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그저께 저녁에 집에 오니 잠에 든 예연이가 아빠에게 편지를 남겼다.
내용은 너무 단순한데, 예연이 스러운 그 표현과 장식, 그리고 예연이와 내가 알 수 있는 "I found this"라는 말이 참 정감이 있었다. 예연이가 발견한 것은 얼마 전에 예연이의 스쿠터에서 빠져서 분실된 부품의 일부였다. 예연이와 나 사이에 같이 공유하는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 전의 스토리는 모두 생략된 채 "I found this"라는 짧은 말 한 마디에 그 위에 그 부품을 올려 놓은 것이다. 편지를 읽으며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았다. 예연이와 내가 공유하는 삶의 한 스토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연이는 짧게 자신의 필요를 말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단 명료하지만, 거기에는 아빠에 대한 큰 신뢰가 담겨 있다. 그것은 아빠에게 말하면 들어 줄 것이라는 것. 긴 편지로 나를 설득하지 않아도, 그 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호소하지 않아도, 자신의 필요를 아빠가 판단하고 채워줄 것이라는 믿음이 거기에 담겨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생각해 본다. 너무 많은 군더더기들... 화려한 수사들...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시는 하나님을 대하는 듯한 기도의 태도... 그 모든 것은 불필요한 것인데... 그저 아빠 되시는 하나님과 삶을 공유함으로, "I found this"라고 짧게 말씀드려도 아빠이신 하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 맥락을 이해하시는 삶... 그분과 늘 동행하며 함께하는 삶이 없다면 그런 기도가 불가능한 것인데... 그리고 그분께 나의 필요를 말씀드리는 기도...

"Child Is the Father of Man"이라고 영국 낭만주의의 태두였던 William Wordsworth가 말했다. 오늘 그것이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절실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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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

구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전적인 은혜요 선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택하신 자"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구원을 주시면, 구원을 못받는 것은 하나님 책임 아니냐는 것이다. 아무리 받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지옥 간다면, 하나님 책임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편협하고 괴팍한 노인네 같은 존재라고 조롱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결코 진실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많은 비유를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위한 변론을 한다. 그 비유는 아주 많지만 몇 가지만 추려서 대충 내용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과 같다. 하나님께서 정성을 들여 모든 음식을 다 해 놓으셨고, 인간인 우리는 떠 먹기만 하면 된다. (혹은 떡 먹여 주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우리는 입만 벌려 먹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셨는고, 우리의 공로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냥 입을 벌려 먹기만 하면 되는데, 먹지 않는다면, 그래서 굶어 죽었다면, 누구탓이냐?

물에 빠져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제는 죽을 힘을 다해 고개를 내밀었다가 가까이 다가온 구조대가 던진 밧줄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것만 잡으면 살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을 잡지 않았다면 누구 책임이냐?

죽을 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있다.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지만, 그 병을 깨끗이 고칠 수 있는 약이 단 한 개가 있고, 그것이 바로 침대 옆에 누워 있다. 환자는 그 약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누군가 그 병에 죽는다는 것을 들은 사람이 그 약을 구해서 가져다 주었다. 이제 그 약을 입에 넣어 주려고 할 때, 입을 벌리지 않아서 그 약을 못먹는다면 그것은 누구 잘못이냐?

대충 그런 설명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베푸셨고, 인간은 그것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취하지 않는 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모든 공로는 하나님께서 다 해 놓으셨지만, 인간이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탓이지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비유이다.

이 비유들이 매우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많은 진리를 드러내 보여주는 비유이지만, 자칫 오해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비유대로 한다면, 진수성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입을 벌려 먹을 능력이 없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빠져 죽은 자라는 것, 죽을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죽은 상태로 살아간다.
그는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것을 입에 떠 먹여서 입안 가득히 담아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맛보고 먹을 능력이 없는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식욕이 없다. 그리고 삶에 욕구도 없다. 죽어가는 자는 아직 생명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만, 이미 죽은 자는 생명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다.
인간인 우리는 바로 그런 자들이라는 것. 그것이 좋은 의도로 만들어 낸 그 비유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비롯될 수도 없다. 이미 죽은 자들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셔야 했고,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길을 만드셔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죽은 자들, 바로 앞에 밥상을 차려줘도 전혀 알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들이 죽어 있을 때 이미 십자가로 생명의 길을 내 주시고, 죽어 있는 영혼에 감각을 주셔서 생명의 맛볼 수 있게 하셨고 온전히 생명 가운데 거하게 하셨다.

