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잤다고 생각했다. 눈이 저절로 떠져서 시계를 보니 두 시...
아직 일어날 시간이 한참 남았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쉽지 않다.
불현듯, 대학생시절에 잠 안오는 밤에 잠잘려고 노력하는 젊은이는 게으른 자라고 책망하시며, 잠이 오지 않으면 일어나서 책을 보든지,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야단치셨던 존경하는 영적 리더의 말씀이 생각났다.
일어나 앉아 컴퓨터를 켰다. 이메일을 체크하고, 신문을 약간 본 뒤,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 동안 paper grading과 강의와 다른 일들 때문에 뒷전에 밀려 있었던 논문을 오랫만에 대하니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도 한 단어 한 단어를 적어 간다.
올해 말에 논문을 마무리 하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점차 불가능해지는 것을 본다. 한참을 더 써야 할 것 같은 생각... 올해 12월로 아파트를 비워줘야 하고, 다음 학기 TA는 신청을 안했기 때문에 반드시 이번 겨울에는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렵게 되었다.
아내는 내가 논문이 완성이 되건 되지 않건 간에 아이들이 한국의 학교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1월이나 2월에는 한국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나 혼자 여기 남아서 논문을 마무리하고... 까딱 잘못하다간 이산가족이 될 것 같다...
나 혼자 미국에 남아서 살면... 일단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한국에도 조금 보내 줘야 하고, 밥챙겨 먹고, 옷 챙겨입고... 혼자서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쨋든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인가?
현실이란 하나님이라는 factor가 빠진 내 감각과 지식의 한계 내에서 재구성된 상황인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라는 factor"이다. 그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가장 중요해지는 싯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는다면, 나는 내가 감당해야 하는 엄청난 짐을 지고 미궁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늘 믿어 왔던 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민감한 삶을 산다면, 사면초가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늘로 비상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발버둥 칠 때가 아니라, 잠잠하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이다.
비록 나 혼자 미국에 남아 논문을 마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면,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선한 것이다.
결국... 오직 믿음이다.
Brother in Christ
오늘 귀한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한 영혼을 변화시키시는 그 능력을 볼 수 있는 그 귀한 영혼.
같이 만나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성령께서 우리 둘을 하나되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심을 보았습니다.
많은 시간을 영어로 이야기해야하는 부담이 있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언어가 문제가 되지 않음을 봅니다. 그것은 우리의 대화가 하나님 나라의 언어이고, 그 언어는 둘이 공유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몇 가지 조언을 했습니다. 앞으로 영혼을 섬기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준비함으로 나아가라는 것, 그리고 다양한 책을 통해서 지식을 얻고, 간접적으로 세상을 폭넓게 경험함으로써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인간을 이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배운 것이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지혜를 소유한 자이고, 이제는 혼자서 읽는 책을 통해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폭넓은 지식을 가진 자로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그 영혼을 만나 긴 시간을 같이 보내서 매우 행복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 청년부에서 유일하게 만나는 형제인 그 형제...
그 영혼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한 영혼을 변화시키시는 그 능력을 볼 수 있는 그 귀한 영혼.
같이 만나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성령께서 우리 둘을 하나되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심을 보았습니다.
많은 시간을 영어로 이야기해야하는 부담이 있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언어가 문제가 되지 않음을 봅니다. 그것은 우리의 대화가 하나님 나라의 언어이고, 그 언어는 둘이 공유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몇 가지 조언을 했습니다. 앞으로 영혼을 섬기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준비함으로 나아가라는 것, 그리고 다양한 책을 통해서 지식을 얻고, 간접적으로 세상을 폭넓게 경험함으로써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인간을 이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배운 것이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지혜를 소유한 자이고, 이제는 혼자서 읽는 책을 통해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폭넓은 지식을 가진 자로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그 영혼을 만나 긴 시간을 같이 보내서 매우 행복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 청년부에서 유일하게 만나는 형제인 그 형제...
그 영혼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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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50:00
사랑은...
사랑은...
진정으로 나보다 상대를 위하는 것.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상대를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하는 것.
상대를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내가 바뀌는 것.
내 관심이 아니라, 상대의 관심에 촛점을 두는 것.
내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
아니, 상대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는 것.
상대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단점과 약점을 모두 가진 그대로,
편안하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
그러면서도 조용히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
그를 위해 조용히 기도하는 것.
상대의 가시돋친 인격을 있는 힘껏 껴안는 것.
그 가시로 인해 내가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고통이 내 가슴을 찌르는 한이 있더라도,
가시가 꺾일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평생 동안 그 포옹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까?
진정으로 나보다 상대를 위하는 것.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상대를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하는 것.
상대를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내가 바뀌는 것.
내 관심이 아니라, 상대의 관심에 촛점을 두는 것.
내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
아니, 상대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는 것.
상대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단점과 약점을 모두 가진 그대로,
편안하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
그러면서도 조용히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
그를 위해 조용히 기도하는 것.
상대의 가시돋친 인격을 있는 힘껏 껴안는 것.
그 가시로 인해 내가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고통이 내 가슴을 찌르는 한이 있더라도,
가시가 꺾일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평생 동안 그 포옹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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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44:00
[시]가난하여
가난하여
杜春에게---
유 치 환
가난하여 발 벗고 들에 나무를 줍기로소니
소년이여 너는
좋은 햇빛과 비로 사는 초목 모양
끝내 옳고 바르게 자라지라
설령 어버이의 자애가 모자랄지라도
병 같은 가난에 쥐어 짜는
그의 피눈물에 염통을 대고
적은 짐승처럼 울음일랑 울음일랑 견디어라
어디나 어디나 떠나고 싶거들랑
가만히 휘파람 불며 흐르는 구름에 생각하라
진실로 사람에겐 무엇이 있어야 되고
인류의 큰 사랑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아아 빈한(貧寒)함이 아무리 아프고 추울지라도
유족함에 개같이 길드느니보다
가난한 별 아래 끝내 고개 바르게 들고
너는 세상의 쓰고 쓴 소금이 되라
杜春에게---
유 치 환
가난하여 발 벗고 들에 나무를 줍기로소니
소년이여 너는
좋은 햇빛과 비로 사는 초목 모양
끝내 옳고 바르게 자라지라
설령 어버이의 자애가 모자랄지라도
병 같은 가난에 쥐어 짜는
그의 피눈물에 염통을 대고
적은 짐승처럼 울음일랑 울음일랑 견디어라
어디나 어디나 떠나고 싶거들랑
가만히 휘파람 불며 흐르는 구름에 생각하라
진실로 사람에겐 무엇이 있어야 되고
인류의 큰 사랑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아아 빈한(貧寒)함이 아무리 아프고 추울지라도
유족함에 개같이 길드느니보다
가난한 별 아래 끝내 고개 바르게 들고
너는 세상의 쓰고 쓴 소금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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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50:00
아침에...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몸 힘을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330장)
어젯밤...
거의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는 고민들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 가장 좋은 것인지...
지혜가 부족한 제 자신을 봤습니다.
오늘 아침, 묵상전에 부른 찬송...
제 마음과 너무나 동일합니다.
죄악을 벗어버리고, 영광의 찬송을 부르며,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영광의 주를 뵙기를 갈망하는 것...
그것이 제 마음입니다.
고민으로 인해 피곤한 내 영혼과 몸이,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인해 평안히 쉬는 그런 은총을 기대합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몸 힘을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330장)
어젯밤...
거의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는 고민들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 가장 좋은 것인지...
지혜가 부족한 제 자신을 봤습니다.
오늘 아침, 묵상전에 부른 찬송...
제 마음과 너무나 동일합니다.
죄악을 벗어버리고, 영광의 찬송을 부르며,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영광의 주를 뵙기를 갈망하는 것...
그것이 제 마음입니다.
