행복할까?

(2004.07.28. 작성)

2002년 7월 초에 미국으로 유학온지 2주일 정도 지난 다음의 일이다. 택사스의 살인적인 더위를 피해 하루 종일 아파트에 박혀있다가 초저녁 즈음 돼서 너무 답답해 집사람과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이에 있는 수퍼에 가서 간단한 음식을 사오기로 했다. 당시에는 차를 아직 구입하지 않은 시점이라서 수퍼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입지 조건이 너무 좋아서 수퍼가 코앞에 있는 편이었는데도 걸어서 30분 정도 걸어가야 수퍼에 갈 수 있었다. 초저녁이라 좀 선선할 줄 알았는데, 왠걸.... 오히려 한 낮보다 더 더운 것이었다. 칭얼대는 두 아이를 대리고 그 더운 날씨에 어찌어찌 수퍼까지 갔다.

빵빵한 에어컨으로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한 그 넓고 넓은 수퍼를 이리저리 쏘다니며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데 와이프는 문 입구 안쪽에서 벽쪽에 있는 광고지들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밖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이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정도 되어 보이는 백인 아줌마 한 명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인상을 험악하게 하면서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면서 "Welcome to America!"라고 으르렁 거리듯이 내뱉으며 가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백인 여학생들 (중고등학교 학생들처럼 보였다) 세 명이 나를 불렀다.

"Wasn't she so rude to you?"

"I don't know. I don't understand what happened..."

"We are sorry, she was so rude. She shouldn't say so."

미국 애들이 보기에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미국의 문화와 미국인의 사고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인 미국학을 전공하는 나에게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서 다양한 공부를 하면서 지금까지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도대체 왜 그 아줌마가 그리 화가 나 있었고, 나에게 그런식으로 대했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다. 911사태 이후에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에서, 특히나 조지 부시를 열열히 지지하는 텍사스라는 동네의 특성상 나같은 외국인에 대해서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워 졌는지... 아니면 수퍼 안에서의 내 행동이 거슬렸던지 뭐 그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내가 이 사건을 통해서 본 것은 단순히 한 아줌마가 나에 대해서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시 그 아줌마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미국 태생의 미국인인지, 아니면 외국인인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설사 내가 한국말을 쓰는 것을 들었다 하더라도 나의 국적이 미국인지 아니면 외국인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문제는 그 아줌마가 나의 생김새를 보고 당연히 나를 외국인으로 생각을 했고, 그 판단하에 "Welcome to America!"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것은 미국 백인들의 마음 속에 아직도 유색인종은 법적으로는 미국인이지만 심정적으로는 미국인이 아니며 따라서 유색인종은 미국의 핵심부에 자리 잡을 수 없다는 의식을 드러내는 사건인 것이다. 미국 사회는 아직도 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핵심을 장악하고 있다 평가되고 있다. 내 경험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WASP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각 분야 뿐만 아니라 아직도 미국인 스스로의 마음까지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국에서의 유색인종, 특히 아시아계 미국인은 자신의 나라에서 영원히 타인으로 대접을 받을 뿐인 것 같다. 자신의 나라에서 주변인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런 나라에서의 삶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 까?

Ronald Takaki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다. 그는 이민 4세이며 그의 조상들이 미국에 정착한지는 100년이 넘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는 실재 미국인이었다. 그가 어느날 학회 참여차 버지니아를 여행하게 되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운전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백인이었다. 그는 Takaki교수가 영어를 너무 잘하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택시기사가 물었다. "How long have you been in this country?" Takaki 교수는 자신은 이민 4세대이며 100년 이상 미국에 정착한 가정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기사는 말했다. "I was wondering because your English is excellent!" 이 경험은 Takaki교수가 평생을 거쳐 겪어온 자신의 조국에서 이방인으로 대접받는 경험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Somehow I did not look "American" to him; my eyes and complexion looked foreign.

[펌]Where Are You Going?

In January 2000, leaders in Charlotte, North Carolina, invited their favorite son, Billy Graham, to a luncheon in his honor. Billy initially hesitated to accept the invitation because he struggles with Parkinson's disease. But the Charlotte leaders said, "We don't expect a major address. Just come and let us honor you." So he agreed.

After wonderful things were said about him, Dr. Graham stepped to the rostrum, looked at the crowd, and said, "I'm reminded today of Albert Einstein, the great physicist who this month has been honored by Time magazine as the Man of the Century.

"Einstein was once traveling from Princeton on a train when the conductor came down the aisle, punching the tickets of each passenger. When he came to Einstein, Einstein reached in his vest pocket. He couldn't find his ticket, so he reached in his other pocket. It wasn't there, so he looked in his briefcase but couldn't find it. Then he looked in the seat by him. He couldn't find it.

"The conductor said, 'Dr. Einstein, I know who you are. We all know who you are. I'm sure you bought a ticket. Don't worry about it.' Einstein nodded appreciatively.

"The conductor continued down the aisle punching tickets. As he was ready to move to the next car, he turned around and saw the great physicist down on his hands and knees looking under his seat for his ticket.

"The conductor rushed back and said, 'Dr. Einstein, Dr. Einstein, don't worry. I know who you are. No problem. You don't need a ticket. I'm sure you bought one.' Einstein looked at him and said, 'Young man, I too know who I am. What I don't know is where I'm going.'"

Having said that Billy Graham continued, "See the suit I'm wearing? It's a brand new suit. My wife, my children, and my grandchildren are telling me I've gotten a little slovenly in my old age. I used to be a bit more fastidious. So I went out and bought a new suit for this luncheon and one more occasion.

You know what that occasion is? This is the suit in which I'll be buried. But when you hear I'm dead, I don't want you to immediately remember the suit I'm wearing. I want you to remember this: I not only know who I am, I also know where I'm going."

십자가...

지난 달 마지막 주일에는 청년부에 새로 온 지체들을 환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간에 곰곰히 묵상하다가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세상의 수많은 화살들(염려, 유혹, 죄, 욕망 등들)이 나를 향하 비오듯이 쏟아진다 하더라도, 십자가 앞에 무릎꿇고 그 가장 밑둥을 붙잡고 있는 나에게, 그리고 그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나에게, 그 화살들은 의미가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어설프게나마 표현하고 싶었다.

집에서 하연이에게 그림을 보여줬다. 그 때의 감동이 다시 밀려오며, 사뭇 진지하고 경건해 지는 마음이 밀려오고 있을 때, 하연이가 말했다.

"The person seems to be digging up the c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