그것이 그분의 은혜다. 당신의 택하신 자들... 죽어 있지만,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살리기를 원하신 자들에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일을 100% 하나님 당신 혼자서 처리하셨고, 우리는 그저 옮김을 받은, 다시 말해 눈떠보니 살아 있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생명이다. 이 구원의 과정에서 구원받은 자가 스스로를 자랑할 것이 조금도 없음은 분명하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구원받지 못함에 대한 책임은 밥을 못떠먹거나 밧줄을 안 잡거나, 입을 벌리지 않고 약을 안 먹거나 하는 데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의 책임은 이미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죄를 지은 책임에서 물어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를 지은 자는 모두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법이다. 그 법에 따라서 죄를 지은 모든 자들은 매우 정당하게 법에 따라 죽음의 형벌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자신이 죽어 있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따져야 할 뿐, 죽어있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은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는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를 짓는 데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다. 책임은 전적으로 죄를 지은 자신에게 있다. 입이 백 개, 아니 천 개라도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인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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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행복이란 삶에 만족을 느끼며, 무탈하게 잘 지내는 상태, 그래서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문제는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즉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 주느냐이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행복하기 위한 조건들이 있다. 사실상 우리가 행복을 말할 때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그 행복의 조건, 그리고 그 조건들이 얼마나 충족되었는가에 관심이 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환유법적으로 표현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행복은 무엇인가?
나에게 그 답이 분명히 있는지, 그리고 그 답이 정말 맞는 답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추구해 간다. 대부분의 경우, 돈, 명예, 안락함, 건강, 좋은 인간관계, 본능적 욕구의 만족(즉, 쾌락), 소유 등등이다.
'돈이 좀 더 있다면 행복할텐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정말 행복할텐데..'
'건강하면 행복할텐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된다면 행복할텐데...'
'나에게 여자(남자)친구 혹은 남편(아내)가 있으면 행복할텐데...'
'내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등등 수 없이 많은 행복의 이유와 조건들이 있다.

진정으로 그 행복을 위한 조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할까?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주어진 "행복"이라는 것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으로 나를 행복한 "상태"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위의 것들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재벌들, 헐리우드 스타들, 소위 잘나간다는 많은 사람들은 지극히 행복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거의 다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려 자살한 삼성전자의 부사장은 51세의 한창 나이에, 서울대와 스탠포드대학에서 공부했고, 최고로 인정받으며 삼성전자에 파격적인 대우로 입사했고, 승승장구하면서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벌어들인 돈만 하더라도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런 그가 왜 자살했을까?

인간의 비극은 "행복의 조건"을 잘못 찾는 데서 비롯된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그토록 얻고자 하는 그것들은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그것들은 신기루일 뿐, 그리고 마약처럼, 처음 성취했을 때는 황홀함을 가져다 주지만, 얼마 안 있어 쓴뿌리를 남기고 더 큰 성취라는 자극을 찾아서 나서야 하는 행복을 찾는 영적 하이에나로 전락시켜버릴 뿐이다. 그것이 성경의 분명한 진리이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것은 그 성경의 진리로 사람들을 참 행복과 참 생명으로 바르게 인도해야할 교회조차 타락한 나머지,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이용해서 그런 조건들을 성취해 내는 방법(순전히 사기다!)을 가르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정의한 자신의 행복을 돌아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의 행복의 조건, 아니 그의 표현대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the knowledge of God"이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 하나님을 더 체험해 가는 것,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그분의 하나님되심을 더 깨달아가는 것... 그것이 어거스틴이 정의한 자신의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행복의 정의이다. 그 행복은 영원하며, 결코 사라지거나 줄어들거나 빼앗기지 않을 행복이다.

어거스틴의 행복이 바로 내 행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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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


내가 오랫동안 좋아해 왔던 찬양이다. 이 찬양이 내 마음에 울림이 되고, 지금까지도 내 삶을 돌아보며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 찬양의 가사 중 특히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1. "비교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가꿔가고"
세상에서의 삶은 경쟁 가운데서의 삶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비교당한다. 비교의 결과는 두 가지다.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우월감, 못하다고 생각하면 열등감.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는 것이 인생이다.
비교의 인생. 비교로 인해 자신의 가치가 평가되는 인생은 피곤한 인생이다. 그리고 비참한 인생이다. 세상에는 항상 나보다 잘나거나 많이 가진 자가 넘쳐난다. 그들 앞에서 나는 늘 보잘 것 없는 자로 인식이 되고,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심지어 십자가의 은혜조차도 작은 것으로 취급되어버리는 것이 이 "비교"하는 인생의 비극이다.