고민으로 인해 피곤한 내 영혼과 몸이,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인해 평안히 쉬는 그런 은총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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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35:00
잡념.. 하나 더...
1.
의지의 박약함... 역시 강한 의지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몰아 가셔야만, 강한 의지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본다.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한 때...
그것은 하나님의 붙들어 주심, drive하심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때이라는 증거...
비우자..
그저 그대로 흘러가도록 하자...
어떤 인위도, 어떤 노력도 덧없는 것...
물결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쳐다 보듯이, 그저 몸에 힘을 빼고 떠밀려 가는 것이 최고다.
내 의지로 하지 말자. 그것은 결국 부러질 것...
2.
컴퓨터...
내 친구, 내 비서, 내 신문, 내 책장, 내 노트, 내 전화, 내 선생님, 내 장난감, 내 사랑, 내 인형, 내 방, 내 연인, 내 가족, 내 창문, 내 TV, 내 영화관, 내 프린터, 내 케비넷, 내 일기장, 내 낙서장, 내 성경책, 내 사진관 & 사진기, 내 녹음기, 내 Juke box, 내 영화관, 내 우편함, 내 계산기, 내 웬수...
컴퓨터를 만지작 거린다. 컴퓨터를 해부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계 중에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용납이 되지 않는다... 오늘도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는 가운데, 나를 위한, 내 개성이 담긴, 나에게 꼭 맞는 기계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의지의 박약함... 역시 강한 의지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몰아 가셔야만, 강한 의지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본다.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한 때...
그것은 하나님의 붙들어 주심, drive하심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때이라는 증거...
비우자..
그저 그대로 흘러가도록 하자...
어떤 인위도, 어떤 노력도 덧없는 것...
물결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쳐다 보듯이, 그저 몸에 힘을 빼고 떠밀려 가는 것이 최고다.
내 의지로 하지 말자. 그것은 결국 부러질 것...
2.
컴퓨터...
내 친구, 내 비서, 내 신문, 내 책장, 내 노트, 내 전화, 내 선생님, 내 장난감, 내 사랑, 내 인형, 내 방, 내 연인, 내 가족, 내 창문, 내 TV, 내 영화관, 내 프린터, 내 케비넷, 내 일기장, 내 낙서장, 내 성경책, 내 사진관 & 사진기, 내 녹음기, 내 Juke box, 내 영화관, 내 우편함, 내 계산기, 내 웬수...
컴퓨터를 만지작 거린다. 컴퓨터를 해부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계 중에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용납이 되지 않는다... 오늘도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는 가운데, 나를 위한, 내 개성이 담긴, 나에게 꼭 맞는 기계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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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16:00
강의를 마치고...
박수소리...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특별한 강의를 제외하고는 학생들이 박수치는 것을 보지 못했었는데... 지난 학기 강의할 때도 박수는 없었는데...
놀랐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모두들 나가는 복잡한 가운데, 강대상으로 찾아 오는 학생들...
"Kwangjin Lee! It was a great lecture!"
"I enjoyed it!"
"Thanks for the lecture, Mr. Lee."
등등...
그리고 같이 TA로 일하는 Anna는 "Good job, Kwangjin! It was interesting!"이라고 말해 줬고, 교수인 Dr. Hillmann은 "You did it very well."이라고 말하며 격려해 주었다.
머쓱했다.
사실 내가 받아야 할 칭찬은 아니었으니...
강의를 준비하면서, 무릎꿇고 기도했다. 이번에도 한 없이 부족한 내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 달라고...
강의안을 프린트하고 강의실로 향하기 직전. 방을 나서면서 약간 긴장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논리적으로 약한 부분도 있고, 전체 강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할지 감이 오지 않고, 시작 멘트와 끝을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불안했다. 그래도 주님께 맡기기로 했으니 담대하게 갔다.
조금 일찍 강의실에 도착하니 교수님이 먼저 와 있었다. 교수와 Gun control, 학생들의 paper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눈 후, 강의실로 들어가서 강의 준비를 했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오히려 마음은 너무 편안해졌고, 학생들이 눈에 잘 들어 왔다. 내 스스로가 기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강의를 시작한 첫 부분, 앞 뒤로 길게 되어 있는 교실이라서 그런지, 맨 뒤에서 안들린다고 불평이다. 그래서 마이크를 쓰기로 했다. 뒤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평소에 교수님에 마이크를 안 쓰는데, 그것에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도입부분에서 약간 해멨지만, 개의치 않고 그냥 말을 해 나갔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내 스스로도 즐기면서,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중간에 나간 학생들이 네 명 정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강의에 집중해 주었다. 착한 학생들...
훨씬더 적은 수의 사람들 앞에서 평가와 상관없는 자리에서 전하는 말씀은 왜 그리도 떨리고 긴장되는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한 마디라도 잘 못할 경우, 그것은 영혼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또한 내가 하는 말이 진리에서 벗어날 경우, 그 벌은 내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리라.
어쨋든 또 한 번의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번 학기 이 수업의 TA를 제안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라는 확신이 들었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교수로 훈련시키시는 좋은 기회가 됨을 직감했다. 지금 돌아 볼 때, 그 확신 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 감사하다.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특별한 강의를 제외하고는 학생들이 박수치는 것을 보지 못했었는데... 지난 학기 강의할 때도 박수는 없었는데...
놀랐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모두들 나가는 복잡한 가운데, 강대상으로 찾아 오는 학생들...
"Kwangjin Lee! It was a great lecture!"
"I enjoyed it!"
"Thanks for the lecture, Mr. Lee."
등등...
그리고 같이 TA로 일하는 Anna는 "Good job, Kwangjin! It was interesting!"이라고 말해 줬고, 교수인 Dr. Hillmann은 "You did it very well."이라고 말하며 격려해 주었다.
머쓱했다.
사실 내가 받아야 할 칭찬은 아니었으니...
강의를 준비하면서, 무릎꿇고 기도했다. 이번에도 한 없이 부족한 내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 달라고...
강의안을 프린트하고 강의실로 향하기 직전. 방을 나서면서 약간 긴장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논리적으로 약한 부분도 있고, 전체 강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할지 감이 오지 않고, 시작 멘트와 끝을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불안했다. 그래도 주님께 맡기기로 했으니 담대하게 갔다.
조금 일찍 강의실에 도착하니 교수님이 먼저 와 있었다. 교수와 Gun control, 학생들의 paper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눈 후, 강의실로 들어가서 강의 준비를 했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오히려 마음은 너무 편안해졌고, 학생들이 눈에 잘 들어 왔다. 내 스스로가 기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강의를 시작한 첫 부분, 앞 뒤로 길게 되어 있는 교실이라서 그런지, 맨 뒤에서 안들린다고 불평이다. 그래서 마이크를 쓰기로 했다. 뒤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평소에 교수님에 마이크를 안 쓰는데, 그것에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도입부분에서 약간 해멨지만, 개의치 않고 그냥 말을 해 나갔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내 스스로도 즐기면서,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중간에 나간 학생들이 네 명 정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강의에 집중해 주었다. 착한 학생들...
훨씬더 적은 수의 사람들 앞에서 평가와 상관없는 자리에서 전하는 말씀은 왜 그리도 떨리고 긴장되는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한 마디라도 잘 못할 경우, 그것은 영혼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또한 내가 하는 말이 진리에서 벗어날 경우, 그 벌은 내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리라.
어쨋든 또 한 번의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번 학기 이 수업의 TA를 제안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라는 확신이 들었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교수로 훈련시키시는 좋은 기회가 됨을 직감했다. 지금 돌아 볼 때, 그 확신 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 감사하다.
Posted at
오전 10:27:00
잡생각..
이틀 전... 누군가 소총으로 자살한 바로 그 장소에 들어 선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머물며 공부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누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일상의 삶을 살고 있다...
