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저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내가 몇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고하겠느냐?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 하지 아니하였나이까?(왕상 22:7-18)
이스라엘 왕인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끔찍히 싫어 했던 이유는, 미가야가 자신에 대해서 늘 부정적인 예언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합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점을 보기 위해서 점집을 찾을 때,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흉(凶)한 화(禍)를 피하고 길(吉)한 복(福)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진 것이 "진리"인가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아합은 지극히 악한 왕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상들을 적극적으로 좇았으며,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에게 미가야를 보내신 것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그 자리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미가야를 통해서 아합이 듣기 싫은 흉한 예언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시며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아합은 그 흉한 예언을 들으면서 가슴을 찢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를 도외시하였으며, 그가 드디어 그 앞에 와서 바른 말로 말씀할 때에도 그를 핍박했을 뿐, 결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가 의존한 것은 그의 귀에 듣기에 좋은 말을 쏟아내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고, 맹인들이었다. 대신 왕의 마음을 파악하는데 전문가들이었다. 왕이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들려주는 자들이었다.
아합은 결국 음악처럼 들리고, 자신의 소망에 긍정적인 확신을 주는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서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 그의 피는 들에서 개가 핥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늘 내 귀에 달콤한 것은 결코 아니다. 때로는 내 폐부를 찌르는 고통의 말씀이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시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셔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을 바로 내 자신이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내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지 못하고 다른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늘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다. 때로 내 삶에 큰 고통이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될 때에도 그것을 잊으면 절대 안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려고 늘 노력해도, 내 스스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말씀을 들고 나에게 쓴소리를 해줄 미가야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는가? 비록 흉한 말, 듣기 싫은 말, 기분나쁘게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고 나에게 다가와 경책하며 돌이키도록 권면할 사람이 내 주위에 있는가?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고 그 전해지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고 그 앞에 무릎꿇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라며 인상을 찌뿌리는 사람인가?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죄를 짓지 않는 자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영적인 어둠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을 책망하는 말씀과 저주의 예언이 선포되었을 때 보이는 그의 반응에 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경책하는 자를 옆에 둔 사람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을 받는 자이며, 큰 복을 누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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