비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 나를 평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 나에게 이미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할 수 밖에 없는 죄된 모습과 연약한 모습을 들고 그분 앞에 무릎꿇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다. 그 삶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고,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다.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이 진리를 잠시라도 잊어 버렸을 때, 내가 얼마나 비참한 가운데 처하게 되는지를 여러번 경험했다. 이 찬양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내가 남과 비교하는 가운데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허덕이며 살아가는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분이 소망하시는 내 삶을 가꾸어 가고 있는 삶을 사는지를 평가하게 된다.

2. "삶에 지친 사람들 찾아와 쉬어 가도록 우리 맘 속에 누군가의 자리 남겨두며 살아요."
현대 사회는 바쁘게 돌아간다. 모두들 바쁘다. 여유가 없다. 생존을 위해서, 살아 남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기도 힘든 판에, 남을 돌아볼 여유는 그저 사치일 뿐이다. 그것이 세상살이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죄악된 인간이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을 뿐, 결코 천국백성의 삶의 원리가 될 수는 없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4)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말을 한 바로 직후에, 그런 삶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예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바로 그런 삶을 사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나는 어떠해야하는가?
내것을 챙기기도 힘들다. 논문을 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이미 내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느낌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낭비없이 쏟아 부어도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그것을 느낄 때마다, 내가 바쁘고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이 가사를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힘들고 연약한 지체들이 찾아와서 쉬고 힘을 얻을 자리는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 그들을 위해 그늘이 되고 쉼터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삶을 살고, 많은 것을 이룬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 스스로에게 일깨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라도 나 아닌 남을 위한 여유를 남겨두고, 그 여유를 제외한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해야 한다.

나는 이 두 가지의 삶의 원리를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내 딸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자장가로 불러 준다. 태어나기 전부터 그들에게 불러준 찬양이다. 지금은 그 뜻을 잘 알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 가사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아이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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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저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내가 몇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고하겠느냐?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 하지 아니하였나이까?(왕상 22:7-18)


이스라엘 왕인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끔찍히 싫어 했던 이유는, 미가야가 자신에 대해서 늘 부정적인 예언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합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점을 보기 위해서 점집을 찾을 때,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흉(凶)한 화(禍)를 피하고 길(吉)한 복(福)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진 것이 "진리"인가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아합은 지극히 악한 왕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상들을 적극적으로 좇았으며,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에게 미가야를 보내신 것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그 자리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미가야를 통해서 아합이 듣기 싫은 흉한 예언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시며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아합은 그 흉한 예언을 들으면서 가슴을 찢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를 도외시하였으며, 그가 드디어 그 앞에 와서 바른 말로 말씀할 때에도 그를 핍박했을 뿐, 결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가 의존한 것은 그의 귀에 듣기에 좋은 말을 쏟아내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고, 맹인들이었다. 대신 왕의 마음을 파악하는데 전문가들이었다. 왕이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들려주는 자들이었다.

아합은 결국 음악처럼 들리고, 자신의 소망에 긍정적인 확신을 주는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서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 그의 피는 들에서 개가 핥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늘 내 귀에 달콤한 것은 결코 아니다. 때로는 내 폐부를 찌르는 고통의 말씀이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시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셔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을 바로 내 자신이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내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지 못하고 다른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늘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다. 때로 내 삶에 큰 고통이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될 때에도 그것을 잊으면 절대 안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려고 늘 노력해도, 내 스스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말씀을 들고 나에게 쓴소리를 해줄 미가야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는가? 비록 흉한 말, 듣기 싫은 말, 기분나쁘게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고 나에게 다가와 경책하며 돌이키도록 권면할 사람이 내 주위에 있는가?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고 그 전해지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고 그 앞에 무릎꿇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라며 인상을 찌뿌리는 사람인가?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죄를 짓지 않는 자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영적인 어둠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을 책망하는 말씀과 저주의 예언이 선포되었을 때 보이는 그의 반응에 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경책하는 자를 옆에 둔 사람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을 받는 자이며, 큰 복을 누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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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진노... 감사... 두려움...

지난 금요일 저녁.
목장모임을 마치고 11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목장모임에서 받은 은혜로 아내와 나는 참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차에서 내리자 마자 바로 아파트 문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짐들을 챙기고 차 문을 잠그고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우리가 없는 그 짧은 사이. 아이들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 하연이는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집으로 들어가고, 예연이는 엄마에게 와서 하소연을 했다.