일상의 삶... 조금 있으면 해야할 강의를 준비하는 바쁨 속에서, 한 영혼의 비극을 묵상할 시간도 없는 내 삶... 그것이 현대적인 삶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슬프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삶을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바쁜 일상과 관성화된 삶에 좇겨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그런 박제가 되어버린 인간은 안 되어야 할텐데...
그래도 나는 강의 준비를 계속한다...
누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일상의 삶을 살고 있다...
일상의 삶... 조금 있으면 해야할 강의를 준비하는 바쁨 속에서, 한 영혼의 비극을 묵상할 시간도 없는 내 삶... 그것이 현대적인 삶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슬프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삶을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바쁜 일상과 관성화된 삶에 좇겨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그런 박제가 되어버린 인간은 안 되어야 할텐데...
그래도 나는 강의 준비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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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43:00
순종...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28-31)
오늘 본문에 대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답하는 "둘째 아들이니이다"라는 대답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로 분분하다.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성경 번역본에 따라 다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순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시고, 둘째 아들을 순종의 바른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본문에 나와 있듯이, 순종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누군가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말 했을 때, 그 앞에서 예라고 대답한다고 그것이 순종은 아닌 것이다. 순종의 여부는 나중에 그 행동이 그 말을 따랐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는 명령을 거스리지 않는 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는 있다. 특히 행동의 결과가 남에게 가시적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라면, 특히나 더 그렇다. 반대로 둘째 아들과 같이 그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면, 불순종하는 아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아들로 비춰지며 주위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고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로 순종의 여부를 판단한다. 그리고 말로만 하는 순종에 익숙한 사람은, 결국에 있어서 그 거짓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불순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자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그들을 겉으로는, 말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다고 하는 자들이다. 겉으로 드러난 종교의 틀, 남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로서의 믿음의 모습은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사랑함으로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결코 가볍게 받지 않고, 그 말씀에 무게를 두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그래서 결국 살아내는 순종의 삶이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은, 결국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린 진정한 순종의 모습이 이 땅 가운데서 전혀 드러나지 않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이 땅에서 세리와 창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더러움을 들고 나아가 불쌍히 여겨주시기만을 바라며, 그동안 지키지 못했던 그분의 말씀을 이제부터는 순종하며 따르겠다는 결단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들의 마음과 보이지 않는 순종... 그것을 인간을 하찮게 여기며 무시하겠지만, 아니 보이지도 않겠지만,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고 그분이 모든 것을 알아 주신다.
하나님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그 행동이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해야 한다. 말로만 하는 순종, 생각으로만 드리는 순종은 결코 순종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자를 무시하는 것이며, 진노의 대상이 될 뿐이다.
스스로 착각하지 말자...
오늘 본문에 대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답하는 "둘째 아들이니이다"라는 대답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로 분분하다.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성경 번역본에 따라 다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순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시고, 둘째 아들을 순종의 바른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본문에 나와 있듯이, 순종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누군가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말 했을 때, 그 앞에서 예라고 대답한다고 그것이 순종은 아닌 것이다. 순종의 여부는 나중에 그 행동이 그 말을 따랐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는 명령을 거스리지 않는 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는 있다. 특히 행동의 결과가 남에게 가시적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라면, 특히나 더 그렇다. 반대로 둘째 아들과 같이 그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면, 불순종하는 아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아들로 비춰지며 주위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고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로 순종의 여부를 판단한다. 그리고 말로만 하는 순종에 익숙한 사람은, 결국에 있어서 그 거짓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불순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자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그들을 겉으로는, 말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다고 하는 자들이다. 겉으로 드러난 종교의 틀, 남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로서의 믿음의 모습은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사랑함으로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결코 가볍게 받지 않고, 그 말씀에 무게를 두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그래서 결국 살아내는 순종의 삶이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은, 결국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린 진정한 순종의 모습이 이 땅 가운데서 전혀 드러나지 않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이 땅에서 세리와 창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더러움을 들고 나아가 불쌍히 여겨주시기만을 바라며, 그동안 지키지 못했던 그분의 말씀을 이제부터는 순종하며 따르겠다는 결단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들의 마음과 보이지 않는 순종... 그것을 인간을 하찮게 여기며 무시하겠지만, 아니 보이지도 않겠지만,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고 그분이 모든 것을 알아 주신다.
하나님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그 행동이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해야 한다. 말로만 하는 순종, 생각으로만 드리는 순종은 결코 순종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자를 무시하는 것이며, 진노의 대상이 될 뿐이다.
스스로 착각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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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15:00
즐거운 만남...
오늘 이홍숙 목사님께서 댈러스에서 방문하시는 덕에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목사님께서는 대화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셨다. 반대로 나는 내 가슴 속에 있는 몇 가지 심각한 질문을 가지고 그분 앞으로 나아갔다. 이 둘이 만났을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참으로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몇 가지 심각한 문제의식들... 그 정확한 맥락은 나누지 못했지만, 그 내용의 핵심에 대해서는 분명히 나누었다.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방향을 잡아 주셨다. 그리고 내 문제의식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리 많이 빗나간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눈 대화의 내용보다 더 많이 다가 왔던 것은 그분의 인격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편안함과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소원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닮고 싶었다.
그런 분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행복했다.
먼길을 떠나 다시 댈러스로 돌아가신 목사님께 하나님께서 늘 동행하시기를 기도한다.
목사님께서는 대화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셨다. 반대로 나는 내 가슴 속에 있는 몇 가지 심각한 질문을 가지고 그분 앞으로 나아갔다. 이 둘이 만났을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참으로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몇 가지 심각한 문제의식들... 그 정확한 맥락은 나누지 못했지만, 그 내용의 핵심에 대해서는 분명히 나누었다.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방향을 잡아 주셨다. 그리고 내 문제의식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리 많이 빗나간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눈 대화의 내용보다 더 많이 다가 왔던 것은 그분의 인격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편안함과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소원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닮고 싶었다.
그런 분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행복했다.
먼길을 떠나 다시 댈러스로 돌아가신 목사님께 하나님께서 늘 동행하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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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44:00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복이 되려면...
오늘 QT말씀은 열왕기상 10:14-29...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절정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아버지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충성, 그리고 솔로몬 자신이 하나님께 드렸던 믿음과 헌신과 겸손...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최고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1-13)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분별해서 받는 것이다.
어쨋든 솔로몬이 누리는 무한한 지혜와 엄청난 부와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이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제목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느낄 수 있는 뉘앙스는 참 묘하다.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고 있는 그 가운데서, 열왕기서의 저자는 그 복을 받고 누리는 솔로몬에 대해서, 그 마음의 중심을 묘사하기를 거부한다. 그저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은 축복을 누렸는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인지를 주목할 뿐이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솔로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은 그에게 저주가 되었다. 그 넘치는 축복 가운데 그의 영혼은 더욱 빈곤해져 간 것이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하나님의 복이 더 해질수록 그가 더욱 깨달은 것은 "헛되다"는 것 뿐이었다. 그만큼 물질적 축복과 권력은 그의 마음을 더 텅비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선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받는 인간이다. 솔로몬의 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에서 비롯된다. 마치 아담이 에덴에서 베풀어 주신 그 엄청난 축복을 저주로 만들어 버린 것과 같다. 그 축복이 그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며, 첫 마음을 잃게 하고, 결국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돌이키게 만들어 버렸다. 전도서를 통해서 스스로 고백하듯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 "헛됨"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지만, 스스로 그 길로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하지만, 진정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복을 내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독점하며 누리려고 하는 순간, 내가 저주의 길로 들어 설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면서도, 그 복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 그것을 다시 하나님을 위해 돌릴 줄 아는 그런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자세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자세인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직후에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2-23)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 해석되고 있는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 유대의 격언에서 나온 말씀이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것은 당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자선에 대한 격언이었다. 가난한 자를 보고 그들을 돌볼 줄 아는 자들은 그 마음이 밝아진다는 뜻이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가난한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르는 자라는 뜻이고, 그런 자들은 그 마음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수님 당신께서 제자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신 것이다.
만약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축복을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그 사회의 고아와 과부를 위해 썼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사용하고, 스스로 그 부를 온전히 누리기를 포기하고 솔로몬 차원에서의 불편과 가난(?)을 감수했다면, 어땠을까? 단언하건데, 그가 죽고난 후 백성들로부터 온 그 불평은 없었을 것이며, 나라는 둘로 나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겸손한 마음과 가난한 마음이 스스로에게 자신은 하나님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늘 일깨웠을 것이고, 우상에게 그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복을 복으로 누릴 줄 아는 것, 복을 받으면서도 가난과 겸손을 유지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복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복받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절정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아버지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충성, 그리고 솔로몬 자신이 하나님께 드렸던 믿음과 헌신과 겸손...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최고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1-13)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분별해서 받는 것이다.
어쨋든 솔로몬이 누리는 무한한 지혜와 엄청난 부와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이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제목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느낄 수 있는 뉘앙스는 참 묘하다.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고 있는 그 가운데서, 열왕기서의 저자는 그 복을 받고 누리는 솔로몬에 대해서, 그 마음의 중심을 묘사하기를 거부한다. 그저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은 축복을 누렸는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인지를 주목할 뿐이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솔로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은 그에게 저주가 되었다. 그 넘치는 축복 가운데 그의 영혼은 더욱 빈곤해져 간 것이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하나님의 복이 더 해질수록 그가 더욱 깨달은 것은 "헛되다"는 것 뿐이었다. 그만큼 물질적 축복과 권력은 그의 마음을 더 텅비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선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받는 인간이다. 솔로몬의 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에서 비롯된다. 마치 아담이 에덴에서 베풀어 주신 그 엄청난 축복을 저주로 만들어 버린 것과 같다. 그 축복이 그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며, 첫 마음을 잃게 하고, 결국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돌이키게 만들어 버렸다. 전도서를 통해서 스스로 고백하듯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 "헛됨"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지만, 스스로 그 길로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하지만, 진정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복을 내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독점하며 누리려고 하는 순간, 내가 저주의 길로 들어 설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면서도, 그 복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 그것을 다시 하나님을 위해 돌릴 줄 아는 그런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자세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자세인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직후에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2-23)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 해석되고 있는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 유대의 격언에서 나온 말씀이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것은 당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자선에 대한 격언이었다. 가난한 자를 보고 그들을 돌볼 줄 아는 자들은 그 마음이 밝아진다는 뜻이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가난한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르는 자라는 뜻이고, 그런 자들은 그 마음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수님 당신께서 제자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신 것이다.
만약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축복을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그 사회의 고아와 과부를 위해 썼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사용하고, 스스로 그 부를 온전히 누리기를 포기하고 솔로몬 차원에서의 불편과 가난(?)을 감수했다면, 어땠을까? 단언하건데, 그가 죽고난 후 백성들로부터 온 그 불평은 없었을 것이며, 나라는 둘로 나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겸손한 마음과 가난한 마음이 스스로에게 자신은 하나님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늘 일깨웠을 것이고, 우상에게 그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복을 복으로 누릴 줄 아는 것, 복을 받으면서도 가난과 겸손을 유지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복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복받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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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28:00
빈곤.. 사회적 약자..
In a room at the Soto House, 32 Fourth Street, San Francisco, was found the body of W. G. Robbins. He had turned on the gas. Also was found his diary, from which the following extracts are made:--
"March 3.--No chance of getting anything here. What shall I do?
"Marc 7.--Cannot find anything yet.
"March 8.--Am living on doughnuts at five cents a day.
"March 9.--My last quarter gone for room rent.
"March 10.--God help me. Have only five cents left. Can get nothing to do. What next? Starvation or--? I have spent my last nickel to-night. What shall I do? shall it be steal, beg, or die? I have never stolen, begged, or starved in all my fifty years of life, but now I am on the brink--death seems the only refuge.
"March 11.--Sick all day--burning fever this afternoon. Had nothing to eat to-day or since yesterday noon. My head, my head. Good-by, all!"
-from Jack London's "Revolution"
1910년에 출간된 Jack London의 책에 소개된 실재 있었던 한 사건이다.
한 귀중한 영혼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그 사건을 볼 때, 가슴이 아프다.
사람들은 세상을 Macro한 관점에서 본다. Micoro하게 보이는 세상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것 뿐이다. Macro한 관점에서는 개개인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의 문제, 전체적인 조화의 문제만 다룰 뿐이다. 주식을 예로 본다면, 종합주가지수만 보이는 것이다. 시장전체의 흐름에만 관심이 있지 개개 종목들의 등락은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인간 세상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Macro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전체 소비자 물가지수, 국민 총생산 등등의 Macro한 지표만 보일 뿐, 그 숫자에 파 묻힌 개인사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이 Micro한 관점을 가지긴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자기 중심적이다. 다시 주식의 예로 들자면, 그 많은 종목 중에서 자기가 투자하고 있는 종목들, 혹은 관심을 가진 몇 종목만 Micro하게 볼 뿐, 다른 종목들은 눈에 들어 오지도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기의 형편과 자기의 주변만을 Micro한 관점에서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한다. 내가 먹을 것이 좀 있고, 경제적으로 살기가 그리 고단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다. 그에게 세상의 다른 모습들은 보이지 않는다. W. G. Robbins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W. G. Robbins은 100년 전에만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이 땅에는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없을까?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W. G. Robbins는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Macro한 관점과 나 중심의 Micro한 관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그들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들의 존재는 나의 인식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그런 인간에게,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면, W. G. Robbins를 주목하시고, 그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르는 그 곳에 내가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먹고 살기에 충분한 식량과 자원과 땅을 주셨다. 문제는 인간의 욕심이 그것들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그것을 차지하지 못한 자들을 빈곤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결국 Zero Sum Game이다. 한쪽이 편안하고 많이 차지하면, 다른 한쪽은 그만큼 불편하고 비참하고 적게 소유하게 되어 있다. 구약에서 누누히 강조되는 하나님의 공의는 양쪽의 편차를 인정하긴 하지만, 그 편차가 약자들을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내는 것까지를 허용하지 않으시는 공의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토지의 희년 제도를 만드신 것이나, 율법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를 명령하신 것이나, 당신 스스로를 고아와 과부, 즉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죄악과 불의가 관영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물질을 주시고, 내가 가진 물질을 통해서 그들이 도움을 받기 원하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나 또한 가장 평균적인 삶(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든지 간에)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평균 이상의 소득은 반드시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의 W. G. Robbins들을 일부러 찾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 내가 가진 것, 아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나눔으로 W. G. Robbins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면, 나도 고아와 과부를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돕는 그런 자여야 한다.
"March 3.--No chance of getting anything here. What shall I do?
"Marc 7.--Cannot find anything yet.
"March 8.--Am living on doughnuts at five cents a day.
"March 9.--My last quarter gone for room rent.
"March 10.--God help me. Have only five cents left. Can get nothing to do. What next? Starvation or--? I have spent my last nickel to-night. What shall I do? shall it be steal, beg, or die? I have never stolen, begged, or starved in all my fifty years of life, but now I am on the brink--death seems the only refuge.
"March 11.--Sick all day--burning fever this afternoon. Had nothing to eat to-day or since yesterday noon. My head, my head. Good-by, all!"
-from Jack London's "Revolution"
1910년에 출간된 Jack London의 책에 소개된 실재 있었던 한 사건이다.
한 귀중한 영혼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그 사건을 볼 때, 가슴이 아프다.