"언니가 #^%$*&^%(&^*^@@!$라고 말했어요!"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와 아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험악한 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집에 먼저 들어와 있는 하연이에게 사실확인을 먼저 했다. 정말 그 말을 했는지... 하연이는 그렇게 말했다고 수긍했다.
나는 그 즉시 하연이를 데리고 애들 방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게 하고 손을 들게 했다. 그 벌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그 손 위에 책 두권을 올려 놓았다. 그 때까지도 하연이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듯 했다. 올린 손으로 장난도 치고, 가끔씩 약간의 미소도 머금으며,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작심을 하고 무서운 목소리와 얼굴로 하연이에게 하연이의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일러 주었다. 아빠의 목소리와 얼굴을 통해서 사태가 가벼운 것이 아닌 것을 깨달은 하연이는 점점 더 진지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I didn't mean it..."

그 말 한 마디로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느냐는 듯한 조심스러운 항변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이면에 숨은 하연이의 증오와 미움을 이야기 했고,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닥 말씀하셨다는 것. 그래서 그 미움이 얼마나 큰 죄인지,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시는지를 말씀을 들어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하연이는 자신 안에 있는 동생에 대한 미움과 거기에서 비롯된 자신의 독설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깨닫는 것 같았다.
얼마 후에는 나에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벌서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하소연을 했다.
나는 하연이의 죄에 대한 나의 실망과 분노, 그리고 하나님의 실망과 분노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분노 만큼 고통의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올라간 손에서 느끼는 고통으로 인해 하연이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측은하기도 했고, 잘 시간이 이미 너무 많이 지난 아이에게 계속 벌을 주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를 하지는지, 그리고 그 죄가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그리고 궁극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지를 확실하게 주지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내 딸이기에, 죄를 지극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의 신앙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더더욱 분명히 그의 뇌리에 그 사실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하연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을 때에도 나는 그 옆에 앉아만 있었을 뿐, 손을 내리게 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도 고통이 있었지만, 그래서 그만 자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힘들어 하는 하연이를 보면서 말했다.

"네가 아픈 만큼, 너로 인해서 아픔을 겪은 예연이를 생각해봐. 너의 말과 너의 미워하는 죄는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네가 느끼는 아픔보다 더 크게 아픔을 가져다 주는거야."
"예... 알겠어요.."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예.. 예연이 미워하고, 나쁜 말을 한 거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도 알겠어?"
"예... 잘못했어요..."

그 대화가 있고난 후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하연이에게 손을 내리도록 하고, 씻고 나서 침대에 오르도록 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하연이 옆에 나도 누웠다. 그리고 물었다.

"아빠가 하연이를 미워하는 것 같아?"
"예..."
"그게 아니야... 아빠가 미워하는 것은 하연이가 아니라 하연이가 품는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 나쁜 말이야.. 아빠는 한 번도 하연이를 미워한 적이 없어. 하연이는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거든... 그거 알아?"
"예... 알아요..."
"아빠가 왜 화가났는지 알겠어?"
"예... 알것 같아요.."
"아빠는 하연이가 공부도 열심히하고, 아빠도 잘 도와주고, 때로는 예연이에게 잘 대해주고 하는 여러가지 좋은 것들에 대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아빠의 딸로서 하연이를 사랑해. 그런데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고 아끼는 딸인 하연이 안에 그런 나쁜 마음이 있고, 그것으로 나쁜 말이 입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아빠의 가슴이 너무 아픈거야. 너를 사랑하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지.. 아빠보다도 하연이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연이 안에 죄가 있는 것을 보실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
"아빠는 하연이를 야단치는 지금도 하연이를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 아빠는 하연이의 죄를 야단치는거야. 하연이가 그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동생을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도 그렇고 아빠도 너무 기쁠거야... 이해해?"
"예.. 미안해요, 아빠."
"그럼 이제 기도하자.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나쁜말을 한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거야. 그러니 하나님 잘못했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이제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동생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자."

그리고 하연이와 나는 같이 기도를 했다. 간절히...

"I love you, 하연."
"I love you, daddy."

그리고 하연이는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전날 밤에 심하게 야단 맞은 하연이...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밝은 모습으로 나에게 뽀뽀하고, 내 품에 안기는 하연이... 그리고 예연이에게 최선을 다해 좋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하연이를 보면서, 참 감사했다.

하연이가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알고 감사하며, 동시에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죄에서 멀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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