사람들은 세상을 Macro한 관점에서 본다. Micoro하게 보이는 세상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것 뿐이다. Macro한 관점에서는 개개인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의 문제, 전체적인 조화의 문제만 다룰 뿐이다. 주식을 예로 본다면, 종합주가지수만 보이는 것이다. 시장전체의 흐름에만 관심이 있지 개개 종목들의 등락은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인간 세상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Macro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전체 소비자 물가지수, 국민 총생산 등등의 Macro한 지표만 보일 뿐, 그 숫자에 파 묻힌 개인사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이 Micro한 관점을 가지긴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자기 중심적이다. 다시 주식의 예로 들자면, 그 많은 종목 중에서 자기가 투자하고 있는 종목들, 혹은 관심을 가진 몇 종목만 Micro하게 볼 뿐, 다른 종목들은 눈에 들어 오지도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기의 형편과 자기의 주변만을 Micro한 관점에서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한다. 내가 먹을 것이 좀 있고, 경제적으로 살기가 그리 고단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다. 그에게 세상의 다른 모습들은 보이지 않는다. W. G. Robbins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W. G. Robbins은 100년 전에만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이 땅에는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없을까?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W. G. Robbins는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Macro한 관점과 나 중심의 Micro한 관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그들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들의 존재는 나의 인식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그런 인간에게,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면, W. G. Robbins를 주목하시고, 그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르는 그 곳에 내가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먹고 살기에 충분한 식량과 자원과 땅을 주셨다. 문제는 인간의 욕심이 그것들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그것을 차지하지 못한 자들을 빈곤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결국 Zero Sum Game이다. 한쪽이 편안하고 많이 차지하면, 다른 한쪽은 그만큼 불편하고 비참하고 적게 소유하게 되어 있다. 구약에서 누누히 강조되는 하나님의 공의는 양쪽의 편차를 인정하긴 하지만, 그 편차가 약자들을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내는 것까지를 허용하지 않으시는 공의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토지의 희년 제도를 만드신 것이나, 율법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를 명령하신 것이나, 당신 스스로를 고아와 과부, 즉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죄악과 불의가 관영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물질을 주시고, 내가 가진 물질을 통해서 그들이 도움을 받기 원하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나 또한 가장 평균적인 삶(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든지 간에)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평균 이상의 소득은 반드시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의 W. G. Robbins들을 일부러 찾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 내가 가진 것, 아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나눔으로 W. G. Robbins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면, 나도 고아와 과부를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돕는 그런 자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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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47:00
불편한 진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 6:5-6)
예수님의 고향... 그곳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 주민들은 모두 놀랐다. 그 가르침이 학식이 매우 높은 사람들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사람들이 그들의 눈 앞에 있는 괄목상대할 만한 예수님의 모습을 접했을 때 그들이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다시 보고,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아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직접 보고 있는 그 것을 부인하고, 전에 알았던 어릴 적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의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2-3)
그런 그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 권능을 행하시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못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표준새번역)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놀라셨다"는 말씀이다. 마치 그럴 줄은 모르셨다는 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전능하셔야 하고, 전지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본문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닌,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 묘사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수제자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베드로의 기억을 중심으로 기록된 최초의 복음서가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불편하게 하는 기록들을 있는 그대로 여과없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런 구절을 대할 때, 우리는 불편해진다... 이상해진다... 그래서 무시한다...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결코 옳지 않은 태도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가진 지식을 성경보다 더 앞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신학이 성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학으로 성경을 제단하는 셈이다.
성경을 대할 때는 반드시 수동적이어야 한다. 성경 앞에서는 내 모든 지식을 상대화 시킬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진 소위 신학이 성경을 무효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것도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운 묘사로 하나님을 알게 한다. 그 다양한 모습을 내 안에 있는 그대로 심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 하나님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에서,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믿는 사람들이, 성경이 보여주는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진리의 모습 보기를 거부하는 것을 본다. 하나가 옳다고 해서, 그 하나로 모든 것을 포괄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그 하나 외에 더하여 다른 하나를 보여주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신학적 틀 안에 들어 오지 않는 성경 본문에 대해서, 과도한 "해석"의 작업이 들어가야 하고, 그 해석의 작업을 통해서 본문의 원래의 의도는 흐려져 갈 수 있다. 그 고집을 통해서 진리는 힘을 잃고 희석되어 가는 것이다. 물론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반드시 "해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본문 그대로의 의미를 뛰어 넘는 "해석"이 너무 많아진다면, 스스로 내가 그런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내가 이해할 수없는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 때 내 마음은 불편해진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통해서 내 생각, 내 신학, 내 주장을 바꿔야 한다. 내가 바뀌어서 내 편협함을 훨씬 뛰어넘는 성경의 넓이 만큼 내가 넓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고 싶어도 행하실 수 없을 때도 있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시며 그럴 수 있냐는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시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이상하게 여기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분이 바로 먼지나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거니셨던 나의 주 메시야, 나의 하나님, 예수님인 것이다.
예수님의 고향... 그곳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 주민들은 모두 놀랐다. 그 가르침이 학식이 매우 높은 사람들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사람들이 그들의 눈 앞에 있는 괄목상대할 만한 예수님의 모습을 접했을 때 그들이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다시 보고,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아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직접 보고 있는 그 것을 부인하고, 전에 알았던 어릴 적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의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2-3)
그런 그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 권능을 행하시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못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표준새번역)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놀라셨다"는 말씀이다. 마치 그럴 줄은 모르셨다는 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전능하셔야 하고, 전지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본문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닌,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 묘사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수제자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베드로의 기억을 중심으로 기록된 최초의 복음서가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불편하게 하는 기록들을 있는 그대로 여과없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런 구절을 대할 때, 우리는 불편해진다... 이상해진다... 그래서 무시한다...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결코 옳지 않은 태도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가진 지식을 성경보다 더 앞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신학이 성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학으로 성경을 제단하는 셈이다.
성경을 대할 때는 반드시 수동적이어야 한다. 성경 앞에서는 내 모든 지식을 상대화 시킬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진 소위 신학이 성경을 무효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것도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운 묘사로 하나님을 알게 한다. 그 다양한 모습을 내 안에 있는 그대로 심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 하나님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에서,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믿는 사람들이, 성경이 보여주는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진리의 모습 보기를 거부하는 것을 본다. 하나가 옳다고 해서, 그 하나로 모든 것을 포괄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그 하나 외에 더하여 다른 하나를 보여주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신학적 틀 안에 들어 오지 않는 성경 본문에 대해서, 과도한 "해석"의 작업이 들어가야 하고, 그 해석의 작업을 통해서 본문의 원래의 의도는 흐려져 갈 수 있다. 그 고집을 통해서 진리는 힘을 잃고 희석되어 가는 것이다. 물론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반드시 "해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본문 그대로의 의미를 뛰어 넘는 "해석"이 너무 많아진다면, 스스로 내가 그런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내가 이해할 수없는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 때 내 마음은 불편해진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통해서 내 생각, 내 신학, 내 주장을 바꿔야 한다. 내가 바뀌어서 내 편협함을 훨씬 뛰어넘는 성경의 넓이 만큼 내가 넓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고 싶어도 행하실 수 없을 때도 있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시며 그럴 수 있냐는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시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이상하게 여기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분이 바로 먼지나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거니셨던 나의 주 메시야, 나의 하나님, 예수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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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47:00
A shooting on campus
"Police Chief Art Acevedo said a preliminary investigation shows that the gunman fired an AK-47 near the Littlefield Fountain near 21st Street and Whitis Avenue about 8:15 a.m.
With students pointing the way, officers chased the shooter, who ran into the Perry-Castaneda Library and up the stairs to the sixth floor. That’s where he appeared to have shot himself, Acevedo said." from Austin-American Statesman
오늘 아침... 평소보다 한 차 늦은 버스를 탔다. 캠퍼스로 향하여 가는 길... 평소와 다른 점은 전혀 없었다.
8시 15분 혹은 20분 쯤... Lavaca를 통해서 15번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경찰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급히 학교쪽을 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미국 학생들이 서로 핸드폰을 보여주며 뭔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핸드폰 자랑하나?'(나중에 알고 보니 핸드폰으로 보내주는 alert문자 메시지였다. 나는 등록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Trinity에 도착한 버스가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테니스장 옆에 멈춰 섰다. 우리는 마냥 기다렸다. 잠시후... 캠퍼스에서 총격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버스 안에 안내 되었다.
한 참을 기다린 후, 버스는 우리를 San Jacinto와 MLK가 만나는 곳에서 내려 줬다. 내리니 MLK의 모든 차량은 통제되고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MLK에서 도서관이 보이는 Blanton Museum까지 걸어 올라간 후, 경찰에게 물었다.
"Is is forbidden to access to the campus?"
"Yes. It's very dangerous there. You'd better keep yourself off from the campus."
캠퍼스 주변이 깔린 경찰들, 방송 기자들... 상황이 심각한 것을 직감하고, 아는 사람과 연락하여 그 차를 얻어 타고 집에 왔다.
만약 내가 평소와 같이 15분 전에 출발한 버스를 탔다면, 나는 내 방이 있는 도서관 6층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총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아마도 죽은 사람과 같이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 사람이 자살한 것을 실재로 봤을 것이다. 한 차 늦게 학교에 가는 바람에, 캠퍼스에 들어가기 직전에 버스가 멈췄고, 나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은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특수 경찰들이 모여 있는 위 사진에서 보이는 왼쪽의 첫 문이 바로 내가 강의하기로 되어 있는 Calhoun의 교실 문이다. 평소에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과 다른 TA와 함께 경찰들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수업에 대해서 잠깐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모든 수업이 취소되는 바람에 강의는 못하게 되었다. 이번 주 목요일에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 수있으면 좋겠는데...
어쨋든 이 세상에서 생과 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 오늘 느낀 소감이다. 비극과 희극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그 차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깊이 느낀다.
날마다 내 목숨을 이어가는 것은 바로 그분이 나를 붙잡고 계시고, 나를 지켜보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학교가 떠들썩해진 오늘... 바로 그 가까이까지 갔었던 내가 느끼는 소감이며 감사이다.
With students pointing the way, officers chased the shooter, who ran into the Perry-Castaneda Library and up the stairs to the sixth floor. That’s where he appeared to have shot himself, Acevedo said." from Austin-American Statesman
오늘 아침... 평소보다 한 차 늦은 버스를 탔다. 캠퍼스로 향하여 가는 길... 평소와 다른 점은 전혀 없었다.
8시 15분 혹은 20분 쯤... Lavaca를 통해서 15번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경찰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급히 학교쪽을 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미국 학생들이 서로 핸드폰을 보여주며 뭔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핸드폰 자랑하나?'(나중에 알고 보니 핸드폰으로 보내주는 alert문자 메시지였다. 나는 등록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Trinity에 도착한 버스가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테니스장 옆에 멈춰 섰다. 우리는 마냥 기다렸다. 잠시후... 캠퍼스에서 총격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버스 안에 안내 되었다.
한 참을 기다린 후, 버스는 우리를 San Jacinto와 MLK가 만나는 곳에서 내려 줬다. 내리니 MLK의 모든 차량은 통제되고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MLK에서 도서관이 보이는 Blanton Museum까지 걸어 올라간 후, 경찰에게 물었다.
"Is is forbidden to access to the campus?"
"Yes. It's very dangerous there. You'd better keep yourself off from the campus."
캠퍼스 주변이 깔린 경찰들, 방송 기자들... 상황이 심각한 것을 직감하고, 아는 사람과 연락하여 그 차를 얻어 타고 집에 왔다.
만약 내가 평소와 같이 15분 전에 출발한 버스를 탔다면, 나는 내 방이 있는 도서관 6층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총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아마도 죽은 사람과 같이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 사람이 자살한 것을 실재로 봤을 것이다. 한 차 늦게 학교에 가는 바람에, 캠퍼스에 들어가기 직전에 버스가 멈췄고, 나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은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특수 경찰들이 모여 있는 위 사진에서 보이는 왼쪽의 첫 문이 바로 내가 강의하기로 되어 있는 Calhoun의 교실 문이다. 평소에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과 다른 TA와 함께 경찰들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수업에 대해서 잠깐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모든 수업이 취소되는 바람에 강의는 못하게 되었다. 이번 주 목요일에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 수있으면 좋겠는데...
어쨋든 이 세상에서 생과 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 오늘 느낀 소감이다. 비극과 희극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그 차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깊이 느낀다.
날마다 내 목숨을 이어가는 것은 바로 그분이 나를 붙잡고 계시고, 나를 지켜보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학교가 떠들썩해진 오늘... 바로 그 가까이까지 갔었던 내가 느끼는 소감이며 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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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13:00
딸에게 아빠가 필요한 100가지 이유
1. 딸에게는 아빠가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면 그대로 될 거라는 믿음을 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 딸에게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딸의 희생을 막아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 딸에게는 외모보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 딸에게는 필요한 순간에 늘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5. 언제든 자신을 안아주고 입맞춰줄 시간이 있는 아빠,
6. 춤을 추다가 발을 밟아도 개의치 않고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 딸에게는 딸이 아빠가 필요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 딸에게는 가족을 온전하게 지켜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 딸에게는 실수를 해도 벌주지 않고 오히려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게 도와주며
10. 어디서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가르치는 아빠,
11. 남들이 나와 다른 점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며,
12. 행동의 결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에 따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13. 딸에게는 누군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어떤것인지 알게 해 줄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14. 딸에게는 진심으로 자신이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15. 딸에게는 밤에 보이는 무서운 것들로부터 딸을 보호해주고,
16. 어려운 문제로 잠 못 이룰 때 해답을 주는 아빠,
17.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18. 고통스러운 것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며,
19. 천둥과 번개로부터 딸을 보호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0. 딸에게는 가족이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1. 딸에게는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안전지대가 되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2. 딸에게는 헌신적인 사랑을 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게 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3. 딸에게는 모든 남자들을 판단할 때 기준이 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4. 딸에게는 함께 있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5. 딸에게는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존재라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6. 딸에게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낄 때 언제나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27. 혼자 가는 것이 너무 두려울 때 동행해주는 아빠,
28. 성실함의 의미와 험한 길을 피해가는 법을 가르쳐 주고,
29.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어려운 결정들을 대신 내려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0. 딸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 이상형이 적어도 한 명은 있다고 믿게 해 줄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1. 딸에게는 밤에 안아다 눕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2. 딸에게는 자기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롭지 못할 때 자신을 지켜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3. 딸에게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4. 딸에게는 용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치며,
35. 한 번 이상 용서해도 좋다고 가르치는 아빠,
36. 의지가 굳은 것과 고집스러운 것의 차이점을 가르쳐주고,
37. 자신이 딸의 존경심을 얻어냈던 것처럼 존경심은 노력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8. 딸에게는 역경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9. 딸에게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는 우주의 중심이 아닐 수는 있어도 아빠에게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0. 딸에게는 딸의 아이들에게 가족의 역사가 되어 줄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1. 딸에게는 남편에게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42.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라고 가르치는 아빠,
43. 난관 속에서도 존엄성을 지키라고 가르치며,
44. 부모로서 아이를 가르치는 데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5. 딸에게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6. 딸에게는 남자의 힘은 그의 손이나 목소리의 위력이 아니라 다정한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7. 딸에게는 모든 거래에서 정직하라고 가르치고,
48. 인내심과 친절을 가르치는 아빠,
49. 의지를 굽히지 않아야 할 때와 타협해야 할 때를 가르쳐주며
50. 실패할 때마다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1. 딸에게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생각나게 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2. 딸에게는 자식이 성장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떠밀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3. 딸에게는 자기편이 아무도 없을 때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떠오르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4. 딸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할 때 필요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55. 잘못된 길로 가면 뒤에서 잡아당겨주는 아빠,
56.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자신을 높이 평가해주고 눈물을 흘리며 꼭 안아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7. 딸에게는 업어달라면 아무 이유없이 그냥 업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8. 딸에게는 도덕적인 기준을 세워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9. 딸에게는 미처 습득하지 못한 지혜를 나눠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0. 딸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하던 일도 멈추는,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1. 딸에게는 꼭 안기면 무서울 것이 없는 편안한 느낌으로 기억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2. 딸에게는 지혜와 이해라는 토대 위에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만들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3. 딸에게는 진실을 알아보는 눈과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법을 가르쳐 주고,
64. 성실함을 알아보는 눈과 장려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빠,
65. 공정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66. 자신을 옹호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7. 딸에게는 요조숙녀다운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8. 딸에게는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진 집에 언제든 와서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9. 딸에게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기쁨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0. 딸에게는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할 때 다독여주고,
71. 강하고 의지력 있는 성격을 길러주는 아빠,
72.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르쳐주며,
73. 딸이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4. 딸에게는 제 손으로 무언가를 고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5. 딸에게는 진정한 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6. 딸에게는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7. 딸에게는 무지함은 어떤 경우에도 변명이 될 수 없으며,
78. 자존심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데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아빠,
79. 자신의 생각이 적합한 지 시험할 수 있는 실험을 하라고 가르치며,
80. 혼란한 가운데서도 정신을 집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1. 딸에게는 기쁨이 넘치는 마음에는 평화가 가득하며,
82. 거짓이 머무를 자리가 없다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3. 딸에게는 남자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주고
84. 모든 남자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자와 같지는 않다고 가르치는 아빠,
85. 신사를 알아보는 법을 가르쳐주고,
86. 아버지와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딸의 결혼식 날 그옆에 서있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7. 딸에게는 조심해야 할 때를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8. 딸에게는 여자와 남자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9. 딸에게는 경험을 통해 배우라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0. 딸에게는 자기 자식의 아버지가 될 남자를 고를 때 어떤 타입을 골라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가능한 한 최고의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빠,
91.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녀를 키울 수 있게 도와주며,
92. 가족 안에서의 역할이 자신의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3. 딸에게는 인생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4. 딸에게는 열심히 일하는 데서 오는 혜택을 알게 해 주고,
95. 딸이 엄마와도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집안일을 도와주며,
96. 씀씀이에 책임을 지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라고 가르치는 아빠,
97. 관대한 심성으로 베풀 수 있도록 가르치며
98. 너무 지쳐 혼자 일을 끝내지 못할 때에 일을 끝낼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9. 딸에게는 남자들을 신뢰해도 좋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100. 딸에게는 아빠가 필요하다. 아빠는 딸의 첫사랑이다.
-그레고리 E. 랭글, 재닛 랭포드 모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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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라.. 너무 많다.. 그런 아빠가 세상에 있을까?
내가 내 딸들에게 주로 하는 것...
그것은 아침에 눈비비고 일어났을 때, 꼭 껴안아 주는 것... 그리고 귓속말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수시로 시간날 때 마다 껴안고 뽀뽀해 주는 것...
아이들이 내 등을 보고 업어 달라고 할 때, 업어 주는 것...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
잘못했을 때는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치지만, 아빠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결코 변함이 없음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
뭔가 고장 났을 때, 나에게 들고오는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고쳐주는 것...
아이들이 뭔가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함께 머리를 싸매고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하는 것...
잘 때 자장가를 불러주고, 같이 기도하는 것... 말씀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것...
그것이 전부인데... 그것으로 100가지를 다 만족 시킬 수 있을까?
2. 딸에게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딸의 희생을 막아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 딸에게는 외모보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 딸에게는 필요한 순간에 늘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5. 언제든 자신을 안아주고 입맞춰줄 시간이 있는 아빠,
6. 춤을 추다가 발을 밟아도 개의치 않고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 딸에게는 딸이 아빠가 필요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 딸에게는 가족을 온전하게 지켜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 딸에게는 실수를 해도 벌주지 않고 오히려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게 도와주며
10. 어디서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가르치는 아빠,
11. 남들이 나와 다른 점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며,
12. 행동의 결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에 따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13. 딸에게는 누군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어떤것인지 알게 해 줄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14. 딸에게는 진심으로 자신이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15. 딸에게는 밤에 보이는 무서운 것들로부터 딸을 보호해주고,
16. 어려운 문제로 잠 못 이룰 때 해답을 주는 아빠,
17.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18. 고통스러운 것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며,
19. 천둥과 번개로부터 딸을 보호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0. 딸에게는 가족이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1. 딸에게는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안전지대가 되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2. 딸에게는 헌신적인 사랑을 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게 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3. 딸에게는 모든 남자들을 판단할 때 기준이 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4. 딸에게는 함께 있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5. 딸에게는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존재라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26. 딸에게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낄 때 언제나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27. 혼자 가는 것이 너무 두려울 때 동행해주는 아빠,
28. 성실함의 의미와 험한 길을 피해가는 법을 가르쳐 주고,
29.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어려운 결정들을 대신 내려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0. 딸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 이상형이 적어도 한 명은 있다고 믿게 해 줄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1. 딸에게는 밤에 안아다 눕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2. 딸에게는 자기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롭지 못할 때 자신을 지켜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3. 딸에게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4. 딸에게는 용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치며,
35. 한 번 이상 용서해도 좋다고 가르치는 아빠,
36. 의지가 굳은 것과 고집스러운 것의 차이점을 가르쳐주고,
37. 자신이 딸의 존경심을 얻어냈던 것처럼 존경심은 노력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8. 딸에게는 역경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39. 딸에게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는 우주의 중심이 아닐 수는 있어도 아빠에게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0. 딸에게는 딸의 아이들에게 가족의 역사가 되어 줄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1. 딸에게는 남편에게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42.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라고 가르치는 아빠,
43. 난관 속에서도 존엄성을 지키라고 가르치며,
44. 부모로서 아이를 가르치는 데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5. 딸에게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6. 딸에게는 남자의 힘은 그의 손이나 목소리의 위력이 아니라 다정한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47. 딸에게는 모든 거래에서 정직하라고 가르치고,
48. 인내심과 친절을 가르치는 아빠,
49. 의지를 굽히지 않아야 할 때와 타협해야 할 때를 가르쳐주며
50. 실패할 때마다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1. 딸에게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생각나게 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2. 딸에게는 자식이 성장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떠밀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3. 딸에게는 자기편이 아무도 없을 때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떠오르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4. 딸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할 때 필요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55. 잘못된 길로 가면 뒤에서 잡아당겨주는 아빠,
56.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자신을 높이 평가해주고 눈물을 흘리며 꼭 안아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7. 딸에게는 업어달라면 아무 이유없이 그냥 업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8. 딸에게는 도덕적인 기준을 세워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59. 딸에게는 미처 습득하지 못한 지혜를 나눠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0. 딸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하던 일도 멈추는,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1. 딸에게는 꼭 안기면 무서울 것이 없는 편안한 느낌으로 기억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2. 딸에게는 지혜와 이해라는 토대 위에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만들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3. 딸에게는 진실을 알아보는 눈과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법을 가르쳐 주고,
64. 성실함을 알아보는 눈과 장려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빠,
65. 공정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66. 자신을 옹호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7. 딸에게는 요조숙녀다운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8. 딸에게는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진 집에 언제든 와서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69. 딸에게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기쁨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0. 딸에게는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할 때 다독여주고,
71. 강하고 의지력 있는 성격을 길러주는 아빠,
72.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르쳐주며,
73. 딸이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4. 딸에게는 제 손으로 무언가를 고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5. 딸에게는 진정한 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6. 딸에게는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77. 딸에게는 무지함은 어떤 경우에도 변명이 될 수 없으며,
78. 자존심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데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아빠,
79. 자신의 생각이 적합한 지 시험할 수 있는 실험을 하라고 가르치며,
80. 혼란한 가운데서도 정신을 집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1. 딸에게는 기쁨이 넘치는 마음에는 평화가 가득하며,
82. 거짓이 머무를 자리가 없다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3. 딸에게는 남자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주고
84. 모든 남자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자와 같지는 않다고 가르치는 아빠,
85. 신사를 알아보는 법을 가르쳐주고,
86. 아버지와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딸의 결혼식 날 그옆에 서있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7. 딸에게는 조심해야 할 때를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8. 딸에게는 여자와 남자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89. 딸에게는 경험을 통해 배우라고 가르치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0. 딸에게는 자기 자식의 아버지가 될 남자를 고를 때 어떤 타입을 골라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가능한 한 최고의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빠,
91.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녀를 키울 수 있게 도와주며,
92. 가족 안에서의 역할이 자신의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3. 딸에게는 인생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4. 딸에게는 열심히 일하는 데서 오는 혜택을 알게 해 주고,
95. 딸이 엄마와도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집안일을 도와주며,
96. 씀씀이에 책임을 지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라고 가르치는 아빠,
97. 관대한 심성으로 베풀 수 있도록 가르치며
98. 너무 지쳐 혼자 일을 끝내지 못할 때에 일을 끝낼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99. 딸에게는 남자들을 신뢰해도 좋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100. 딸에게는 아빠가 필요하다. 아빠는 딸의 첫사랑이다.
-그레고리 E. 랭글, 재닛 랭포드 모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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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라.. 너무 많다.. 그런 아빠가 세상에 있을까?
내가 내 딸들에게 주로 하는 것...
그것은 아침에 눈비비고 일어났을 때, 꼭 껴안아 주는 것... 그리고 귓속말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수시로 시간날 때 마다 껴안고 뽀뽀해 주는 것...
아이들이 내 등을 보고 업어 달라고 할 때, 업어 주는 것...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
잘못했을 때는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치지만, 아빠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결코 변함이 없음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
뭔가 고장 났을 때, 나에게 들고오는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고쳐주는 것...
아이들이 뭔가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함께 머리를 싸매고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하는 것...
잘 때 자장가를 불러주고, 같이 기도하는 것... 말씀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것...
그것이 전부인데... 그것으로 100가지를 다 만족 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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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46:00
콜라가...
갑자기... 콜라가 먹고 싶다...
최근 거의 안 먹었었는데...
몸이 힘들고 피곤해서 그런가? 많이 땡긴다...
밖에 나가서 하나 사올까? 아니면... 참을까?
최근 거의 안 먹었었는데...
몸이 힘들고 피곤해서 그런가? 많이 땡긴다...
밖에 나가서 하나 사올까? 아니면... 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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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09:00
I hope she bun...
예연이가 오늘 아침에 갑자기 물었다.
"'I hope she bun.'이 뭔지 알아요?"
"......"
"아홉시 반!"
"'I hope she bun.'이 뭔지 알아요?"
"......"
"아홉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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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37:00
걸 그룹의 인기...
몇 년 전부터인가? 한국에서 girl group이 인기인 것 같다.
주로 십대 후반의 여자들로 구성된 그룹. 그 그룹들에 대한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단 한 번도 그 그룹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다만 월드컵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한 girl group이 축하 공연을 하는 장면을 잠깐 보았을 뿐이고, 나머지는 인터넷 신문의 기사에 나오는 사진이나 광고들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봤을 뿐이다.
신문 기사를 통해서 본 바로는 30대와 40대, 즉 내 또래의 남자들이 열광한다고 한다. 일명 아저씨부대... 그들은 무엇에 열광하는 것일까?
한 번도 들어본 적도, TV에서 본적도 없는 나로서는 girl group이 노래는 잘 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진으로 보기에는 그들의 무기는 sex appeal이다. 그것도, 모든 남자의 roman인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음을 무기로한 sex appeal.
매우 짧은 바지나 치마... 갸름한 몸매... 달라 붙거나 노출이 심한 옷... 그리고 때로는 귀여워 보이고, 때로는 선정적으로 보이는 춤... 그리고 노래...
옛적에, 한량들이 기방에서 기생들의 노래를 들으며 즐겼던 것과 뭐가 다를까?
집단 관음증(voyeurism)... 어느 나이든 여성 가수가 girl group의 인기에 대해서 신문 인터뷰를 통해 툭 던진 한마디이다. 내 의견과 너무나 똑같다. 남성의 본성인 관음증에 호소함으로 돈과 인기를 만들어 내는 entertainment management 회사의 인위적인 작품일 뿐이다.
그 동기가... 그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이 참으로 지저분하다... 더럽다...
관음증이 무대라는 공식화된 장소에서 표출되고, 그리고 집단적으로 즐겨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죄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한창 어린 그 영혼들을 그렇게 사용하다가, 즐기다가 부품처럼 폐기처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entertainment 산업의 본질이 아닌가?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그것으로 들려주는 그 아름다운 노래는 사라져가고, 이제 음악도 눈으로 즐기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눈으로 즐기는 음악... 내 인생에 결코 있을 수 없는, 용인할 수 없는 것...
음악에 대한 모독이다.
주로 십대 후반의 여자들로 구성된 그룹. 그 그룹들에 대한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단 한 번도 그 그룹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다만 월드컵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한 girl group이 축하 공연을 하는 장면을 잠깐 보았을 뿐이고, 나머지는 인터넷 신문의 기사에 나오는 사진이나 광고들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봤을 뿐이다.
신문 기사를 통해서 본 바로는 30대와 40대, 즉 내 또래의 남자들이 열광한다고 한다. 일명 아저씨부대... 그들은 무엇에 열광하는 것일까?
한 번도 들어본 적도, TV에서 본적도 없는 나로서는 girl group이 노래는 잘 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진으로 보기에는 그들의 무기는 sex appeal이다. 그것도, 모든 남자의 roman인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음을 무기로한 sex appeal.
매우 짧은 바지나 치마... 갸름한 몸매... 달라 붙거나 노출이 심한 옷... 그리고 때로는 귀여워 보이고, 때로는 선정적으로 보이는 춤... 그리고 노래...
옛적에, 한량들이 기방에서 기생들의 노래를 들으며 즐겼던 것과 뭐가 다를까?
집단 관음증(voyeurism)... 어느 나이든 여성 가수가 girl group의 인기에 대해서 신문 인터뷰를 통해 툭 던진 한마디이다. 내 의견과 너무나 똑같다. 남성의 본성인 관음증에 호소함으로 돈과 인기를 만들어 내는 entertainment management 회사의 인위적인 작품일 뿐이다.
그 동기가... 그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이 참으로 지저분하다... 더럽다...
관음증이 무대라는 공식화된 장소에서 표출되고, 그리고 집단적으로 즐겨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죄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한창 어린 그 영혼들을 그렇게 사용하다가, 즐기다가 부품처럼 폐기처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entertainment 산업의 본질이 아닌가?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그것으로 들려주는 그 아름다운 노래는 사라져가고, 이제 음악도 눈으로 즐기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눈으로 즐기는 음악... 내 인생에 결코 있을 수 없는, 용인할 수 없는 것...
음악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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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11:00
[시]감사
감사
김현승
감사는
곧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곧
사랑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드리고 바친다.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寶石(보석)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納辯(눌변)의 詩(시)로...... .
김현승
감사는
곧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곧
사랑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드리고 바친다.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寶石(보석)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納辯(눌변)의 詩(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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